- 《“지도자가 자신에게 충성하다 소외된 사람을 배려하지 않으면 그 집단의 사기가 오르지 않습니다. 다시 전사가 태어나지 않아요. 한나라당엔 지금 전사가 없어요. ‘홍준표 꼴 난다’며 몸을 사리고들 있어요.” 》
그는 선거사범이다. 지난해 3월 대법원 판결에서 선거법위반 혐의로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음으로써 의원직을 잃었다. 그것은, 그의 혐의에 대한 사법적 논란이야 어쨌든, 불명예스러운 퇴장이었다. 그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의 한 연구소에서 6개월 동안 공부하고 돌아왔다. 잊혀져가는 듯싶던 그의 존재가 다시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 2월. 그는 한나라당 탈당기자회견을 통해 한때 자신이 그토록 충성했던 이회창 총재를 맹렬히 비난했다.
‘신동아’는 그가 8·15 특사대상에 포함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온 후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정치판이라는 무대에서 퇴장당한 배우가 쓸쓸하게 객석에 앉아 한때 자신이 출연했던 연극을 구경하는 심경이 어땠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한사코 인터뷰를 고사하던 그는 복권이 최종 확정된 8월14일 오후 인터뷰에 응했다. 사무실엔 활기가 넘치는 듯했다. 표정이 밝았다. 복권 소감부터 물었다.
“우선 ‘활동’하게 된 게 반갑습니다. 지난 1년6개월 동안 업을 치렀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간은 저한테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20대 후반에 법조에 들어가 20여년간 앞만 보고 살다가 지난 1년6개월 동안 비로소 휴식과 재충전을 했어요. 미국 워싱턴에 가 있는 6개월 동안 과연 미국이라는 큰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느끼고 왔어요. 그리고 내 나라 정치를 곰곰이 분석하고 관조할 기회를 얻었어요. 21세기 내 나라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내 나라의 미래 전략에 대해 많은 생각과 공부를 하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업이라니. 그의 어법에 새롭게 등장한 표현이다. 전투성을 잃어버린 것일까. ‘전사’에게는 영 어울리지 않는 표현을 쓴다. ‘공격 대상’에 대한 적의(?)를 없애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방법을 터득한 것일까.
“나보고 ‘DJ 저격수’라 그러는데, 사실 나는 3김정치에 대한 저격수로 YS의 대선자금과 DJ, JP의 비자금을 죽 공격해왔습니다. 그것이 부메랑이 돼 YS 정권 시절에 여당 의원인데도 재정신청이 받아들여져 DJ 정권하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억울하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업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의 선거법위반 혐의에 대해선 법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유죄증거가 모호한 상태에서 재정신청(공직자의 범죄혐의에 대해 검찰이 기소하지 않을 경우 제3자가 법원에 직접 고소하는 것)에 의해 법의 심판대에 올랐다. 그에 대한 재정신청은 당시 야당 총재였던 김대중 대통령의 이름으로 이뤄졌다. 그가 기소된 것은 선거 과정에 그의 지구당 직원들이 당원들에게 활동비를 지급한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재판 과정에 그가 직접 지시했다는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긴 해도 지구당위원장이던 그가 그 혐의에서 자유로울 순 없는 노릇이다. 그의 말대로라도 ‘관리 책임’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재판결과에 여전히 승복하지 않습니까.
“판결에 승복하지 않는 건 사법제도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승복합니다. 어차피 제게 관리책임이 있으니. 다만 나는 이 재판을 정치적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정치판으로 되돌아가겠다”
―여당 의원에 대한 야당 총재의 재정신청이 받아들여진 것은 흔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법부와 직결된 문제라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런 얘기는 드릴 수 있습니다. 당시 저는 여당 의원으로서 당 총재이자 현직 대통령인 YS의 대선자금과 DJ 비자금 문제를 끊임없이 거론했어요.”
그는 자신의 진로에 대해 정치판으로 되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검사 시절엔 정의를 향한 열정으로, 정치판에 들어가선 당파를 위한 열정, 곧 당과 총재를 위한 열정으로 살았습니다. 이제 다시 당에 돌아가면 내 나라 내 조국을 위한 열정으로 살기로 했습니다.”
인터뷰 도중 그는 여러 곳에서 축하 전화를 받았는데, 이때쯤 이회창 총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이총재에게 감사의 인사말을 하고 조만간 당사로 찾아가겠다는 뜻을 전했다.
―한나라당으로 다시 가는 겁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지요. 98년 대선 이후에 우리 당 의원 36명이 변절해 (여당으로) 넘어갔어요. 15대 의원 중 당적을 바꾼 의원이 80명입니다. 광복 이후 그런 일은 처음일 겁니다. 36명이 야당에서 여당으로 말을 갈아탈 때 약점 있는 의원 중 그쪽으로 안 넘어간, 유일한 의원이 접니다. 저한테도 많은 제의가 있었어요. 대선 직후부터 계속. 넘어갔다면 아마 계속 국회의원 했겠지요. 그러나 나는 그걸 변절이라고 봤습니다. 당 노선이 맘에 안 들면 그 안에서 노선투쟁을 해서라도 바꾸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지휘부가 맘에 안 들면 지휘부를 교체하는 작업이 필요하고. 내가 대여 투쟁에 앞장 선 것은 DJ 정부가 우리 당을 무너뜨리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걸 막기 위해 어차피 누군가 나서야 하는데 내가 제일 입심이 좋다 해서, 가장 효율적인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전사라고 해서 나서게 된 겁니다. 한나라당은 내가 선택해 내 정치신념을 펼치던 당입니다. 적절한 시기에 되돌아갈 것입니다.”
―정치판에 적잖이 실망하셨을 텐데요.
“우리나라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고작 이 수준밖에 안 되는가 하고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을 도와 나라를 옳은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국민들이나 뜻이 있는 사람들이 정치를 외면하고 자꾸 떠나버리면 도둑들이 나라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정치판을 바꾸는 작업을 하기 위해 돌아가려는 것입니다.”
그는 한국 정치판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대권 정치’를 꼽았다.
“우리나라 정치가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은 대권정치 때문입니다. 오로지 대권을 향한 정치를 하기 때문에 생활정치가 안 되고 국민 복지를 향한 정치가 안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이 대권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대권을 놓치면 망한다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대권을 잡으면 상대당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대권을 못 잡은 당은 존립조차 위태로워집니다. 대권과 관련 없는 정치 분야, 예컨대 의료 대란,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그런데 이런 문제에 대해선 정치인이 관심 갖기를 꺼리고 당에서도 큰 관심이 없어요. 대권 탈취에 당력을 집중시키니 의원들이 국민 대표가 아닌 총재의 사병으로 전락합니다. 정치 패러다임을 바꾸려면 하루빨리 대권 정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한나라당에 돌아갈 경우, 그런 뜻을 펼칠 수 있다고 봅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당내에 상당히 많다고 봅니다. 정치인의 자기 위상에 관련되는 문제니까요. 이제까지는 3김이 모든 정치인을 줄 세웠어요. 3김 외에는 모두 졸병들이야. 사단장이 있으면 부사단장이 있고 작전참모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단장을 빼면 전부 졸병만 있는 게 한국 정치의 현실이었습니다. 3김이 물러난 뒤엔―이젠 물러날 수밖에 없잖아요―다양한 정치체제, 열린 정당체제로 가야 합니다. 중진의원들도 국회 회의장 몸싸움에 뛰어들어 머리 처박고 싸우지 않으면 나중에 공천을 못 받는, 이런 행태가 사라지지 않고선 나라 희망이 없어요.”
―DJ 정부가 야당을 파괴하려 해 대여 투쟁에 앞장 섰다고 했는데, DJ 정부가 가장 잘못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DJ는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 출신입니다. 한국 정치사에서 30년간 비주류로 지내왔습니다. 광복 이후 우리 사회의 주류를 형성해온 이른바 메이저 출신들이 지난 대선 때 분열했어요. 메이저 세력을 통합하지 못해 이총재가 진 것이지, DJ가 이긴 게임이 아닙니다. 이총재가 자충수를 두어 자멸한 게임입니다. 권력기반이 약한 마이너 출신으로 정권을 잡았으면 메이저와 화해를 통해 권력기반을 확충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경찰 검찰 국세청 국정원 등 권력의 칼을 총동원해 전방위로 메이저를 압박하는 정책을 시작했거든요. 여기서부터 잘못된 겁니다. 대북정책은 햇볕정책으로 하면서 대야정책은 메이저 괴멸정책으로, 강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에 따라 대북정책은 성공했지만 민심을 잡는 데는 실패했어요. 권력을 잡았을 때 겸손했다면 이 정부는 지금쯤 탄탄한 반석에 올랐을 겁니다. 대북 화해에 앞서 내부 화해가 이뤄져야 합니다. 그 결집된 에너지를 모아 남북통일로 가야 합니다.”
―국정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힘을 가져야 한다는 현실논리도 인정돼야 하는 것 아닙니까. 워낙 기득권 세력에 눌려왔잖습니까. 수십년 동안 권력을 누려온 세력과 같은 기준으로 비교하는 것은 형평성에 문제가 있어 보이는데요.
“스페인의 경우 프랑코 총통 사후 민주화를 이루는 데 15년이 걸렸어요. 개혁은 신구세력간 화해를 통해 중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급격한 변혁은 반드시 역작용이 옵니다. 프랑스 혁명 때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당이 공포정치로 혁명을 완수하는 듯싶었지만 결국 마무리는 라파예트라는 중도파가 했잖아요. DJ는 선거로 이긴 거지 혁명으로 이긴 것이 아니에요. 집권초기를 돌아봅시다. 무려 1년6개월 동안 야당탄압에만 주력했습니다. 또 날치기는 얼마나 했습니까. YS 정부 때보다 훨씬 많이 했습니다. 힘을 통해서만 국정을 이끌고 가려다 내정이 완전히 혼란에 빠진 겁니다.”
이회창의 방어형 리더십
―돌이켜 보면 사사건건 야당이 발목 잡는다는 비판이 있지 않았습니까.
“야당 처지를 살펴봅시다. 대선 패배 후 한나라당은 그야말로 모래알 집단이었습니다. 한나라당 성분구조를 한번 들여다봅시다. 군사쿠데타 세력, 민정당 세력, 민주당 세력, 재야세력 등 울트라레프트에서 울트라라이트까지, 극좌와 극우가 뒤섞인, 한마디로 이념과 정체성이 모호한 집단이 한나라당입니다. 한목소리가 안 나오는 당이에요. 모래알 같아. 언제 흐트러질지 모르는 당. 대선 이후 조순 총재가 당을 이끌긴 했지만 굴러온 돌에 불과했기 때문에 뿌리가 없었어요.
대선 이후 DJ 정부는 한나라당을 괴멸시키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공작으로 사람 빼가고, 말 안 들으면 편파사정하고. 그때부터 한나라당의 단결이 시작됐습니다. 그때까지 당내에서 밥도 같이 안 먹던 사람들이 생존본능으로 뭉치기 시작한 겁니다. 동지애가 생겼지요. 한나라당이 자각해서 뭉친 게 아니라 DJ 정부가 야당파괴공작을 하는 바람에 그리 된 겁니다.
야당이 자주 발목을 잡았다는 비판엔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당이 야당의 존재를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에 야당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행동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협상용으로 발목을 잡았던 거요. 살아남기 위해. 무차별 공격이 들어오니까. 그런데 그때마다 날치기해버리니 야당은 늘 닭 쫓던 개 신세가 됐지요. 그런 식으로 늘 당했다고. 발목 잡는다는 누명만 쓰고 실리는 하나도 챙기지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한나라당 내에서 이총재 리더십이 문제가 됐던 겁니다.”
그는 이회창 총재의 리더십에 대해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다. 야당 총재는 상황을 창출하고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데 한 번도 그런 지도자상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차라리 DJ와 협상해 공존하자거나 줄 건 주겠다고 해 실리를 취하든지. 원칙을 내세우기만 했지 결국 얻은 건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지도력에 대한 비판이 생기는 겁니다. 98년 9월 이총재가 야당 총재로 복귀하는 그날부터 세풍수사가 시작됐습니다. 서상목 출국금지하고, 총풍사건 터지고. 이총재는 이른바 창조적 리더십을 한번도 발휘해본 적이 없어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생존본능으로 웅크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지난 4·13 총선까지, 무려 2년 동안을.”
그는 이총재를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의 리더십을 네 가지로 분류했다. 그에 따르면 YS는 공격형, DJ는 수인(受忍)형, JP는 기회포착형인 반면 이총재는 방어형 리더십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을 창출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이른바 창조적 리더십을 발휘한 지도자는 고 박정희 대통령밖에 없다는 게 홍 전의원의 분석이다.
“당시 주어진 상황도 각박했지만 지도력도 미흡했습니다. 21세기 우리나라 총재의 지도자가 가져야 할 리더십은 창조적 리더십입니다. 그런데 이총재는 완전한 수비형입니다. 이는 오랜 법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법관들은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합니다.”
―의원 시절 저격수니 홍위병이니 행동대장이니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요.
“검사 시절 저에겐 ‘통제할 수 없는 검사’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단독 플레이에 능한 사람이라는 것이죠. 검찰 조직의 질서 속에선 수사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 혼자 죽을 각오하고 치고 나가는 식으로 수사하다보니 조직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으로 인식된 겁니다. 이런 오명을 벗기 위해 정치판에 들어가선 오로지 당파를 위한 열정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격수도 되고 홍위병도 됐습니다. 그 별명들이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다시 당에 돌아가면 예전과 달리 당과 총재가 아닌, 조국을 위한 열정으로 일할 겁니다.”
―지난 2월22일 탈당 기자회견 때 ‘광란의 정치파티’라는 표현으로 정치권을 비판했는데요. 이는 주로 한나라당에 대한 환멸을 나타낸 표현 아니었습니까.
“그때 이총재의 공천 행태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치판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정치적 신의인데, 이기택·김윤환 선배 등 이회창씨를 총재로 만드느라 애써온 사람들이 (공천에서) 탈락하는 걸 보고 ‘아, 정치는 이런 거구나. 정치는 이렇게도 하는구나’ 하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당을 떠나 밖에서 차분하게 정치의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그랬던 겁니다.”
당시 기자회견에서 그는 ‘자아비판’을 전제로 이총재를 격렬히 비난했다. 자아비판이란, 이를테면 이런 표현이다. “98년 6월 당헌상 임기가 보장된 조순 총재를 내쫓는 데 앞장서는 부끄러운 짓을 서슴지 않으며 이회창 총재를 맹목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또 “한나라당을 지키는 ‘DJ 저격수’ 역할도 열정적으로 수행해 왔다”며 자신의 주된 임무가 ‘저격수’였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총재 주변 측근들이 문제
―기자회견 때 ‘내시’라는 표현도 썼는데요?
“이총재 측근들 중 문제 있는 사람들을 표현한 겁니다. 이기택·김윤환씨 등을 모양 좋게 배려했으면 당 단합에 크게 도움이 됐을 겁니다. 당시 공천은 이총재의 뜻이라기보다는 이총재를 둘러싼 주변 인사들의 뜻이 작용된 것으로 봅니다.”
―당내에서야 신의가 문제됐는지 몰라도 바깥에선 ‘개혁적인 물갈이’라며 평이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공천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도 나쁘지 않았구요.
“개혁과 혁명은 다릅니다. 개혁은 신구 조화로 이뤄야 합니다. 반면 혁명은 다 바꾸는 것입니다. 신의도 지키면서 개혁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전당대회만 염두에 두고 공천한 것이죠.”
―당시 공천에서 밀려난 사람들 중엔 구시대 정치인의 표본으로 시민단체들도 퇴출 대상자로 꼽았던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구시대 표본이 그 사람들뿐입니까. DJ도 그에 해당합니다. 민주당엔 없습니까. 시민단체 주장이 꼭 옳다고 할 순 없습니다.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신의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지지하고 도와준 사람들을 버리면 안 됩니다. 지역구는 주지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배려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전장에 나가 부상을 입은 병사를 돌보지 않는 지휘관을 가진 집단은 사기가 엉망입니다. 그래서는 누가 전장에 다시 나가려 하겠습니까. 그 집단이나 지휘관은 전투능력을 상실합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이총재는 전장에서 부상을 입은 병사를 돌보지 않은 비정한 지휘관이다.
“지도자가 자신에게 충성하다 소외된 사람을 배려하지 않으면 그 집단의 사기가 오르지 않습니다. 다시 전사가 태어나지 않아요. 한나라당에 지금 전사가 있나. 없어요. 당과 총재를 위해 전투하다 부상입으면 자기 혼자 그 상처를 안고 가야 합니다. 당과 총재가 외면하면 누가 전투하겠어요. 지금 누가 나서요. 아무도 안 나서려 해요.
정형근 의원 같은 이도 이제 나서지 않습니다. 당과 총재를 위해 열심히 싸워봐야 혼자 희생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개혁지향적인 젊은 의원들도 ‘폼 잡다 홍준표 꼴 난다’며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당이 운영되면 나중에 대선 때 크게 문제가 될 겁니다. 참된 장수는 내가 죽더라도 부하는 살려야 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만 살겠다고 하면 부하들이 그 장수를 위해 충성을 바치겠습니까. 부하들 마음이 다른 데 가 있으면 그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지난 총선은 결코 이총재가 잘해서 이긴 게 아닙니다. 영남 지역에 있는 반DJ 성향의 유권자들이 뭉쳤기에 이긴 겁니다.”
―전장에 나가 부상당한 병사를 돌보지 않았다는 건 구체적으로 뭘 말하는 겁니까.
“김윤환 전의원은 이총재를 대통령 후보로 만들고 당 총재로 만든 1등공신입니다. 그의 정치노선이 바람직하냐 그렇지 않으냐는 문제와 이총재가 그를 배려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 하는 문제는 별개입니다. 당 이미지가 손상되더라도 그를 배려해 신의를 보여줬어야 합니다. 이총재의 정치경력이 일천해 그런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의 사기를 높이고 결속력을 갖추려면 전장에서 상처 입고 후송된 사람을 가장 먼저 돌봐야 합니다. YS DJ JP는 그걸 제일 중시해요. 여론 보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구제하고 살립니다. 그러니 충성하는 사람이 많지요.”
한나라당은 하이에나 집단
―공천에서 떨어진 중진의원들에게 동병상련을 느낀 건 아닙니까.
“그런 감정이 좀 있지요. 나를 내치지 않았습니까. 의원 그만두고 1년6개월 동안 당에서 내쳐졌지. 한나라당 지도부에서 나에 대한 배려를 털끝만큼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거꾸로 나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오더라구요. 아하, 정치판은 하이에나 집단이구나. 하이에나가 어떤 동물입니까. 하이에나는 시체만 찾아 다닙니다. 동료가 쓰러지면 동료 시체를 밟고 지나가지 않습니까. 하이에나 세계에선 동료들에게도 상처입은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됩니다. 동료라도 뜯어먹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선 당이라는 게 의미가 없지요. 어차피 선거권, 피선거권도 없고. 법률적으로 당 구성원도 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일단 떠나 있자, 본업(변호사)에 충실하자, 그래서 탈당한 겁니다.”
―당시 기자회견에서 이총재에게 ‘보복적 리더십‘을 버리라고 말했는데요.
“큰 정치를 하려면 가슴에 칼을 품어선 안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당시 공천은 칼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이총재 리더십에 대한 비판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이 ‘포용력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같은 맥락이에요. 포용력이 없다는 것은 대쪽 이미지와 상통합니다. 정치에는 적합지 않은 이미지입니다. 정치는 재판이 아닙니다. 잘못된 사람도 달래서 데리고 가는 게 정치입니다. 이총재가 대권을 잡으려면 대쪽 이미지를 빨리 불식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판사 때나 어울리는 얘기입니다.”
그는 의원직을 잃기 직전까지 ‘저격수’ 임무에 충실했다. 99년 3월9일에 대법원 판결이 나왔는데 3월3일 대정부질의 때 그는 DJ 대선자금과 총풍사건을 공격했다.
―막판까지 대여 투쟁 선봉에 섰는데요. 장렬한 전사를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까.
“그해 2월24일 나와 친한 국민회의 선배가 ‘이번엔 좀 나서지 말라’고 충고하더군요. 판결이 임박했다면서 말입니다. 알겠다고 했지요. 이틀 뒤 이부영 총무가 ‘대정부질의 때 DJ 정부 1년을 평가해야 하는데 정치 분야를 총괄 질의해달라’고 부탁합디다. 사약을 받아놓은 사람에게 또 이런 걸 주문하나 싶었지요. 그렇지만 안 하겠다면 비겁해 보일 것 같아 이총무의 부탁을 받아들였습니다.
―사약 받은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는 말인가요.
“그 일이 제가 정치판을 떠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바로 그날 대법원 판사들이 판결에 합의했다고 들었거든요. 그걸 알면서 사지로 들어갔어요. 그날부터 짐정리를 시작했어요. 나중에 그 선배가 왜 그랬냐고 묻기에 ‘이쯤에서 정리하는 게 옳다고 본다. 고등법원으로 파기환송돼본들 그 사슬에 묶여 어차피 남은 임기는 행동이 부자연스러울 텐데 여기서 그만두는 게 떳떳하다’고 말해줬습니다. 그리곤 농담 삼아 ‘나중에 복권 얘기가 나오면 반대나 하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이총재와 관계가 나쁘지 않았지요?
“나쁠 이유가 없지요. 내가 홍위병이었으니.”
그는 지난해 6월 미국 연수를 떠나기 직전 모 월간지에 DJ와 이총재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그 일이 계기가 돼 이총재와 ‘오해’가 깊어졌다고 한다.
“지금의 DJ, 이회창으론 나라를 못 살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총재 대통령 만들기에 노력해왔던 사람으로서 ‘이런 점들을 안 고치면 다음에도 어렵다’는 뜻으로 충고한 것인데 이총재 측근들이 상당히 민감하게 받아들인 모양입니다. 연수중에 이총재가 워싱턴에 온 적이 있는데 나를 만나지도 않고 돌아갔어요. 내가 귀국한 후에도 서먹한 관계가 계속됐어요.”
―이총재보다는 측근들에게 더 문제가 있다는 얘기로 들리는데요.
“그런 측근이 몇 명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들이 총재를 오도할 때가 많아요. 이총재가 정치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 모르는 점이 많습니다. 예컨대 지난번에 JP를 만난 건 큰 실수입니다. 교섭단체 구성에 관한 법안 상정을 눈앞에 두고 JP를 만났다는 건 그걸 용인하겠다는 뜻이거든요. 국민들 눈에는 그렇게 비치지요.
이총재가 밀약이라는 말에 결벽증을 갖고 있는 것도 잘못입니다. 정치하다 보면 밀약도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시점이 안 좋았어요. 차라리 총선이 끝난 직후 JP를 끌어안았다면 좋았지요. 그런데 총선 끝난 후 자민련이 교섭단체를 구성하지 못하도록 같이 사진도 못 찍게 했잖아요, 한나라당 원내총무가. 그래 놓고 뒤늦게 접촉하는 건 원칙 없는 짓이었습니다. 측근들이 이총재를 잘못 보좌하는 겁니다.”
그는 얘기의 초점이 이총재 리더십 비판에 맞춰지자 “개인적인 원한 표출로 비치면 곤란하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전엔 이총재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최근 그런 원념(怨念)을 버렸다”고 덧붙였다.
“기본적으로 적대관계는 아닙니다.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총재가 어떤 식으로든 한 번 더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없습니다. 4·13 총선 직후 (이총재가) 많이 달라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방어형 리더십에서 창조적 리더십으로 나아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예전엔 밑에 있는 사람들한테 마음을 안 줬어요. 요즘엔 지구당위원장이나 의원들과 속 깊은 대화를 한다더군요.”
―‘대안 부재론’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나라당에 이총재만한 대선 후보는 없다고 보십니까.
“대안 부재죠. 신한국당 때도 대안부재론이 그 양반을 대선 후보로 만들었고, 한나라당으로 바꾼 후에 총재로 선출할 때도 그렇고. 다음 대선 때까진 여전히 그 논리가 유효할 겁니다.”
이제 저격수는 안 한다
―최근 통일 문제와 관련한 이총재의 언행을 두고 이총재의 통일관이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라거나 냉전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대선과도 관련된 일이라고 봅니다. 러시아―중국―북한―DJ정부로 이어지는 세력과 미국 공화당 정부와 한나라당의 연합세력이 대립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대결구도가 형성되면 통일문제가 아주 어려워집니다. 우리나라 장래를 위해선 불행한 일입니니다. 제가 요즘 독일 통일사를 공부하는데 통일을 이루기까지 서독이 가장 오랫동안 설득한 나라가 프랑스였습니다. 남북 통일로 가는 길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나라는 역시 미국입니다. 미국의 가장 큰 잠재적국은 중국입니다. 미국은 한반도가 통일될 경우 중국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한민족이 중국과 가까웠으니까요. 미국의 이런 의혹을 없애주는 방향으로 외교정책을 펴야 합니다. 지금 상황은 친러파 친미파 친청파 친일파 등이 난립했던 구한말을 연상시킵니다.”
―지난 6월 남북정상회담 후 한나라당의 통일정책에 대한 의문이 일고 있습니다. 통일 문제만큼은 대승적 차원에서 여야가 힘을 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나라당 의원들의 성향을 살펴봅시다. 광복 이후 50년간 냉전시대를 주도하던 세력의 집합체입니다. 반면 DJ는 통일세력입니다. 21세기 지상과제는 통일입니다. 야당인 한나라당이 DJ정부가 주도하는 통일세력에 2중대로 합류하기는 어려운 일 아닙니까.
그래서 정확한 좌표를 설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구도라면 2002년 대선에서도 어렵습니다. 2002년 10월에 경의선이 복구된다면, 그리고 그때까지 한나라당이 냉전세력으로 남아 있다면, 대선에서 승리하겠습니까.”
그는 이총재 비판 부분이 맘에 걸리는 듯싶었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이총재에 대한 비판을 너무 부각시키지 말 것을 당부했다.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그에게 물었다.
―돌아가면 저격수는 안 합니까.
“이제 안 해요. 저격수는 당시 상황에서 한 것이지요. 두고 보세요. 전처럼 이총재를 맹목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