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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한국 먹여살리는 조선산업의 경쟁력

  • 이형삼 hans@donga.com

불황한국 먹여살리는 조선산업의 경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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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造船) 한국’의 성가가 드높다.
  • 1999년부터 3년째 세계 조선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50년 가까이 세계정상을 지켜온 ‘조선 왕국’ 일본도 당황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한국 조선업 돌풍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울산 현대중공업 조선소 동편에 있는 야트막한 야산 위엔 아담한 영빈관이 한 채 서 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영빈관으로 오르는 도로 아래쪽에는 ‘잔디공원’이라 불리는 널찍한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녹빛이 눈부신데다 조선소와 울산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여 현대 직원 가족들이 백일장이나 사생대회를 열곤 하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잔디공원과 야산 한쪽 면이 통째로 깎여나가고, 그 자리에선 선박 블록 조립작업이 한창이다. 3년째 선박 수주(受注)가 크게 늘면서 작업공간이 절대적으로 모자라게 되자 생각다 못해 짜낸 아이디어였다. 더 이상 바다를 매립하는 데도 한계가 있고 북쪽 야산은 그린벨트로 묶여 있기 때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잔디공원과 인접한 제3도크는 길이가 640m나 되고 선박을 100만t까지 동시에 건조할 수 있는 세계 최대 규모. 완성된 배를 진수하기가 무섭게 다른 배를 끌어다 놓고 작업을 서둘러야 할 만큼 일감이 밀려 있어 산을 깎아내지 않고는 자재를 쌓아둘 곳이 없었다고 한다.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80척, 51억 달러어치의 선박을 수주해 세계 시장의 13%를 점유했고, 59척, 420만GT(총톤수)의 선박을 건조해 인도, 세계 전체 건조량의 15%를 차지하며 세계 1위를 굳혔다. 현대그룹 계열사의 지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손해를 봐 지난해 당기순이익은 151억 원에 그쳤지만 영업이익은 7569억 원이나 됐다. 지난해 말 현재 수주잔량은 140여 척, 1000만GT. 넉넉잡아 2년6개월치 일감을 쌓아두고 있다는 얘기다. 울산 조선소에는 1000명 이상을 수용하는 구내식당이 39개나 있다. 조선, 해양사업, 선박엔진 등에 종사하는 2만7000여 명의 직원들이 어느 현장에 있든 최단 거리의 식당에서 신속하게 식사를 마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다른 업체들의 사정도 비슷하다. 대우조선은 올해 들어서만 4월말 현재 31척, 26억 달러어치의 선박을 수주해 올해 수주목표인 25억 달러를 이미 넘어섰다. 조만간 계약이 이뤄질 것이 확실시되는 옵션까지 포함하면 올해 총 수주액은 37억 달러에 이를 전망. 수주잔량도 75억 달러어치에 달해 2003년까지 건조일정이 꽉 차 있다. 대우는 특히 올 들어 전세계 LNG(액화천연가스) 운반선 발주량 34척중 3분의 1인 11척을 가져갔다.



대우조선 박종기 홍보실장은 “선박 수리를 전담하던 작업장에서도 새 배를 만들어야 할 만큼 물량이 넘친다”며 “한 해 15만여 명의 내방객이 거제 조선소를 둘러보러 오는데, 이들을 안내할 인력이 모자라 직원 부인들에게 에스코트를 맡기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한다.

2년 연속 세계 1위

1999년 워크아웃에 들어간 대우조선은 지난 1분기에만 1079억 원의 영업이익을 올려 이런 추세가 지속될 경우 올해 안에 대우 계열사 최초로 워크아웃을 졸업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난해 36억 달러어치를 수주한 삼성중공업은 올해 수주목표를 지난해보다 오히려 22% 줄어든 28억 달러로 낮춰잡았다. 현재 설계중이거나 건조중인 선박이 120척이나 되기 때문에 앞으로는 수익성이 높은 선박 위주로 선별해서 수주하겠다는 방침에 따른 것.

97년 부도를 내 99년부터 현대중공업이 위탁경영하고 있는 삼호중공업도 올해 매출액이 지난해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1조1000억 원, 순이익은 700억 원대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이 회사는 부도 이후 6800여 명의 직원을 1800여 명으로까지 줄였으나 일감이 급증하자 1500여 명의 퇴직 근로자를 복귀시키는 등 직원수가 5700여 명으로 회복됐다.

한국 조선업계는 지난해 세계 선박 주문량의 45%(2079만GT)를 휩쓸며 사상 최대의 수주실적을 올렸다. 지난해 말 현재 수주잔량은 3000만GT를 넘어 앞으로 3년 정도는 주문을 더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일거리가 쌓여 있다.

이로써 한국은 99년 40.9%(1184만GT)의 시장점유율을 기록, 1950년대 이후 50년 가까이 세계 조선업계 1위를 지켜온 일본을 누른 데 이어 2년째 세계 정상을 고수하면서 일본과의 격차를 더욱 벌렸다. 현대 대우 삼성 등 이른바 ‘빅3’의 수주량만도 세계 시장의 30%에 육박, 일본의 시장점유율(29.2%)과 맞먹는다. 한국은 93년에 사상 처음 수주량에서 일본을 앞선 바 있지만, 이는 당시 엔화가치가 급등하면서 일본 선박의 자재비가 우리보다 25% 이상 상승, 일시적으로 경쟁력 우위에 섰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이듬해 큰 폭으로 한국을 추월하며 정상에 복귀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본의 재역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게 조선업계의 전망이다. 우리 업체들이 가격경쟁력은 물론, 기술력과 생산효율, 영업과 관리능력 등 모든 면에서 일본보다 앞서거나 대등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

일본 조선업계도 이번에는 ‘한국 돌풍’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지난 1월 일본의 조선 전문지 ‘Compass’가 조선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내용을 보면 “한국과의 기술격차는 없어졌다” “한국은 대량 건조를 통해 기술, 품질 등 비(非)가격경쟁력이 향상됐다”는 등의 의견들이 눈에 띈다. 또한 ‘해사프레스’지 최근호는 일본의 대형 조선사 선박사업본부장들을 인터뷰했는데, 이 자리에서 일본 업계 1위인 미쓰비시중공업 본부장은 “10년후 중국이 부각되고 과잉설비가 문제될 가능성이 있으나, 건조량에서는 당분간 한국의 독무대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NKK 본부장도 “한국은 기술력과 생산성이 매년 향상되고 있다. 우리로선 착실히 해나갈 수밖에 없다”고 초조한 심사를 드러냈다.

대부분의 제조업종이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 조선산업이 이처럼 성장을 거듭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국은 이미 80년대 후반부터 세계 조선시장에서 20%대의 점유율을 유지했는데, 많은 이들은 그 주요인을 저임금에 바탕한 가격경쟁력에서 찾는다.

‘규모의 경제’ 실현

배를 건조하는 공정은 다양하기도 하거니와 대형 구조물을 많이 만들어야 하므로 자동화에 한계가 있다. 따라서 충분한 규모의 기능인력을 활용해야 하는 노동집약적 산업이다. 이 때문에 조선 선진국인 일본이나 유럽보다 임금수준이 낮은 한국이 가격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 80년대 중반까지 한국 조선업계의 임금수준은 일본의 20%에 불과했다. 87년부터 한국의 임금이 매년 20% 가까이 인상됐고 90∼95년에는 연평균 10%의 증가율을 보인 데 비해 일본은 2.6%의 증가율에 그쳤지만, 그간 원화는 평가절하됐고 엔화는 평가절상됐기 때문에 95년에도 한국 업계의 임금은 일본의 46.6%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들은 “한국이 가격경쟁력에서 우위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저임금 덕분이라기보다는 대형 설비와 인력 확보에 따른 규모의 경제, 뛰어난 설계능력, 기술과 생산성 향상 등에 힘입어 꾸준히 비용을 절감, 원가를 낮춰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우리의 임금수준은 수주 증가로 인력수요가 늘면서 계속 높아지고 있지만, 업황이 사양길에 접어든 일본 업계의 임금은 하향세에 있다는 것. 국내 대형 조선사의 현장 근로자 평균 연봉은 4000만 원에 육박, 제조업종 가운데 가장 높은 축에 든다.

또한 요즘에는 부가가치가 높은 선박의 건조가 늘고 배에 설치되는 기자재가 고급화된 데다, 조선사들이 비용절감을 위해 아웃소싱을 늘리고 있어 임금은 올랐어도 선박제조 원가중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15% 정도에 불과하다. 저임 노동력으로 경쟁력을 높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조선산업은 선대(船臺), 도크, 크레인 등 대형 설비를 갖춰야 하므로 막대한 설비자금이 필요할 뿐 아니라 장기간의 선박 건조에 소요되는 운영자금도 뒷받침돼야 한다. 따라서 자금력이 풍부한 소수 대기업을 중심으로 시장구조가 형성되게 마련이다. 우리 정부는 70년대 들어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노동집약적이고 관련산업 파급효과가 큰 조선공업을 중점 지원하기로 했는데, 이에 힘입어 73년 현대중공업이 울산에 단일 조선소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소를 완공했다. 당시 세계의 선박 수요가 대형화 추세였기 때문에 대우와 삼성 등도 속속 현대화된 대형 설비를 갖추고 조선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다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거치며 조선업이 불황에 빠져들자 정부는 조선산업 합리화조치로 설비 증설에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70년대에 대량 생산된 노후 탱커(유조선, 화학제품 운반선 등)들이 80년대 말부터 새 선박으로 대거 대체되면서 조선 경기가 회복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93년 조선산업 합리화조치를 철폐했다. 조선사들은 다시 경쟁적으로 설비 확충에 나섰다. 그 결과 현대중공업이 9개 도크에서 연 60척, 대우와 삼성이 각각 연 40척의 대형 선박 건조능력을 갖춰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소로 대형화됐다.

조선사들은 이렇게 증설한 대형 설비를 풀 가동하기 위해 공격적인 수주전략을 폈고, 이는 ‘규모의 경제’를 실현, 생산성을 높이면서 선가를 떨어뜨렸다. 우리나라에서는 ‘빅3’를 포함한 9개 대형 조선업체가 업계 전체 건조물량의 95% 이상을 담당하고 있지만, 일본의 경우 2500GT 이상의 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7개 대형 업체가 소화하는 건조물량이 53%에 불과하다. 중·소형 업체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조선소 규모가 크다 보니 설비의 집적효과도 크다. 예를 들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의 선박건조 가능량(capacity)은 현대중공업보다 다소 많지만, 미쓰비시는 설비와 인력이 3개 조선소로 분산돼 있는 데 비해 현대는 처음부터 대형 조선소 한 곳에서 30년 가까이 배를 만들었기 때문에 설비와 인력이 고도로 집적화, 현대화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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