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호

‘헤드 헌터’ 자손들의 살벌한 논 농사

세계8대 불가사의, 필리핀 바타드의 계단식 논

  • 만화가 조주청

    입력2005-04-18 14: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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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드 헌터’ 자손들의 살벌한 논 농사
    하늘 아래 첫 동네 바타드(Batad)로 가는 길에 이상한 사람 둘을 만났다. 바나우에를 출발한 트라이시클이 산비탈에 바짝 붙어 한 시간을 달려와, 거기서부터 정글 속에 파묻혀 코가 닿을 듯이 가파른 토끼길을 숨을 깔딱이며 한시간 반을 올라야 동네가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산마루에 닿는데, 그 두 사람은 제 몸무게나 됨직한 쌀자루를 메고 이 고된 길을 오르고 있었다.

    바타드는 온 산비탈이 계단식 논으로 둘러싸인 ‘쌀천지 동네’다. 당연히 쌀은 밖으로 나가야 하거늘 어째서 그 힘든 길로 쌀을 메고 들어가는가? 사연을 물어본즉, 두 남정네는 “작년에 추수한 쌀은 팔아버리고 양식으로 남겨둔 쌀은 술을 빚어 마셔버려서 3일을 굶다가 쌀을 사가는 것이오”라며 히죽거린다.

    그것은 농담이었다. 작년에 혹독한 가뭄이 들어 모가 많이 말라죽은 탓에 쌀천지 동네에서 쌀을 사들여오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산마루에서 땀을 닦으며 구름에 가려졌다 슬며시 나타난 바타드 마을을 내려다보면, 저곳은 절대로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찍부터 스페인과 미국의 지배를 받은 탓에 다른 아시아 국가보다 훨씬 빨리 어설픈 서구문명이 쳐들어와 전통을 잃어버린 필리핀에서 그나마 바타드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들어가는 길이 이렇게도 험하기 때문이다.

    세계 8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이 지방의 계단식 논(Rice Terrace)의 논둑을 이어놓으면 그 길이가 자그마치 지구의 반 바퀴를 도는 2만2400km나 된다고 한다. 60∼70도로 경사진 산비탈의 등고선을 따라 좁디좁은 논이 차곡차곡 쌓인 걸 보면 도저히 인간이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



    고고학자들의 조사 결과 이 계단식 논은 2000년 전부터 경작되었음이 확인되었다. 그 옛날, 말레이계인 이푸가오(Ifugao)족이 부족 싸움에 밀려서 다른 부족이 거들떠보지 않는 이 깊은 산골에 정착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계단식 논 경작밖에 없었으리라. 이렇게 가파른 산비탈에서는 가축이나 수레의 도움도 받을 수 없어 오로지 인간의 손만으로 이런 대역사를 이룩한 것이다.

    ‘헤드 헌터’ 자손들의 살벌한 논 농사
    이푸가오족이 이 깊은 산속에 숨어들어 왔지만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다른 부족들도 산속으로 들어와 이푸가오족의 계단식 논 쌀재배 방식을 배워 이웃산에 터전을 잡은 것이다.

    가뭄이 들면 다른 산골짜기의 물을 등고선을 따라 끌어오는 과정에 자연히 다른 부족과 마찰이 생긴다. 이것은 생사가 걸린 문제이기에 타협의 여지가 없어 부족전쟁으로 비화한다. 젊은이는 다른 부족의 목 하나를 따오지 않으면 장가를 못 갈 만큼 타부족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했다.

    서구열강들이 이 나라를 지배할 때도 물싸움은 계속되어 이푸가오족은 본톡, 사가다족과 함께 ‘헤드 헌터(head hunter)’라 불리며 가장 미개한 종족으로 취급받았다.

    이곳의 쌀 재배는 완전한 유기농이다. 사실 그들에게는 유기농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조상 대대로 농사지었던 것처럼, 농약이 뭔지도 비료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모를 심고 물을 대고 그리고 벼가 익으면 추수를 할 따름이다.

    ‘헤드 헌터’ 자손들의 살벌한 논 농사
    국제미작연구소(IRRI) 연구원들이 이 마을에서 많은 벼 종자와 비료와 농약 살포를 포함한 갖가지 방법으로 5년 동안 벼농사를 지어봤다. 연구 결과는 이푸가오 벼는 아무 비료도, 아무 농약도 살포하지 않는 이푸가오식으로 농사짓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연구는 계속되었고, 그 원인 규명에 명쾌한 해답은 얻을 수 없었지만 논바닥에 까맣게 깔린 다슬기가 해충을 방제하고 논바닥을 기름지게 한다는 잠정 결론이 내려졌다.

    쌀에 목줄을 건 이푸가오족은 쌀을 양식으로만 보지 않고 ‘쌀의 신’이 그들을 살려준다고 믿는다. 그래서 추수를 하고 난 7월이 되면 닭과 돼지를 잡아 심장에서 뿜어나오는 피와 쌀로 빚은 술을 ‘쌀의 신’에게 바치는 제를 올린다.

    ▶여행안내

    필리핀을 상징하는 계단식 논의 중심지는 바나우에(Banaue)다. 마닐라에서 출발, 버스를 한 번 갈아타며 꼬박 10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바나우에는 찻길이 이 마을을 관통, 옛 모습을 잃어버렸다. 하룻밤을 이 마을에서 자고 가이드를 한 사람 사서(1만원) 트라이시클(5000원)로 한 시간을 달린 후 걸어서 3시간, 숨이 턱까지 차는 산을 넘어가면 옛 모습을 간직한 바타드 마을에 닿는다. 바타드에는 숙박시설이 세 개나 있다. 하룻밤 자는데 1300원. 전기도 없고 물론 전화도 없다. 계단식 논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힐 사이드 인(Hill Side Inn)의 전망이 가장 좋다. 반딧불이의 중간 숙주인 다슬기가 지천에 깔려 밤이면 반딧불이가 밤 하늘을 수놓고, 숲 전체가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된다. 3월 하순에서 4월 초순의 모내기 철이 여행 적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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