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 임선생께서는 우리나라에서 ‘세계화’라는 말이 나오기 훨씬 전인 90년대 초 미국 미시간주립대학 국제대학장으로 계실 때 이미 세계화 바람을 일으키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세계화의 의미는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임길진 91년에 미시간대에서 세계화 프로그램을 내걸고 여러 나라 사람들과 교육과 연구, 문화 부문의 교류를 본격화했습니다. 한국에서도 뜻을 같이 하는 분들과 다양한 국제 문화교류 행사를 벌였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세계화(globalization) 얘기가 나오기 전에는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라는 말을 많이들 썼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시간대에 가자마자 의도적으로 ‘인터내셔널‘이라는 말을 ‘글러벌‘로 바꿨습니다. 미시간대는 그 10여년 전부터 ‘인터내셔널 페스티벌‘행사를 가져왔어요.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과 대학 주변의 주민 수천 명이 자기 네 나라의 고유한 민속과 음식을 소개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전시회도 여는데, 그 이름을 ‘글로벌 페스티벌‘로 바꾼 겁니다.
국제화라는 것은 달랑 두 나라만 서로 교류해도 붙일 수 있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국제화는 까딱 잘못하면 편파적인 의미로 변할 수 있습니다. 가령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몇 나라가 모여 끼리끼리 국제화 그룹 같은 것을 만들면 국제적인 지역주의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이윤기 그렇겠군요. 영국에선 웨일스 지방팀과 스코틀랜드 지방팀이 축구경기를 해도 ‘인터내셔널 풋볼 게임’이라고 부른다니 그럴 수가 있겠네요.
국제화와 세계화
임길진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즐겁게 살면서 하나가 될 때 진정한 의미의 인류평화와 정의가 구현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세계화라는 말이 국제화라는 말보다 훨씬 더 좋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시간대의 문화행사를 국제 페스티벌에서 세계 페스티벌로 바꿨고, 교수와 학생들이 학문적 능력을 세계화하도록 고무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교수가 외국에 가서 논문을 발표한다거나 또 누군가가 외국 학교와 자매결연을 통해 세계적인 능력을 함양하겠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해외여행을 지원해줬습니다. 학생들도 외국에서 논문을 발표할 수 있는 초청장을 받은 경우 무조건 지원했습니다. 그때 저희가 강조했던 게 ‘세계적인 역량(Global Competence)’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국제 감각’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이것만 가지고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어요. ‘국제’에서 ‘세계’로, ‘감각’에서 ‘역량’으로 한 단계씩 뛰어올라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윤기 문인께서 하고 계신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선생님은 창조적인 작가인 동시에 번역문학가로서도 대단한 역량을 발휘하셨기 때문입니다. 모국어로만 창작활동을 하시는 분은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도 그런 문화적 역량이 한 나라에만 구속되고 말 수 있습니다. 물론 모국어로만 글을 쓰더라도 많은 책을 읽고 여행도 하고 세계의 석학, 문인들과 교류할 수 있겠지만, 번역문학에 몸 담은 분들은 외국의 문화와 언어까지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되기 때문에 이선생님처럼 창작과 번역이라는 두 개의 기둥을 함께 갖추고 있다는 것은 빼어난 강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윤기 과찬이십니다. 저는 번역을 오랫동안 해왔습니다만 번역은 수입(輸入)입니다. 제가 뒤늦게 다시 창작활동의 불을 당기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제가 주로 해온 일로 ‘무역적자’가 많이 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늘 제 작품을 쓰겠다고 마음먹어 왔는데, 문학이라는 것이 어머니로부터 배운 언어로 하는 것이지, 다른 나라 말을 새로 배워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머니의 언어로가 아니면 진정성을 담기 어렵겠다고 느꼈습니다. 여기에서 출발한 제 문학이 세계화되고, 나아가 제 모국어의 정서가 그쪽으로도 옮겨지면 그보다 다행한 일이 없겠죠.
우리가 세계화를 하겠다면 거창한 목표부터 설정할 게 아니라 우리의 삶부터 세계화돼야 한다고 봅니다. 가령 외국을 여행하면서도 김치며 된장, 간장과 고추장 단지까지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요. 얼마 전 미국에서 친구와 함께 차를 몰고 1만2000마일쯤 돌아다녔는데, 이렇게 넓은 땅에서는 판소리 ‘심청가’에 나오는 ‘새복질(새벽길)친다’는 말처럼 새벽 무렵에 일찌감치 출발해야 마음먹은 거리만큼 갈 수 있어요. 그런데 함께 여행하던 친구가 아침에 꼭 김치찌개나 북어국을 차려놓고 먹어야지 밥을 먹은 것 같다는 겁니다. 미국의 모텔에서는 아침식사 하라고 도너츠와 커피를 주니까 아침 6시쯤 그걸 받아들고 나서서 자동차를 몰고 가며 먹으면 모텔방에 쭈그리고 앉아 북어국 끓여 먹는 시간에 300∼400리는 너끈히 갈 수 있거든요. 그 친구 때문에 일정대로 여행을 제대로 못하고 지체된 적이 많았어요. 언젠가 시인 고은 선생에게 비슷한 연배의 지인이 미국에 가서도 소주를 찾아내 마시고 왔다고 자랑을 하더래요. 그래서 고은 선생이 “야, 이 자식아. 미국에 갔으면 미국 술을 먹고 와야지, 미국까지 가서 소주 먹고 온 게 무슨 자랑이냐”고 쏘아붙였답니다.
제가 미시간대학에 있을 때 자그마치 107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임선생께서 어떤 학회에선가 “북한이여, 우리에게 108개국째 학생을 보내주오”하고 촉구하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때 국제대학에 와 있던 외국 객원교수들만 해도 얼마나 많고 다양했습니까. 그러니 이들과 어울리시다 보면 임선생도 벼라별 음식을 다 잡숴보셨겠죠. 그중에는 입맛에 도무지 맞지 않는 흉측한 음식도 많았을텐데, 국제대학장 자리에 계시니 그런 저녁식사를 두세 차례씩 하면서도 얼굴을 찌푸릴 수가 없으셨을 겁니다.
변형·변성·변역
임길진 음식을 먹는 것은 갖가지 문화현상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요.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으니까요. 다른 나라 음식을 함께 즐기다 보면 서로 다른 민족성을 이해하고 나아가 다양한 채널의 교류와 외교의 물꼬가 트일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는 함께 밥을 먹는 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거든요.
외국에 나가 살면서도 “김치를 매일 먹지 않으면 속이 느글거린다”며 이런 것을 무슨 애국인 양 착각하는 소아병적인 태도는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세계 무대에서 우리 민족을 위해서도 좋은 일을 하고 인류에도 공헌하려면 무엇보다 어느 나라에 떨어뜨려 놓아도 그 나라 사람들의 음식을 먹성좋게 먹으면서 속 편하게 살 수 있는 위장부터 길러야 될 겁니다.
우리의 고유한 음식이나 음악, 미술 같은 문화유산을 잘 보존하고 새롭게 발전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김치의 종주국인 한국에서 새로운 김치를 개발한다든가, 김치 박물관을 만든다든가, 김치에 대한 대백과사전을 펴내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죠. 하지만 바깥에 나가 살면서 매일 김치를 못 먹으면 속이 어떻다고 하는 것은 이것과는 따로 떼놓고 봐야 될 문제입니다. 저는 그렇게 하소연하는 유학생들에게 “이런 한심한 사람아, 자네는 애국자가 아니라 우물 안 올챙이일세”라며 혀를 찹니다. 우물 안 개구리라면 뛰어볼 준비라도 돼 있다는 얘긴데, 올챙이는 아직 채 자라지도 않았다는 뜻이에요.
언젠가 이문인께서 음식을 먹는 3가지 단계를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 비유하신 적이 있습니다. 음식을 날로 먹는 것, 구워 먹는 것, 익혀 먹는 것을 문화의 변형과 관련지으셨던가요?
이윤기 음식뿐 아니라 남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첫 번째 단계가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인데, 이건 글자 그대로 폼만 변하는(變形) 것이죠. 여기에다 기초적인 물리적 변화를 가하면, 가령 포도를 으깨 포도즙을 만들면 트랜스포메이션이 되고, 그것을 발효시켜 술을 만들면 트랜스뮤테이션(transmutation)이 돼서 한 단계 더 높은 변화(變性)가 생깁니다. 그보다 더 높은 단계가 트랜서브스탠시에이션(transubstantiation)인데, 여기에선 초월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컨대 포도주를 마시고 싸움질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을 변역(變易)이라고 부릅니다.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문화는 어느 한 동아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자기네 나름대로 만들어낸 실존적 습관인데, 이 실존적 습관은 어떤 천재라도 하루 아침에 뒤집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김치와 된장이 훌륭한 우리 문화인 것은 틀림없는데, 한국인들은 세계화를 부르짖으면서 다른 나라에도 김치와 된장에 상응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너무도 인색합니다. 그래서 외국에 나가서도 고추장 단지를 끼고 도는 것 같아요.
저는 솔직한 얘기로 다른 나라에 가면 음식에 관한 한 행복합니다. 미국에 가도, 그리스에 가도, 터키에 가도 그래요. 그리스의 수블락이나 터키의 케밥 같은 양고기 요리는 이 나라들이 생기면서부터 발전해온 음식 아닙니까. 대단한 전통과 지혜가 깃들인 문화유산이죠. 햄버거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땅덩어리가 하도 커서 7첩 놋 반상기 차려진 행자반 앞에 놓고 밥 먹다간 옮겨다닐 시간이 없다보니 생겨난 음식이죠.
이걸 먹으면 우월하고 저걸 먹으면 열등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저는 오히려 우리나라에 오면 음식 때문에 얻는 행복감이 좀 덜합니다. 우리 음식은 정량화가 잘 안 돼 있어서 표준이 되는 조리법(recipe)을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가령 곰탕을 끓인다면 몇g의 뼈를 몇시간 동안 고아야 기본적인 곰탕이 만들어진다는 원칙이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뿌연 색을 내기 위해 육수에 커피 프림까지 집어넣는다면서요? 그런데 LA나 뉴욕에 오면 진짜 곰탕을 먹을 수 있어요. 이곳에선 정량화가 돼 있는데다 질좋고 값싼 재료를 구할 수 있어 양을 속일 까닭도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임길진 트랜스포메이션, 트랜스뮤테이션, 트랜서브스탠시에이션은 특히 외국의 지식이나 학문을 받아들일 때도 적용됩니다. 우리나라에선 외국의 것을 많이 받아들이긴 하는데, 그걸 갖다가 날로 먹는 경우가 많다는 게 문제라고 봅니다. 아주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고 만다는 얘기죠. 이것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외국 문물이 우리의 힘으로 변할 수 있어요. 특히 미국과 일본에서 들여온 물질문명과 지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행태는 걱정스럽기까지 합니다. 일각에서 일본문화 개방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우리 문화가 트랜서브스탠시에이션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다간 바탕이 흔들리게 되죠. 따라서 교육이나 문화사업, 공공정책은 우리의 문화적 변성, 변역능력을 강화시키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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