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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마 정당’ 자민련의 끝없는 추락

  • 이중근·경향신문 정치부 기자

‘묻지마 정당’ 자민련의 끝없는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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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원들의 분열도 문제지만 자민련이 공당다운 모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게 된 기본원인은 정책과 역할의 부재, 그리고 무엇보다 민의와 동떨어진 행태다. 모호한 행보로 당관계자들마저 헛갈리게 하는 JP의 행보 역시 당의 불안과 민심이반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8월9일 오후 2시30분, 서울 마포구 신수동에 있는 자민련 당사 2층 기자실에 김학원 대변인이 급히 들어섰다. 국회에 있다가 황급히 들어온 김대변인은 격앙돼 있었다. 기자실 옆 대변인실로 들어간 그에게 김종호 총재 직무대행이 전화를 걸어와 무엇인가를 지시했다. 잠시 뒤 그는 대변인실에서 나와 보도자료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부 언론에서 우리 당이 마치 총체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어서 당이 언제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고의적인 허무맹랑한 이른바 위기론을 거론하고 있음은 심히 개탄할 일이다. 이러한 자민련을 죽이기 위한 의도적 음모의 이유와 진원지, 그리고 정체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 모르나 계속될 경우 당 차원의 특단의 조치를 취할 것이다…(중략)…근거없는 루머를 퍼뜨리는 것은 우리당에 대한 흑색, 악의를 품은 음모의 계략이 아닐 수 없다. 큰 정당에는 큰 소리 한마디 못하면서 작은 정당이라고 아무렇게나 말하고 짓밟는 일부 언론에 대해 한편 연민의 정을 느끼며 바른 길로 되돌아오길 진정으로 충고한다…”

격앙된 그의 심중을 반영하듯 김대변인의 성명은 보기 드물게 강경했다. 그만큼 자민련은 이날 일부 신문에 실린 ‘9월 위기설 자민련 동요’라는 제하의 기사에 흥분했다. 더구나 이날은 모처럼 김종필 명예총재가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간담회에 출석하는 등 정치 행보 재개의 의욕을 보인 날이어서 더더욱 격앙했다.

이튿날 오전 9시부터 김대행 주재로 7층 총재실에서 열린 주요 당직자 회의에서도 이 위기설이 논란이 됐다. 회의 초반에는 “당의 체제를 제대로 정비해 활성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쪽으로 논의가 진행됐다. 그러나 도중에 다시 이 기사가 문제가 되면서 논의는 엉뚱하게 흘러갔다. 한 참석자는 “해당 기자의 출입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흥분했다. 김대변인은 회의 후 “이번 기사는 최근 한나라당 내부 보고서에 있는 ‘자민련 8월 해체설’등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고 말하며 배후·음모설을 제기했다.

기자실에 나붙은 기자출입금지 대자보



그리고 11시30분쯤 당사 입구와 기자실 앞문에 ‘○○일보 기자 출입금지’ 대자보가 나붙었다. ‘허위사실 날조보도로 자민련을 매도한 ○○일보를 규탄한다’는 내용으로 밑에는 ‘자민련 중앙당 사무처 당직자 일동’이라고 적혀 있었다. 대변인실 당직자가 다른 출입기자들의 눈을 의식해 서둘러 떼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또 한번 “자민련은 역시 비판조차 수용 못하는 정당”이라는 말이 나왔다.

최근 자민련 주변에서 돌고 있는 위기설은 물론 딱부러진 근거나 내용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다. 3부 이자의 사채로 지급해온 사무처 당직자들의 8월 월급이 지급되지 못할 것 같고, 의원들이 원내 교섭단체 구성 문제가 불투명해지면서 당에서 마음이 떠나고 있다는 게 위기설의 전부다. 이런 상황이 심화되면 그동안 참아왔던 의원들이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으로 흩어져갈 것이라는 정도의 추정이었다.

기사의 근거로 지목된 한나라당 내부 보고서 내용도 ‘상황이 이러하니 자민련 의원들에게 접근해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둘 필요가 있다’는 게 요지다.

그러나 비록 ‘9월 위기설’ 또는 ‘해체설’의 직접적 근거나 징후는 없다 해도 자민련이 지금 처한 현실이 위기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자민련 관계자들이 부인하고 있는 것은 ‘당이 공중분해될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시나리오일 뿐 자민련의 현실을 개탄하는 목소리는 당내 여기저기서 쉽게 들어볼 수 있다.

“사실 지구당 활동을 하면서 당직을 맡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떳떳이 말하지 못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에서 한 발 떨어져서 보니 정말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우리 딴에는 한다고 했는데 국민들은 완전히 코미디로 보고 있더라. 그것을 자민련 의원들도 알고 있지만 개선이 안 된다. 개인적으로 진로를 어떻게 정해야 할 지 모르겠다.”

지난 7일 자민련 당사에서 만난 한 지구당 위원장-그것도 자민련의 본거지인 충청지역의-이 기자에게 털어놓은 솔직한 얘기다. 스스로도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치욕적”이라면서도 “고향에서조차 이런 대접을 받는 자민련의 현실을 부인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입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또 다른 당직자의 말.

“도대체 요새는 모임에 나가는 게 귀찮고 신경질이 난다. 가기만 하면 무엇하러 자민련에 입당했느냐는 질문을 시작으로 자민련의 행태를 꼬집는 질문이 이어진다. 한마디로 비전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어떤 친구는 심지어 민주당과 합당을 기대하고 입당했느냐고까지 물어온다. 우리 당을 독립된 정치조직으로 인정해 주지 않으니 정말 답답하다.”

자민련이 맞고 있는 상황은 95년 3월 창당 이후 최대 위기다. 매일같이 언론의 질타는 쏟아지고, 원내교섭 단체 구성 문제는 하루가 다르게 희비의 쌍곡선을 그리고 있다. 당의 운명마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당원 스스로 인정한다. 사무처 직원의 60%를 잘라내고도 월급을 반으로 줄였다. 그나마 지난 7월 월급은 창당 이래 처음으로 지급이 밀렸다. 인터넷 홈페이지 운용비도 없어 8월16일부터 재가동했다. 이러니 만나는 사무처 직원들마다 “당에 남아 있어야 할지 다른 직장을 찾아봐야 할 지 좀 조언해달라”고 말하곤 한다.

안 열리는 당무회의, 불분명한 당직자들

당 운영 체계가 엉망일 것은 불문가지다. 자민련은 총선 후 지금까지 당무회의를 한 번도 열어본 적이 없다. 당무회의를 열었다가 무슨 비판이 쏟아져 어떤 사단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단 한 차례도 개최하지 않았다. 한 관계자는 “사실을 말하면 당무위원이 누군지도 정확하지 않다”며 “당무회의 없이 각종 결정을 집행하는 것은 엄연한 당헌·당규 위반”이라고 토로했다.

총선에서 낙선한 뒤 미국으로 유학간 박철언 부총재의 경우 당직사퇴를 선언했지만, 그가 부총재인지 여부도 불분명하다. 한마디로 당직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불과 반 년 전까지 55석의 의석에 총리까지 차지하면서 국민회의(현 민주당)와 현 정권을 탄생시켜 공동운영하던 때의 위용은 간 데가 없다.

그러나 당 관계자들을 더욱 답답하게 하고 있는 것은 자민련의 미래와 지도부, 특히 김종필 명예총재의 행보다. 의원들도 단결해 당을 활성화하는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 채 제각각이다. 가뜩이나 당이 어려운 상황인데 일부 의원들은 알력까지 보이고 있다.

지난 8월3일 자민련 의원총회(자민련에서는 17명의 회의를 의총이라고 하는 게 어색하다며 의원회의로 부른다)에서 나왔던, 소속의원들의 볼썽 사나운 입각 운동을 개탄하는 목소리를 들어보면 자민련의 현주소를 짐작할 수 있다.

이날 회의에서는 국회 원내 교섭단체 구성에 사활을 걸고 있는 당은 무시하고 소속의원들이 장관 자리를 얻으려고 사방으로 뛰어 ‘염불보다는 젯밥’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자성론이 나왔다. 자성론은, 평소 이 점을 강력 비판하던, 44세의 재선이면서 혈기방장한 이재선 수석부총무가 먼저 제기했다.

그는 “지금 당의 처지를 생각하면 우리 당 현역의원들은 아예 장관을 할 생각을 말아야 한다. 국무총리다, 장관이다 해서 다 나가면 당은 누가 지키느냐”면서 “소속의원 17명 전원이 장관 자리를 줘도 가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자”고 제의했다. 수석 부총무로 원내 교섭단체 구성을 위해 국회법 개정안 날치기 때 육탄 돌격도 마다지 않은 그로선 회의장에 얼굴조차 비치지 않은 의원들이 마냥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는 “우리 당 일을 누구에게 맡기느냐. 우리 스스로 의욕을 보여야 한다”면서 이전에도 공공연히 입각 운동을 벌이는 의원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했었다. 이어 오장섭 원내총무도 “당을 살리기 위해선 원외 인사라면 몰라도 현역의원은 절대 입각하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입각 희망자로 거론된 김학원 이양희 이완구 정우택 의원 등 이른바 당내 ‘재선 4인방’은 묵묵부답이었다. 재선 4인방은 장관직에 대한 미련을 숨기지 않았고, 경쟁상대를 깎아내리기 위한 비방전도 계속했다.

의총이 끝난 뒤 한 의원은 “자기 이름이 하마평에 오르지 않으니까 아예 재뿌리려는 것”이라고 평했고, 다른 의원은 “교섭단체는 물건너갔는데…”라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또 김명예총재에게 골프채를 사다준 것으로 거론된 모의원은 의총 전 “드라이버 한 개를 사다준 것이 마치 한 세트를 사다줘 로비한 듯 비쳐 불쾌하다. 그런 소문을 낸 사람을 알고 있는데 내가 반드시 손보겠다”고 말하는 등 자중지란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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