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론에 들어가기 전에 다소 엉뚱한 문제 한 가지. “로미오와 줄리엣은 과연 어느 나라 사람이었을까?”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정답은… ‘이탈리아인’이다. 영국의 문호(文豪) 셰익스피어가 쓴 ‘로미오와 줄리엣’은 중세 이탈리아의 베로나를 배경으로 한 사랑 이야기다. 실제로 베로나에 가보면 줄리엣의 집과 로미오가 타고 올라갔다는 줄리엣의 방 발코니가 버젓이 있고, 줄리엣의 무덤이며 로미오의 집도 주요 관광지로 돼 있다.
베로나를 아십니까?
베로나(Verona)는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인구 20만명 남짓 되는 소도시. 이탈리아 북부 지방의 동서 양쪽에 포진한 밀라노와 베네치아의 중간쯤에 위치해, 이들 두 도시까지 기차로 각각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 이런 위치 덕분에 베로나는 오래 전부터 북부지방의 동서를 횡단하고, 이탈리아 반도의 남북을 잇는 교통 요지로 기능해왔다. 산업으로는 운송업을 비롯해서 가구업, 와인생산, ‘로소 데 베로나’라고 불리는 대리석 등이 유명하다.
이탈리아의 여러 중소도시들이 그렇듯이 베로나 역시 온갖 역사적 유적들로 뒤덮인 곳이다. 도시 한 가운데에는 로마의 콜로세움보다도 40년 정도 빠른 기원후 30년에 건설된 거대한 원형경기장(아레나)이 위용을 뽐내고 있고, 미로 같은 골목 안 곳곳에는 중세 때부터 르네상스,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시기로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성당과 건축물, 기념비들이 즐비하다.
그러니 이 도시에 관광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깨끗한 자연환경은 기본이고, 주변에 베네치아를 비롯해 파두아(Padua) 비첸차(Vicenza) 등 가볼 만한 고도(古都)가 산재하는 데다가 이탈리아 최대의 호수이자 휴양지인 가르다 호수도 지근거리에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음습한 기후에서 사는 중북부 유럽인들에게 베로나는 알프스 너머에 있는 ‘따뜻한 남쪽 나라’다.
‘관광대국’이라는 이탈리아의 명성에 걸맞게 베로나 사람들은 관광상품 개발에도 남다르다. 상징적인 사례가 앞서 언급한 ‘줄리엣의 집’. 역사적 실존 여부가 분명치도 않은 문학작품의 주인공을 실제화해서, 일견 평범하기 짝이 없는 건물 한 쪽 귀퉁이를 전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이 바글거리는 명소로 만들어내는 ‘솜씨’는 대동강물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이 울고 갈 지경이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한국인 관광객들 중에서 베로나를 찾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단체관광을 주로 하는 한국인들에게는 서구 문명의 수도(首都)인 로마를 위시해서 ‘물의 도시’ 베네치아와 ‘꽃의 도시’ 피렌체, 세계 3대 미항의 하나인 나폴리와 폼페이 유적 등을 둘러보는 게 거의 정형화된 코스. 거기에 세계 패션의 중심지 밀라노의 중심지 ‘두오모’(대성당) 앞에서 사진 한 장 찍으면 이탈리아 관광은 거진 끝난 거라고 생각한다. 그나저나, 왜 갑자기 생소한 베로나 타령인가?
사람들이 베로나에 가는 이유
베로나는 전세계 클래식음악, 특히 오페라 팬들에게는 ‘꿈의 도시’ 그 자체다. 베로나의 고대 원형경기장에서 매년 6월 말∼9월 초 사이에 열리는 야외 오페라 무대는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오페라 애호가들로 매일 밤 차고 넘쳐난다. 서구인들에게 오페라는 우리의 경우 판소리에 비견될 수 있으므로, 비유하자면 전라도 남원 쯤에서 열리는 완창 판소리 무대를 서울 뿐 아니라 일본, 중국 등에서 온 관객들이 꽉꽉 채워주는 격이다.
결론부터 말해서, 베로나를 찾는 외지인들에게는 관광이나 휴양이 일차적인 목적이 아니다. 풍광 좋은 관광지나 휴양지는 베로나 말고도 유럽 전역에 널려 있다. 그들이 여름 휴가철에 그 좋다는 휴양지를 마다하고 굳이 베로나를 찾는 이유는 바로 오페라, 그것도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야외 오페라가 있기 때문이다. 여름 휴가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 나머지 1년 동안 땀흘려 모은 것을 다 쓴다는 서구인들이, 낮에는 느긋하게 관광이나 휴양을 즐기다가 밤에는 야외 오페라 감상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맛보기 위해 베로나로 몰려드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오페라 무대로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 런던의 코벤트가든, 파리의 바스티유,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등이 있다. 이런 곳들은 ‘예술적인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곳들이다. 그러나 근년 들어 세계적으로 클래식음악의 퇴조 기미가 짙어지면서 이런 무대들도 경영이 예전같지 않다는 얘기들이 심심찮게 들리고 있다. 이런 극장들이 영입하려고 애쓰는 음악감독의 요건으로서 음악적 재능도 중요하지만, 넓은 안면을 활용해서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올 수 있는 ‘펀딩(funding) 능력’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반면에 베로나 오페라는 음악적 수준은 이들 세계 최고의 극장보다 다소 떨어질지 몰라도 관객동원 면에서만큼은 승승장구를 거듭하고 있다. 베로나 오페라를 감상하는 사람들은 연평균 50만명 이상이고, 오페라 한 편 공연 때마다 들어오는 관람객 수는 평균 1만2000명에 달한다. 계단통로까지 빽빽이 들어차는 인기 작품 공연 때에는 2만명 가까이 수용하는 적도 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 베로나는 원형경기장이라는 역사적 유산을 활용한 ‘오페라 마케팅’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베로나가 이탈리아 전체 도시들 중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순위에 항상 다섯 손가락 안에 포함되고, 베로나 시민들이 이탈리아 전체 평균치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부유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결국은 오페라 덕분이다.
그러면 베로나의 그런 성공이 단순히 고대 원형경기장을 무대로 활용한 오페라라는 단 한 가지 요인 덕분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오페라 무대를 위해서 오페라 운영기구와 베로나 시당국, 전체 시민들이 긴밀하게 협조하는 것은 기본이겠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볼거리와 편의시설을 만드는 등 관광객들에게 베로나를 ‘다시 오고 싶은 곳’으로 느끼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오페라가 공연되는 여름 시즌에 베로나의 또 다른 야외극장인 ‘테아트로 로마노’에서 셰익스피어 축제를 여는 것이 한 가지 예다. 올해로 52번째를 맞는 이 축제는 셰익스피어가 쓴 ‘햄릿’과 ‘로미오와 줄리엣’ 등 연극과 발레 공연을 하고, 해마다 특출하게 활동한 여성을 선정해 ‘줄리엣상’을 주기도 한다.
원형경기장이 오로지 오페라 무대로만 활용되는 것도 아니다. 겨울철인 11월에서 1월 사이에는 예수가 태어난 말구유 모형을 전시하는 행사를 열고, 1985년 이후로는 대중가수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엘튼 존, 스팅, 프랭크 시내트라, 핑크 플로이드, 티나 터너, 안드레아 보첼리 등이 그렇게 해서 아레나 무대에 섰다.
올해의 하이라이트 ‘나부코’
지난 7월29일 밤 9시, 베로나 중심부의 원형경기장 앞 광장은 온갖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주류는 물론 백인들. 그러나 사용하는 언어는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를 비롯해서 그 밖의 알 수 없는 언어들이 섞여 있었고, 근년 들어 ‘오페라 강국’으로 빠르게 부상한 일본인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이 날 밤의 레퍼토리는 베르디의 ‘나부코(Nabucco)’였다. 구약성서에 기반한 이 작품은 예루살렘을 침략한 바빌로니아의 왕 나부코가 유일신 여호와에 귀의하는 과정, 나부코의 딸인 페네나와 유태왕의 조카인 이즈마엘레 사이의 사랑, 나부코가 노예에게서 낳은 딸 아비가일레의 왕위찬탈 음모 등이 얽히고 설킨 스토리다.
‘나부코’는 오페라 레퍼토리 중에서 그리 대중적이지 않은 작품에 속한다. 또, 베르디가 쓴 오페라 20여편 중에서 초기 작품에 속하니만큼 음악적인 면에서도 베르디의 특징적인 요소가 상대적으로 덜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나부코’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탈리아 북부지역이 오스트리아제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베르디가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의도에서 쓴 작품이 바로 ‘나부코’였기 때문. 그래서 이탈리아인들은 ‘나부코’에 나오는 유명한 합창곡인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같은 곡에 남다른 애정을 느낀다고 한다.
올해의 ‘나부코’는 베로나 오페라가 공연하는 작품 네 편 중 단연 최고의 화제작이었다. 환상적인 무대 조명과 사이키델릭한 의상, 전자장치로 작동되는 무대세트 등 SF적인 요소가 듬뿍 가미된 연출로 호평을 받은 것이다. 휴고 데 아나(Hugo De Ana)라는 사람이 연출과 무대세트, 의상을 모두 맡았는데, 그는 현재 이탈리아에서 ‘떠오르는 신예’로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사실 지금까지 이탈리아의 오페라 연출 경향은 작품의 시대배경에 충실한 사실적인 무대연출이 주류였다. 그런 점에서 이번 ‘나부코’는 이를테면 일종의 모험이었고, 그 모험은 멋지게 성공한 셈이다.
9시15분부터 시작하는 오페라를 보기 위해서 사람들은 원형경기장 안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갔다. 원형경기장을 빙 둘러서 맨 위쪽은 지정좌석이 없는 곳. 입장권도 비교적 싼 편이기 때문에 인기 있는 작품이 공연되는 날에는 한낮부터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로 좌석의 상당 부분이 메워지곤 한다.
반면에 원형경기장 계단 아래쪽 좌석은 이른바 로열석이다. 정장 차림을 한 부유층이 이 자리를 차지하는데, 입장권은 25만∼30만 리라(우리 돈으로 12만∼15만원).
기자는 베로나에 도착하기 전에 ‘아이다’와 ‘운명의 힘’ 두 편의 오페라 티켓만 예매해둔 터였다. 한 장은 무대의 정면 바닥쪽 가장 좋은 자리였고, 다른 한 장은 중간 가격대인 계단 중간층 자리. ‘나부코’는 사전에 예약해놓지 않았던 터라 공연시작 직전에 암표를 살 수밖에 없었다. 암표상과 한참 동안 흥정한 끝에 합의한 가격은 8만 리라(액면가는 4만2000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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