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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된장 타령은 그만! 햄버거 먹고 영어로 말하세요”

지상중계-세계화된 두 한국인의 종횡무진 열혈대담

  • 대담·임길진(KDI 국제정책대학원장) 이윤기 (작가 ·번역문학가) / 정리·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김치 된장 타령은 그만! 햄버거 먹고 영어로 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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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 어느 여성 번역가가 저더러 “어떻게 하면 번역을 잘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어온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분을 만나기 전에 그분이 번역한 작품을 읽어보고는 절망했어요. 그야 말로 ‘날로 먹는’ 번역이었습니다. ‘boy’란 단어가 나와서 사전을 찾아보면 맨 앞에 ‘소년’이라고 나와 있으니 언제나 ‘소년’이라고만 옮겨놨어요. ‘society’는 무조건 ‘사회’이고, ‘school’은 ‘학교’밖에 안 되는 거예요.

제가 그분에게 “옷을 어디서 사 입느냐”고 물었어요. “롯데백화점에서 살 때도 있고, 남대문시장에서 살 때도 있고, 동대문시장에서 살 때도 있다”기에 왜 그렇게 사느냐고 하니까 “컬러가 내 컬러가 아니면 어색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말도 그와 마찬가지라고 일러줬습니다. 당신이 빨간색 옷을 좋아한다고 누군가가 무작정 빨간색 스웨터를 사다주면 다 입을 수가 있느냐, 빨강이라도 당신이 좋아하는 빨강이 아니면 못 입는 것 아니냐는 얘기였습니다. 언어라고 해서 ‘레드’는 ‘빨강’, ‘블루’는 ‘파랑’만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이런 날탕 번역의 부작용이 우리 국어 생활에 스며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말엔 ‘분위기가 호젓한 술집’이란 말이 있지, ‘호젓한 분위기의 술집’이란 말은 없어요. 이것은 일본말을 날탕으로 풀어놨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에선 ‘나의 동생의 부인의 사촌’ 같은 표현을 못 쓰지만 일본어에선 ‘노(の)’를 얼마든지 붙여서 말을 이어갈 수 있거든요.

임길진 언어는 문화를 이끌어가기도 하고 따라가기도 합니다. 영어는 직선적이고 논리적인 언어라고 하지 않습니까. 문법을 봐도 그렇고,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쓴 글을 보면 서론 본론 결론이 논리적으로 질서있게 전개됩니다.

그런데 중동지역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쓴 글은 논리가 갈짓자로 왔다 갔다 합니다. 제가 가르친 이집트 학생의 논문을 보면 서론에서 자기 얘기를 하다가, 2장에서는 할아버지 얘기를 하고, 3장에 가면 아저씨 얘기를 하다가 4장에서는 느닷없이 어머니 얘기를 합니다. 만약 미국 학생이 같은 주제로 논문을 쓴다면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나→동생 하는 식으로 가겠죠. 그래서 미국 교수들이 이 학생의 논문을 읽으면 혼란스러워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논문을 통과시켜주지 않아요. 그러면 이 학생은 “내 글 속에는 내 나름의 논리가 있다”고 반박합니다.



한편 동양인이 쓴 글은 결론을 유보하는 경우가 많아요. 일종의 나선형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한참 동안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다가 끝에 가서야 결론을 내립니다. 정치적 협상에서도 처음부터 논리적인 단계를 밟아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이 얘기 저 얘기로 대립하다가 막판에 가서 ‘극적 타결’에 이르곤 하죠.

이에 비해 스페인이나 프랑스 같은 로망스어 계통의 말은, 속으로는 논리가 깔려있지만 거기에다 재미있는 얘기를 곁들여 옆길로 샜다 돌아왔다 하면서 갈짓자형과 직선형을 합친 형태로 전개됩니다. 프랑스 영화를 보면 좀 걷잡기 어려운 면이 있잖습니까. 이게 무슨 소린가 싶다가 나중에 보면 결론이 드러나기도 하거든요.

이렇듯 영어권의 직선형, 중동지역의 갈짓자형, 동양의 나선형, 로망스 언어권의 갈짓자형+직선형 문화패턴 중에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까 음식 얘기에서도 나왔지만, 우리 모두가 진정한 의미에서 지구촌의 한 백성이 되려면 내 것만 옳다는 태도를 버려야 됩니다.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되 일치점을 함께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만의 독특함을 지켜나가는 동시에 세계인이 공유할 수 있는 가치를 추구하자는 것이죠. 가령 모든 종교에서 귀중한 덕목으로 여기는 사랑과 자비, 어떤 교육이념에서든 지상의 목표로 삼는 지식의 함양과 진리의 추구, 어느 나라의 헌법에나 기본권으로 보장하는 정의와 평등 같은 것들이 그런 가치 아닐까요.

우리의 지역감정이라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영남과 호남이 공유하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같은 조상에게서 났고, 생긴 것도 똑같은 사람들이 음식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고 노랫가락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어요. 왜 더 큰 공유점을 깨닫지 못합니까. 변형과 변성, 변역의 지혜는 여기에서도 필요합니다.

‘틀림’에서 ‘다름’으로

이윤기 술집에 가보면 접대부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욕지거리까지 해요. 이렇게 생각해볼 순 없을까요. ‘저 아가씨는 아마도 집에서 무지무지 귀한 딸일 거야, 아가씨의 어머니는 딸 생각만 하면 눈물을 글썽일거야, 어쩌면 저 아가씨는 누군가에게 너무나 사랑스런 연인일 거야…’ 하고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누구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죠.

외국의 어떤 마을에 한국 관광객들을 내려놓으면 “야, 여기는 볼 게 없으니 가자”고들 합니다. 하지만 그 마을이 어느 누구엔가는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핑 도는 고향일 테지요. 그렇게 생각하자는 겁니다. 내가 우연하게 밟은 낯선 땅이 그 누구인가의 소중한 고향이라고. 내 고향만 너무 사랑하고, 내 고향만 너무 자랑하지 말자고. 우리는 ‘틀리다’와 ‘다르다’의 의미를 자주 혼동합니다. 정치인이 “우리 당은 틀려요” 할 때의 의미는 ‘different’이지 ‘wrong’이 아니거든요.

이집트에서 온 학자가 “당신네 한국인들은 백인보다 더 심하게 유색인종을 차별한다”고 해서 놀란 적이 있어요. 한국에서 외국인을 차별하는 일이 정말 있나 의심스러웠어요.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외국인을 만나면 미국인 아니면 일본인이었습니다. 미국인들은 힘센 사람들이고, 일본인들은 돈 많은 사람들이니 어떻게 차별할 수 있었겠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우리보다 좀 없이 산다고 방글라데시나 파키스탄, 연변 같은 곳에서 온 사람들을 차별한다니 이런 촌스러운 짓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우리보다 잘 산다는 미국이나 일본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사귀었지만, 나를 그렇게 노골적으로 차별한다는 인상을 받은 일은 없습니다.

임길진 코소보나 동티모르 사태에서 보듯 세계 도처에서 인종차별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인종간의 갈등이 그 원인이죠. 그런데 이것보다 더 불행한 것은, 우리보다 잘 살고 힘센 사람들에게는 인종과 관계없이 잘 대해주고, 우리보다 못 살고 힘 없는 사람들에게는 인종과 관계없이 차별하는 태도입니다. 그런 이중적인 잣대를 갖고 있으면서 평등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우리가 어느 정도로 차별이 심한 나라인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화교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창피해요.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들의 법적 지위에 대해 많은 비판을 하고,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해 거품을 물고 얘기하지만, 한국에 사는 화교들처럼 차별대우를 받는 경우는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수많은 한국인이 미국 캐나다 유럽 등지에서 시민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자리를 잡고 사는 것은 그 사회가 그만큼 개방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국제 무대에서 제 위상을 확보하려면 무엇보다 인종·민족적 편견에서 벗어나 완전한 평등주의를 체화해야 됩니다.

이윤기 우리는 대대로 유목민의 삶이 아니라 농경 정주민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오순도순 모여 살다보니 좋은 점도 많았지만, 이런 배경에서 ‘다름’을 ‘틀림’으로 여기는 의식이 싹트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경북 군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살았는데, 그곳에서는 외지에서 온 사람이 풋고추를 먹을 때 꼭지를 따고 된장에 푹 찍어 먹어야지 꼭지를 쥐고 찍어 먹으면 상놈이라며 하대했어요. 밥상을 받으면 간장 뚜껑부터 열어놓고 수저를 들어야 양반이라고 했어요. 말도 안 되는 관습을 정해놓고는 자신과 ‘다르게’ 행동한다며 ‘틀렸다’고 한 겁니다.

몇 년 전부터 사람을 만나면 좀 당황하게 되는 때가 있어요. 저와 처음 마주하는 사람들은 대개 서너 번을 미치더군요. 우선 내 나이가 궁금해서 미쳐요. 두 번째로는 고향이 어딘지 궁금해서 미치고, 그 다음엔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궁금해 미칩니다. 그 얘기가 다 끝나면 이번엔 내가 한나라당을 지지하는지 민주당을 지지하는지 궁금해서 또 미쳐요. 빨리 대답해주지 않으면 조바심치기까지 해요. 짓궂게도 저는 일부러 모순된 태도를 보입니다. 예를 들어 “한나라당을 지지한다”고 해놓고는 “그런데 신문은 한겨레를 좋아한다”고 툭 던져요. 그러면 상대방이 안절부절 못해요. 제가 그의 논리적 일관성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죠.

결국 그는 저를 희미한 회색분자쯤으로 분류해놓고 자신의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지요. 조선일보를 좋아하는지 한겨레신문을 좋아하는지 빨리 말해라! 황석영을 지지하는지 이문열을 지지하는지 빨리 밝혀라!… 이 얼마나 촌스러운 일입니까. ‘둘 중 하나’가 아니면 회색분자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다면 회색분자들이 많아져야 좋겠어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임길진 사상적 획일주의죠. 사상의 독재이고 이데올로기의 전횡이에요. 다양한 사안들에 대해 하나 하나마다 적절한 기준을 갖고 선택하게 해야 시민사회의 진정한 복수주의가 실현되거든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자기 나름의 문화적 가치를 가질 수 있고 정치적 주장을 소신껏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교육입니다. 올바른 교육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장기적으로 투자해야 사회 전반의 획일주의와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제도는 아직 ‘변형’ 단계에 머물러 있어요. 이걸 변성과 변역으로 이끌어야 해요.

이윤기 어린 시절 저는 학교에서 참으로 이상한 이유로 상처를 많이 받아 그 후 학교와는 몇십년째 불화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때 저는 영어공부를 좋아해서 영어를 꽤 잘했고 국어도 잘했어요. 그런데 주산을 못한다고 주산선생이 제 빡빡 깎은 머리를 주판으로 사정없이 긁어버렸어요. 마침 새로 산 주판이라 주판알 끝이 날카로웠고 알이 여섯 줄이나 됐어요. 그걸로 맨머리를 긁으니 여섯 개의 핏줄이 쫙 그려지더군요. 그때부터 도대체 내가 왜 여기 앉아서 이런 짓을 하고 있나 생각하게 됐어요.

그후 30년 세월이 흘러 제가 미국에 연구원으로 가기 직전이었는데, 중학교 1학년이던 제 아들이 수학선생한테 매를 맞고 멍투성이가 돼서 집엘 왔어요. 걔도 날 닮았는지 영어는 잘했는데 수학은 못했나봐요. 얼마나 맞았는지 미국에 간 후에도 한동안 멍이 없어지지 않았어요. 영어 잘하는 학생이 수학 못한다고 매를 맞아야 된다? 문득 미국 생각이 나더군요. 미국 학교에서 바이올린을 기가 막히게 연주하는 아이가 다른 과목 성적이 좀 나쁘다고 수업시간에 상처를 입는 경우는 없어요.

물론 전인교육이라고 해서 한 인간이 홀로서기를 하고 주체성을 가지려면 국어 영어 수학 음악 미술 가릴 것 없이 다 잘하면 좋겠죠. 옛날 선비들은 경서에도 통달하고, 활도 잘 쏘고, 시며 음악에도 소양이 있어야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우리 교육은 여기에 너무 매달리다 보니 지나치게 힘을 낭비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미국 학교에선 미술시간에 삼원색이니, 중간색이니 하는 걸 가르쳐주지 않아요. 음악시간에도 높은음자리표, 낮은음자리표, 장3도, 단3도를 가르치지 않아요. 아이들에게 그저 악보를 보고 바이올린을 삑삑 긁어대게 하면서 2년쯤 지나면 그런 걸 모르고도 연주를 하고 있어요. 제가 한창 암기력이 좋을 때는 미당(未堂)의 시를 몇 번 읽으면 그 자리에서 외워버렸어요. 그렇게 머리 잘 돌아갈 때 제가 뭘 했는지 아세요? 검정고시 준비하느라 미술 음악 실과 농업책 갖다놓고 달달 외고 있었지요. 올림바장조는 샤프가 몇 개, 뭐 이런 것 외우고 있었어요. 이건 에너지 낭비가 아닐까요.

임길진 교육의 목표를 세 단계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암기 위주의 지식을 획득하는 것, 두 번째는 그렇게 해서 얻은 지식을 현실에 응용하는 것, 세 번째는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 즉 창조죠. 그런데 우리 교육은 첫 단계인 암기만 강조하기 때문에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입시제도 자체가 많이 외우는 학생에게 유리하게 돼 있으니까 이런 문제가 좀체 해결되지 않고 있어요. 따라서 입시제도를 어떻게 바꾸느냐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한편 미국식 교육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미국 학교가 우리와는 딴판으로 학생들에게 교육의 첫 단계인 암기를 너무 안 시켜서 기초가 부실하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응용과 창조만 중요하게 여기다 보니 나중에 문제가 생긴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대학원 학생들이 기본적인 수학공식도 몰라 기초 수학이나 과학 수업을 어려워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이 한때 우주경쟁에서 소련에 뒤지자 학교 교육을 재정비해야 된다며 기초적인 과학교육을 강화한 적도 있습니다.

우리 교육은 우리대로, 미국 교육은 미국대로 강점을 키우고 약점을 보완해야겠죠. 그런 점에서 외국 것을 일방적으로 배우기만 할 게 아니라 교류를 통한 상호학습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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