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년간 국어의 로마자표기법 개발에 매달려온 끝에 ‘모의 발음 부호법’을 고안해낸 김복문교수. 최근 정부가 확정한 새 로마자 표기안이 ‘완전한 실패작’이라며 헌법소원을 벼르고 있다. 새 표기법의 어떤 점이 문제인지, 그리고 그는 왜 ‘돈 안되는 일’에 반세기라는 엄청난 세월을 투자해 왔는지…》
국어 로마자 표기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경제계와 관련 학계 일각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섰는가 하면, 기존 표기법으로 각종 국제대회를 준비중이던 지방자치단체들도 엄청난 재정적 손실과 함께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다. 한나라당 정책위원회(의장 목요상)도 ‘정부의 로마자 표기 시안 재검토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논란에 가세했다.
이 가운데 지난 50년 동안 국어 로마자 표기법 개발에 매달려 온 끝에 ‘모의(模擬)발음부호법’을 고안해낸 김복문 한국어로마자표기학회 회장(충북대 국제경영학과 명예교수)은 최근 시행된 로마자 표기안이 ‘완전한 실패작’이라며 헌법소원을 벼르고 있다.
일찍이 ‘한·일 로마자 표기의 비교연구’라는 제목으로 연구서를 낸 바 있는 김회장이 새 표기안을 놓고 혹평하는 근거는 무엇인지, 그리고 로마자 표기법 연구에만 반세기를 바친 그의 범상치 않은 인생 행로를 들어보기로 했다.
―개정 표기안을 ‘완전한 실패작’이라고 혹평했는데, 그렇게 평가한 기준과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래도 내가 혹평한 건 나은 편이다. 로마자 표기법 개정에 깊숙이 참여한 관계자조차 ‘쓰레기통에 들어갈 안이 통과됐다’며 개탄하는 실정이다. 우선 새로 개정된 국어 로마자 표기법의 가장 큰 문제점은 모음 발음 기준이 영어인지 이탈리아어인지 명확하게 구분해 놓지 않아 경우에 따라 발음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금강산, 거북선, 이성계, 독도 등을 영어로 발음할 경우 전혀 엉뚱한 발음으로 읽힌다. 새로 시행된 표기법에 따르면 각각의 단어는 Geum Gang San(금강산), Geo Buk Seon(거북선), I Seong Gye(이성계), Dok Do(독도)로 표기되는데 이것을 영어 발음으로 읽으면 기가 막힌다. 쥼갱샌, 죠븍숀, 아이숑가이, 독두 이렇게 발음된다. 실제로 개정 과정에 이 단어들을 가지고 직접 실험해본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김포공항에서 만난 20여명의 외국인이 한결같이 쥼갱샌, 죠븍션, 아이숑가이, 독두로 발음했다. 그런데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확정했다.
로마자를 국어로 하지 않는 나라들이 자국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목적은, 외국인으로 하여금 자국어 발음을 정확하게 할 수 있게 함으로써 내·외국인간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자는 데 있다. 국제간 각종 교류를 원활히함도 물론이다.
그런데 새롭게 고친 표기안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현실 발음과 전혀 달리 엉뚱한 발음을 유도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현실과 동떨어진 표기법을 만들어놓고 사용을 강요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처사다. 더구나 문제점 투성이인 표기안에 입각해 간판이나 도로 표지판 등을 다 바꾸려면 국민 혈세가 얼마나 낭비되겠는가.”
“폐기된 한글학회안의 재탕”
―종전까지의 국어 로마자 표기법이 반달표와 어깨점 등 특수부호를 사용해 불편하다는 지적과 함께 가장 우리말에 근접한 로마자 표기를 찾기 위해 개정을 서두르지 않았는가. 그런데 김회장이 지적한 이러한 오류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 이미 84년 용도폐기 된 한글학회안(일명 문교부안)을 재탕해 우리 소리 값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오류를 범했다. 특히 현행 표기법과 과거 한글학회안, M-R안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아, 이, 우, 에, 오’에 대한 로마자 표기를 하나같이 ‘a, i, u, e, o’로 하고 있는 것은 일본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그대로 모방한 대표적 예다.
일본어는 모음이 ‘a, e, i o, u’ 5개밖에 없기 때문에 로마자 표기의 발음 기준으로 이탈리아어 모음을 사용해도 되지만, 우리 국어는 모음이 21개나 되기 때문에 이를 모방할 경우 그 음가(音價)를 충분히 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한편으로는 특수부호를 없앰으로써 오히려 발음 혼란을 가중시켰다는 비난마저 받고 있다. 그런데 영어 발음을 기준으로 하면 ‘a’가 ‘아’로 발음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뿐만 아니라 영·미인들은 ‘아’ 소리를 들을 때는 ‘ah’로, ‘에’ 소리를 들을 때는 ‘eh’로, ‘우’ 소리를 들을 때는 ‘oo’로, ‘오’ 소리를 들을 때는 ‘oh’로 표기되는 로마자를 연상하게 마련이다. 이 때문에 현행 표기법을 영어 발음으로 할 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김회장이 오래 전 개발해 일관되게 수용을 주장해온 ‘모의발음부호법’은 영어 발음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이 방식은 앞서 지적한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가. 모의발음부호법에 의한 로마자 표기법은 어떤 것인가.
“내가 개발한 것은 기존 로마자 표기법과 달리 영어 발음을 기준으로 삼았다. 국어의 로마자 표기화 대상은 음가 기준으로 2793개이며, 철자 기준으로는 1만1172개에 이른다. 따라서 다양한 모음과 자음에다, 특히 종성(終聲) 소리를 갖고 있는 영어를 로마자 표기의 발음 기준으로 삼으면 한국어의 완벽한 로마자 표기화가 가능해진다.
일본어의 로마자 표기에서처럼 한국어 모음에 대한 발음 기준을 이탈리아어로 할 경우 한글 모음 21개 중 그 음가를 살릴 수 있는 것은 ‘아(a), 야(ya), 오(o), 요(yo), 우(u), 유(yu), 이(i), 에(e), 예(ye), 와(wa), 외(we), 위(wi)’ 등 12개뿐이다. 나머지 9개의 한국어 모음 표기는 태생적으로 불가능하다. 반면 모의발음부호법은 음가와 철자를 기준으로 한 소리값을 다 차별화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 동안 수 차례 외국인을 상대로 실험해본 결과 한결같이 우리말 원음과 흡사하게 발음했다.”
김회장의 모의발음부호법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어떠할까. 사단법인 한국어문회(이사장 이응백)와 한국어문교육연구회(회장 정기호)는 ‘한국어 로마자 표기법의 이론체계 타당성에 대한 학문적 평가’라는 제목으로 99년 10월8일 다음과 같은 내용을 김회장에게 보낸 바 있다.
“로마자 표기는 외국인이 한국어를 발음함에 있어 한국인이 듣기에 어색하지 않게 발음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귀 학회(한국어로마자표기학회)에서 보내온 자료 중 비디오테이프의 외국인 발음이 이 원칙에 맞음으로 찬동을 표합니다.”
문화관광부의 ‘이상한’ 수용 불가론
그러나 문화관광부는 표기법 개정 과정에 김회장의 모의발음부호법을 검토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오, 으, 이, 에가 받침이 있을 때는 ‘o, u, i, e’였다가 받침이 없으면 ‘oh, uh, ee, eh’가 되어 매우 복잡함. 영어 중심의 표기법이 모음을 2 글자 이상으로 하여 경제성이 떨어짐. 국어 발음을 정확하게 할 수 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름. ‘서울(surool)’은 ‘수룰’로, ‘서인천(surinchurn)’은 ‘수린추른’으로, ‘서일(suril)’은 ‘수릴’로 읽힘. 로마자 표기는 경제성이 중요한 요소인데 소수 의견(김 회장 지칭)은 경제성이 매우 떨어짐.’
이와 관련해 김회장은 지난 6월 반박문을 국회 문화관광 상임위원회에 보냈다. 다음은 김 회장의 반박문을 요약한 것이다.
‘본인의 로마자 표기 방식은 영어 발음을 기준으로 할 때 맞는 것이지, 일본어처럼 이탈리아어 발음을 기준으로 하였을 때는 영어에서처럼 정확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문화관광부가) 분명히 영어 발음을 기준으로 한다는 모의발음부호법의 전제조건을 무시하고서 ‘서울, 서인천, 서일’의 발음을 이탈리아어 발음 기준으로 ‘수를, 수린추른, 수릴’로 표현한 것은 저질스러운 왜곡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영어 발음에서 한 모음에 두 철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 마치 경제성과 관련된 것인 양 말하지만, 실제로 몇몇 국어 로마자 표기법 관계자는 자신의 영문 이름을 표기할 때 하나의 국어 모음에 두 개의 로마자 표기를 쓰고 있다. 그것 때문에 경제성에 문제가 된 적이 있는지 당사자들이 자문자답해 보면 잘 알 것이다.
그리고 ‘오, 으, 이, 에’의 표기를 ‘oh, uh, ee, eh’로 하다가 받침이 있을 경우 달라지는 것을 두고 복잡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언어의 길이 단위인 ‘박(拍)이론’을 따르면서 글자 수를 줄이기 위한 조치로 익히면 그만인 것을 마치 복잡한 것인 양 과장하고 있다. (중략) 우리나라 모음 1개에 로마자 철자 2개가 필요하기 때문에 비경제적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 주장이다. 로마자에 있는 모음 5개에 21개나 되는 우리 한글 모음자를 억지로 맞추려고 하는 무리를 범해 입게 될 물질적·금전적 손해와 정신적 피해는 상상도 못하리만큼 어머어마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회장 설명대로라면 모의발음부호법이 획기적인 안인 것 같은데, 왜 이번 개정안에서 고려되거나 수용되지 않았나.
“새로운 시행안이 확정되기 전 외국인을 대상으로 현행 표기법과 모의발음부호법 두 가지를 적용해 실험한 결과물을 비디오테이프로 제작해 여러 관계기관에 보냈다. 다른 것은 접어두고라도 만약 비디오테이프를 봤다면 현행 표기법에 따라 하는 외국인의 발음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무시하고 실용성과 동떨어진 개정안이 확정됐다.
뿐만 아니라 로마자 표기법에 대해 각계 각층에 의견을 개진하고 수차례 건의안을 올리는 등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나를 만난 사람들의 첫마디가 ‘당신 전공이 뭐냐’는 것이었다. 마치 ‘남의 밥그릇을 네가 뭔데 넘보냐’는 식이었다. 심지어 ‘당신 안(案)은 내가 있는 한 절대 수용하지 않는다’ ‘특허가 없으니 빼앗으면 그만’이라는 등 상식 이하의 발언을 한 사람도 있었다. 어떤 고위직 관계자는 ‘제발 임기 동안 조용히 지내고 싶으니 골치 아픈 일 만들지 말라’고까지 했다.
이번 로마자 표기법 개정안은 국익을 무시하고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특정 집단의 극단적 이기주의가 빚은 그릇된 결과이자 관료들의 무사안일주의, 탁상행정이 만들어낸 전형이다. 개정 당사자조차 ‘쓰레기통에 버릴 안이 통과됐다’고 할 만큼 개악을 해놓고 국민에게 따르라고 강요하는 것은 관료주의의 폭거다.”
―현행 로마자 표기법이 확정되기 전 여러 차례 공청회가 열렸다. 왜 공개적인 자리에서 김회장의 의견을 적극 개진하지 않았나. 그랬다면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각본에 따라 진행된 새 표기법 공청회”
“다섯 차례 공청회가 있었다. 그중 내가 참석한 것은 세 번이다. 그런데 말이 의견수렴이고 공청회지, 이미 안을 정해 놓고 사전 각본에 따라 밀어붙이는 식이었다. 대표적 예가 97년 5월6일에 있었던 공청회다. 당시 문화체육부와 국립국어연구원이 주최한 공청회에서 문체부 장관 지시로 국어연구원 개정시안과 함께 모의발음부호법이 발표되도록 예정돼 있었다.
당일 발표장에 갔는데 사회를 보는 국어연구원장이 자신의 ‘직권’이라면서 나를 발표자 자리에 앉지도 못하게 했다. 내 자리가 공석인 채 공청회가 진행됐는데 너무 분통이 터져 당시 현장사진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 이날 발표자였던 나는 발표는커녕 단 3분 동안 의견을 개진하라는 형식적 기회만 얻었을 뿐이다. 그것도 내 안(案)에 대한 발표가 아닌, 국어연구원의 개정시안에 대한 의견으로 못 박았다. 더군다나 이때 문화체육부 국어정책과 명의의 초청장은 주소가 잘못 표기된 채 공청회 다음날인 7일 내게 도착했다. 이 외에도 외국인을 내세워 미리 짠 각본대로 내가 개발한 안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도록 하는가 하면, 그동안 로마자 표기법을 둘러싸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파렴치한 일들을 겪었다.
내가 겪은 우여곡절을 잘 아는 관계자는 ‘김교수가 서울대 출신이 아니었으면 일찌감치 로마자 표기법을 포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로마자 표기법 관련 기관과 관계자들의 파벌주의를 겨냥한 뼈 있는 말이다.”
참고로 김회장은 1953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2년 수료한 후 미국으로 날아가 미주리대 경제학과에 편입, 졸업했고 57년에는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경제학자다. 58년 한국은행 조사부 근무에 이어 61년 한국무역진흥공사 조사과장으로 입사, 해외공관을 돌다가 80년에 사직했다. 그리고 81년 충북대 무역학과 교수로 학계에 복귀, 현재는 충북대 국제경영학과 명예교수로 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일반인이 익숙한 국어 로마자 표기법 발음을 깡그리 무시하고 굳이 영어 발음을 기준으로 한 표기법을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눈에 익숙지 않아 얼핏 보기에 생소한 감이 없지 않다. 또 일각에서 ‘미국식 알파벳 맞춤법’이라는 소리까지 나오지 않았나.
“우선 나의 경험담을 예로 들겠다. 한국무역진흥공사(KOTRA)에 근무할 때 나는 미국, 캐나다 등지의 무역관장으로 오랫동안 나가 있었다. 이때 상대하던 많은 바이어들한테 한국 여행을 권했다. 그중 한 명이 한국으로 여행을 다녀온 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 하는 말이 ‘한국은 너무 살벌하다. 웬 전쟁지역이 그렇게 많으냐. 가는 곳마다 ‘gun’이라고 씌어 있어 총 맞을까봐 제대로 여행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무슨 무슨 ‘군’하는 지역 단위의 로마자 표기가 영어로 총을 의미하는 ‘gun’으로 적혀 있었던 것이다. 또 ‘군청에 데려다 달라고 했는데 총기 관리소에 내려줘서 두려웠다’고 투덜댔다. 군청 역시 ‘gun office’로 씌어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은 택시기사에게 비원에 내려 달라고 했더니 병원에 데려다 주었다면서 ‘다시는 한국에 안 가겠다’고 했다. 당시 로마자 표기법에 따른 ‘biwon’을 영어 발음으로 읽으면 ‘바이원’이 되는데 ‘바이원 바이원’하니까 택시기사가 제대로 못 알아듣고 병원에 내려준 것이다.
바뀐 현행 로마자 표기법 역시 영어 발음을 기준으로 할 때 ‘퇴계로’가 ‘토가이로’, ‘장흥’이 ‘쟁흉’이 되는 등 문제점이 적지 않다. 영어가 국제어로 통용되고 있고, 또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국내 도로표지판, 관광명소, 문화재, 이름 등을 표기한 로마자 표기를 영어 발음으로 읽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무시한 현행 로마자 표기법으로는 다가오는 2002년 월드컵은 물론이고, 앞으로 있을 많은 국제대회 내지 국제행사에서 외국인의 혼란을 더욱 부채질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초·중·고·대학생들의 올바른 영어 교육과 습득을 위해서도 영어 발음 위주의 표기법이 필요하다. 앞에서도 얘기했듯 현실과 따로 노는 국어 로마자 표기법은 하루빨리 고쳐야 한다. 더구나 그 뿌리가 일본어 로마자 표기법에 닿아 있는 불완전한 현행 국어 로마자 표기법은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차원에서라도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사람이 50년 동안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김 회장이 매달린 모의발음부호법은 속된 말로 ‘돈 되는 일’도 아니고, 지금까지 노력한 보람도 없이 새로운 로마자 표기법으로 정해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리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로마자 표기법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이 6·25 전쟁 때다. 당시 경복고 3학년에 재학중이었는데, 부산 피란 시절 한미합동헌병사령부에서 근무하게 됐다. 그 때 만났던 미국인 열이면 열 모두 내 이름은 물론이고, 그곳에 조사 받으러 온 한국인들 이름을 우리말 발음과 전혀 다르게 불렀다. 거기다 같은 미국인인 데도 사람마다 발음이 제각각이었다.
그 후 4년 동안 미국에 유학했고, 18년 동안 코트라 해외 무역관장으로 미국 캐나다 등지에 파견돼 일했다. 이때 국어 로마자 표기법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하게 됐다. 해외바이어들을 만나면서 제대로 된 로마자 표기법 없이는 능률적인 업무 수행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수출입과 관련해 해외바이어가 클레임을 걸어온 경우 많은 문제가 바로 로마자 표기법과 연관돼 있었다. 예를 들면 ‘거래하던 한국 회사가 물건을 받고 돈을 떼먹었으니 찾아 달라’고 하는데, 도무지 발음상 이름이나 회사명을 알 수 없는 식이다. 또 우편물을 보냈는데 한국에서 연락이 없다며 불평을 늘어놓는 바이어도 있었다. 한국 회사 주소의 로마식 표기를 잘못한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일이 자주 발생해 ‘도대체 한국인은 못 믿겠다’며 거래를 끊는 사례가 많았다. 국어 로마자 표기법과 관련해 발생하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현장에서 체험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뿐이다.”
김회장은 50년이 넘도록 로마자 표기법을 붙잡고 씨름하게 한 사적인 이유도 있다고 했다.
“내 나이 올해 일흔이다. 그 동안 일제식민 시대와 6·25 전쟁을 거쳤다. 그 와중에 친한 친구 여러 명과 형 두 명이 죽었다. 그때 결심했다. 뭔가 가치 있는 일을해 먼저 간 사람들이 못다한 삶을 내가 대신 살겠다고… 로마자 표기법이 바로 그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무모하리만큼 한우물을 파며 50년 인생을 바쳐온 김 회장의 뚝심은 바로 ‘죽은 자의 영혼에 닿아 있는 마음’에서 우러나오고 있는 셈이다.
로마자 표기법과 관련해 김회장은 지난해말 법정에 서는 일까지 겪었다. 국립국어연구원 김모씨가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김회장을 비방하는 글을 두 차례 올린 것이 고소사건으로 이어졌다.
“처음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모 장관이 귀띔해 주어서 뒤늦게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더니 어처구니없는 중상모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터넷에 올린 김회장 비방 글
김회장은 그 글을 보는 순간 심장마비를 일으킬 만큼 화가 났다고 했다. 서울지검에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김씨를 고소한 김회장은 당시 발췌한 글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나라 걱정’이라는 제목으로 99년 4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인터넷상에 올려진 글은 다음과 같다.
“(중략) 그가 무슨 경위로 약 50세쯤 되었을 때 국립인 충북대학의 무역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교수라고 하면 전문분야의 실무 능력이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대학원에서 학문을 수련한 사람이 되는 법인데, 그의 경우는 무척 특이하다. 아무튼 그는 해외에서 근무할 때부터 로마자 표기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중략) 나아가 자기 스스로 표기법을 만들기에 나섰으니 이른바 김복문식의 ‘모의발음부호법’이라는 표기법을 들고 나와 지금까지 약 20년간 선전을 하고 다니면서 동조자를 모으고 있다. 모의발음부호법이란 기괴한 이름은 아무리 반복해서 읽어봐도 그 명칭 자체가 이해가 안 되지만…(중략)
김씨는 토론하기 싫어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로마자 표기법에 관한 어떤 모임이 있었는데 약 세 시간에 걸친 모임에서 그는 자기 발표 시간이 되어서야 나타나 자기 발표만 하고 가버렸다. 다른 사람들 주장은 들어볼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중략) 이런 반(反)학문적인 천박한 주장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은 제 정신이 아닌 것이다. 그런 반쯤 정신 나간 사람의 주장을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마치 김씨의 대변인인 것처럼 국회에서 되풀이한다. (중략)
김씨는 언어의 기본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외국인이 국어 발음을 잘 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자기가 고안한 방식대로 표기해두면 외국인이 우리 국어 발음과 아주 비슷하게 발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대저 외국인은 자기 언어 외의 언어에 대해서는 발음을 틀리게 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중략) 외국인들이 한국어 발음을 단번에 간판의 표기 하나 보고서 하기를 바라는 것은 꿈에 불과하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임을 알아야 한다. (중략) 그런 우매한 생각을 45년째 버리지 않고 있는 김씨다. 김씨의 머리야 이제 그 누가 바꿀 수 있을까만, 김씨보다 젊고 훨씬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김씨의 생각에 혹해 앵무새처럼 그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미칠 지경이다. 이 나라가 언제 바로 될까.”
“그가 다시 찾아왔다. 자기의 로마자 표기법안만이 발음도 완벽하게 낼 수 있고, 컴퓨터로 철자 복원도 완벽하게 할 수 있음을 역설하고 돌아갔다. 나는 한마디도 안하고 듣고만 있었다. 물론 그의 주장이 옳아서가 아니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다. 아무 말 안하고 있는 게 낫지 무식한 그와 더불어 묻고 대답하고 토론하는 건 아무 소득이 없기 때문이다. (중략) 그는 자기 방법대로 하면 한글 철자가 (컴퓨터에서) 복원된다고 충북대학의 공과대학 교수팀이 말했다고 역설한다. 그 말은 한 마디로 허황의 극치여서 듣기가 민망했다.
로마자 표기의 쟁점은 모음도 모음이지만 어두(語頭)의 ‘ㄱ, ㄷ, ㅂ, ㅈ’을 어떻게 표기할 것이냐다. 우리에게는 ‘g, d, b, j’가 편하지만 서양인들은 한사코 ‘k, t, p, ch’를 쓰려고 해서 문제다.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인데 그는 태연히 자기 안에서 ‘g, d, b, j’를 쓰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의 선택이 옳지만, ‘k, t, p, ch’라야 한다는 서양인들의 엄청난 힘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에 대해 머리를 짜낼 일이지 엉뚱하게 모음을 가지고 일을 복잡하게 할 때가 아니다. 결국 그는 우리의 상황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면서 괜히 잘 모르는 국회의원들을 들쑤셔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아까운 황혼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 그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김회장은 “학자임을 자처하는 사람이 로마자 표기법과 관련해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공개된 인터넷상에서 원색적 언사를 써가며 비난을 퍼붓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노했다. 재판 결과 김 회장을 비방한 김씨는 ‘명예훼손’과 ‘모욕’ 두 가지 죄목으로 벌금형에 처해졌다.
사재만 6억~7억원 썼다
―오랫동안 관계 기관을 찾아다니고 탄원서를 내는 등 외로운 싸움을 해왔는데 후회해본 적은 없나.
“후회를 한 적은 없다. 다만 로마자 표기법을 둘러싸고 가장 애석했던 점이 코트라를 그만 두게 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사장이 돼 우리나라 무역계에 일조하고 싶다는 바람을 품고 있었다.
―코트라를 그만 두게 된 것과 로마자 표기법과는 무슨 연관이 있나. 코트라 시절 해외 무역관장 경험이 로마자 표기법 연구에 매달리게 한 직접적 원인이었다고 말하지 않았나.
“내게 있어 둘은 공교로운 인연을 가진 셈이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자면 코트라를 그만둔 건 엉뚱한 오해에서 비롯됐다. 79년 모의발음부호법을 들고 국회에 청원을 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백방으로 노력하다 안돼서 김영삼 전대통령에게 도와달라고 전화하고 찾아갔던 일이 있다. 당시 김영삼씨는 연금상태에 있었다. 하루는 전화를 걸었는데 비서가 받더니 신분을 밝히라고 했다. 별의심 없이 코트라 아무개 부장이라고 얘기했다.
그 일이 있은 직후 체신부에서 세 사람이 나왔다. 안방을 왔다갔다 하며 ‘전화에 이상이 있죠’하고 묻기에 ‘고장신고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냐’고 되물었다. 어물어물하던 체신부 사람들이 돌아간 며칠 후 회사에서 사표를 내라고 했다. 코트라 이사로 있던 친구 말이 내가 출판을 핑계로 부하직원에게 압력을 넣어 새마을금고에서 돈을 빌리게 했다는 것이었다. 그때 무역영어 책을 내는데 200만 원이 필요했으나 내가 가진 돈은 50만원 밖에 없었다. 부하직원 세 명이 그 사실을 알고 나중에 돈 벌면 갚으라고 하며 새마을금고에서 각각 50만원씩 대출해 빌려주었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압력을 넣었다니 기가 막혔다.
그 일로 다시 김 전대통령을 찾아가 “사장이 사표를 쓰라고 한다”고 말했더니, 김 전대통령은 “김부장이 여기 왔다간 게 아무래도 문제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아마 내 생각으론, 연금상태에 있던 김영삼씨를 자꾸 찾아간 게 무슨 정치적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받았던 것 같다. 어쨌든 사표를 못 내겠다고 버티며 상공부 장관과 코트라 사장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결국 자르지는 못하고 과장급인 전주 사무소장으로 발령을 내고 6개월인가 감봉 조치됐다. 그 후 신군부가 들어서고 80년 6월에 공무원 정화차원이라며 간부급 이상 전 직원에게 사표를 받아냈다. 선별적으로 사료가 수리됐는데 내 사표가 일착으로 수리됐다.”
―지금까지 로마자 표기법을 위해 사재 6억∼7억 원을 쏟아 부었다고 들었는데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썼나.
“정치인과 학계 사람들을 초청해 자비로 공청회를 여러번 열었다. 한 번 열 때마다 몇 백만 원의 경비가 소요됐다. 또 그동안 학자, 국회의원, 학회 등에 보낸 자료만도 엄청나다. 로마자 표기법 관련 책자를 만들어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한 번에 200~300권씩 뿌린 것만도 세 번쯤 된다. 거기다 공청회 자료 등 각종 비디오테이프와 디스켓을 수없이 만들어 뿌렸다. 아마 그동안 뿌린 자료를 모으면 대형 트럭으로 한 트럭 분은 될 거다.
또 모의발음부호방식의 효용성을 검증하기 위해 미국인을 상대로 무수한 조사도 벌였다. 이 사람들은 자료 검토를 부탁해도 공짜가 절대 없다. 하다 못해 식사라도 대접해야 한다. 엄청난 자료를 타이핑하기 위해 들어간 용역비도 적지 않다. 한문, 영어, 로마자 표기, 특수부호 등 온갖 용어가 뒤섞인 자료는 전문가가 아니면 타이핑하기 힘들어서 일일이 맡겼다. 세월이 세월인만큼 이래저래 하다 보니까 많은 돈이 들어갔다.”
―사재를 쏟아부으면서까지 로마자 표기법에 매달리는 김회장을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은 많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그 동안 눈총을 받거나 불만을 산 일은 없나.
“으레 그러려니 하고 이젠 포기한 상태다. 오히려 군자금까지 타서 쓰고 있다.”
―군자금이라니?
“일제시대 잔재를 털어 내고 새로운 방식의 로마자 표기법을 따르는 것은 독립운동과 마찬가지 아닌가. 세종대왕이 과학적으로 창조한 우수한 한글을 후대에 와서 엉뚱한 로마자 표기로 세계 사람들에게 잘못 알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점을 들이대며 농 반 진 반으로 식구들한테 ‘독립운동 하는 데 일조하는 셈 치라’고 말한다. 과거 선조들이 독립운동을 할 때는 독립자금을 두루 후원 받았는데 나는 독립자금 대주는 사람도 없으니 당신이 대신 후원금을 대라고 아내한테 얘기하면 이젠 그냥 웃어넘긴다.”
“국민혈세의 낭비다”
―그 동안 아내에게 탄 군자금이 얼마나 되나.
“대부분 필요한 경비는 내가 벌어 쓰고, 내 뜻에 공감하는 주위 사람들이 좋은 일 한다며 십시일반 조금씩 보태주는 경우도 있다. 또 얼마 전까지 일본 오사카 경법대학에 객원교수로 적을 올리고 있었는데 거기서 나오는 돈이 매월 얼마씩 됐다. 로마자 표기 연구를 꼭 완성하라며 꼬박꼬박 월급으로 보태줬는데 사정이 생겨서 지금 그 돈은 끊어졌다.
다행인 것은 일본에서 끊기자 영어과외가 풀렸다는 점이다. 아이들을 가르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고 있다. 이래저래 가족들에게 큰 부담을 주진 않았는데 지난 번 아내가 탄 적금 500만 원은 고스란히 받아 챙겼다. 실은 그게 좀 미안하다.”
―지금까지 논란이 일고 있지만 그래도 이미 새로운 표기법이 시행됐는데, 이제 그만큼 했으면 손 뗄 때도 되지 않았나.
“무슨 소린가. 이제부터 시작이다. 조만간 그동안 써오던 안내표지판이며 각종 정부 자료, 관광 홍보물 등을 전부 새로운 표기법으로 바꿔야 하는데 돈 들어갈 일이 남았다. 이를 위해 엄청난 국민 혈세를 쏟아 부어야 할 판인데 어떻게 보고만 있겠나. 더군다나 현행 안이 문제가 많은 마당에 두 번 세 번 같은 실수로 막대한 세금을 낭비할게 할 순 없는 일이다.”
헌법재판소를 통해 ‘잘못된 장관의 고시는 헌법소원의 직접 대상이 된다’는 점을 파악했다는 김회장. 로마자 표기법과 관련한 서류더미들로 집안이 발 디딜 틈 없이 어질러진 가운데 벽 곳곳에 붙어 있는 손때 묻은 쪽지들이 눈길을 끌었다.
‘승패(勝敗)는 병가상사(兵家常事), 일희일비(一喜一悲)는 대금물(大禁物), 승자(勝者)는 최후(最後)에 웃는다.’
‘사생관(死生觀), 삶과 죽음이 똑같다. 밤 오고 낮 오든. 죽음이라는 것은 뜬구름이 없어짐. 여러 자연의 상태는 뜬구름.’
‘인지위덕(忍之爲德), 참는 것이 덕(德)이다.’
그간 50 평생을 살아오면서 체득한 인생관의 일단을 보는 듯한 문구들이었따.
다음 페이지에는 로마자 표기법과 관련해 김회장이 여러 인사들에게 자문을 구하며 주고받은 서신들을 소개한다. 특히 한국어의 M-R식 로마자 표기법 창안자 라이샤워 교수, 주한 영국대사 해리스, 주한미군 총사령관 틸럴리 등은 김교수의 표기에 대해 관심을 토로하고 있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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