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은 집단적인 시위나 농성, 더구나 병원 문을 닫고 거리로 나서본 예가 없던 조직이다. 한마디로 투쟁에 관한 한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단계라고 평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난 6월 1차 폐업에 이어 2차 폐업을 진행 중인 의사들에게서도 이제는 제법 ‘투사’ 냄새가 난다. 의사들 스스로는 7만 의사를 투사로 만든 원동력은 의사의 고유권한인 진료권을 빼앗으려는 약사법과 잘못된 의약분업안이라며 “6월 이전의 의사와 지금의 의사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의료계 집단폐업은 대한의사협회의 깃발 아래 이루어지고 있지만 투쟁경험이 없는 의사들을 일사불란한 조직으로 만들고 집단폐업으로 이끌고 있는 조직은 단연 의권쟁취 투쟁위원회(의쟁투)다. 의쟁투는 대한의사협회 산하 특별기구지만 의약분업 문제에 관한 한 오히려 의협의 권능을 앞지른다.
의쟁투는 지난해 12월, 의약분업을 앞두고 의(醫) 약(藥) 정(政)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대정부 투쟁을 위해 만들어진 한시적인 기구였다. 애초에는 김재정(金在正) 당시 서울시 의사협회장이 ‘의권수호 투쟁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자기 심복을 중심인물로 삼고 ▲완전 의약분업 실현 ▲진료수가 적정화를 위한 활동을 하는 기구로 구성했다. 정부가 지난해 11월15일을 기해 ‘약값 실거래 상환제’를 전격 실시하면서 약값의 거품이 빠졌고 개원의들의 병원경영이 압박을 받게 되자 대정부 투쟁기구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던 것.
투쟁의 전위대 의쟁투
결국 서울의사회에 설치된 의쟁투는 의약분업에 반대하는 젊은 개원의사들을 중심으로 의협 산하의 특별기구로 자리매김 했다. 김재정 현 의협 회장이 당시 전국시도의사회 회장들의 추천을 받아 초대 의쟁투 위원장으로 추대됐었다. 김 위원장은 의료계의 격앙된 분위기를 투쟁열기로 끌어올리며 지난 2월17일 휴진에 돌입한 의사들의 여의도 집회와 4월 4∼6일의 집단휴진을 이끌어냈다.
4월 휴진강행에 앞서 3월29일 대통령 면담을 통해 휴진철회를 약속했다가 번복하는 과정에 김 위원장은 당시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퇴서를 냈었다. 그러나 재신임을 받고, 그의 주도 아래 제2기 의쟁투가 탄생했다. 이후 지난 4월22일 열린 의사협회 정기총회에서 김 위원장은 회장선거에 당선되면서 의쟁투 위원장에서 물러났다. 지난 6월6일 결성된 현 3기 의쟁투를 이끌고 있는 신상진(申相珍·44) 위원장은 당시 의협 회장선거에 나왔다가 낙선한 인물로 의사협회 집행부의 도움으로 위원장이 됐다.
1, 2기에 비해 훨씬 강경노선을 내세운 3기 집행부는 용산고와 서울의대를 나온 신 위원장과 한양의대 출신 사승언(史承彦·43·수배중) 총무를 주축으로 한 33명의 중앙위원으로 5월에 구성됐다. 상근자 5명과 중앙위원들은 대체로 대학 시절 운동권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다.
의료계의 집단폐업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한 인사는 “의쟁투 위원장을 맡고 있던 상태에서 의협회장 자리에 오른 김재정씨는 의협회장이 된 직후 의쟁투를 해산해 권력의 이원화를 막으려 했지만 민주의사회 소속 젊은 의사들의 반대 때문에 좌절됐다”며 “이때 이미 의료계의 분열은 예고된 것”이라고 말했다.
1차 폐업 철회 직후 시작된 검찰의 의쟁투 간부에 대한 집중소환 탓에 지도부가 와해된 상태다. 신상진 위원장은 도피중이고 최덕종 의쟁투위원장 직무대리, 사승언 전 대변인, 배창환, 박현승, 김미향, 이철민씨 등이 수배되거나 구속되는 등 지도부가 공백 상태다. 경찰에 체포됐다가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나온 주수호 대변인만이 공개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의료계의 폐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의쟁투에 대해 ▲의약분업에 무조건 반대하는 의료계내 운동권 ▲폐업 또는 투쟁을 일삼는 집단 ▲의협을 접수하려는 불순 세력이란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의쟁투를 둘러싼 상반된 평가
현 집행부가 지난해 5월 의약분업에 합의한 유성희 전 의협회장을 몰아낸 쿠데타 세력이라는 것은 의쟁투의 강경노선을 잘 설명해준다. 쿠데타 성공의 원군(援軍)이 모두 의약분업에 반대하는 강경론자들이기 때문에 지도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세를 따를 수 밖에 없는 노릇이라는 것.
대한전공의 협의회에 속한 한 관계자도 “의쟁투가 그간의 투쟁을 이끌어온 것을 전면 부정하지는 않지만 1차 폐업을 철회로 이끄는 과정 등을 통해 리더십에 문제점을 노출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지도부란 모름지기 중요한 결정을 내릴 부분에 대해서는 의견을 밝히고 회원들의 동참을 호소할 줄 알아야 하고, 민의를 물을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한데 자신감이 부족한 의쟁투 지도부는 시도 때도 없이 투표만 하다가 대의를 그르쳤다”고 지적했다.
특히 파업을 철회하면서 지도부가 모두 줄행랑을 쳐서 조직의 역량을 스스로 약화시킨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것. 신상진 위원장에 대해서도 “대중적인 분위기를 파악해 적절한 시기에 그들의 입맛에 맞는 성명이나 한번씩 터뜨릴 줄 아는 대중 선동주의자”라고 폄했다.
하지만 의쟁투 주수호(朱秀虎·42) 대변인은 “의쟁투는 중요한 결정은 중앙위원회 총회를 거쳐야 하고 회원의 투표를 통해 결정한다는 규정이 있고 투표결과는 의쟁투 중앙위에서도 거부할 수 없다”며 “이런 규정 때문에 일반 회원의 민의를 반영하지 않으면 의쟁투의 존재가치가 사라진다”고 말했다.
주씨는 이어 “정부나 언론에서는 의쟁투가 집단폐업을 독려했다고 주장하지만 8월1일 2차 폐업에 돌입한 뒤 8월10일 의쟁투 중앙위원회가 열릴 때까지 의쟁투 집행부 명의로 지시나 지침이 내려진 적이 단 한차례도 없이 자율적인 폐업이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수구적인 성향을 보여온 의협과 차별성을 갖고 의료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독자조직이 아니라 의약분업 때문에 급조된 조직이라는 한계 때문에 의쟁투는 크고 작은 불협화음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3기 위쟁투 의원장으로 화려하게 등장해 2차에 걸친 폐업을 이끌고 있는 신상진 위원장은 의쟁투에 대한 신뢰와는 별도로 의료계 내 다수의 신임을 얻고 있다.
하지만 의료계의 한 관계자는 “신 위원장의 평가는 그의 이미지에 의한 것”이라며 “성명서를 낼 때도 단문으로 짤막하게 내고 협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등의 태도가 카리스마를 오히려 높인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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