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호

필리핀 전통의 닭싸움 도박판

  • 만화가 조주청

    입력2005-04-13 14: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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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전통의 닭싸움 도박판
    랜디(25세)를 트라이시클 운전기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닭싸움 도박꾼이다. 트라이시클로 한푼 두푼 돈을 모으는 것은 노름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그는 또 닭싸움장인 콕핏(Cockpit)에 가서 단순하게 배팅하는 수준을 넘어 직접 사육한 싸움닭을 출전시킨다.

    도박성 닭싸움은 옛날부터 동남아, 특히 필리핀에서 성행해 왔다. 싸움닭은 ‘샤모’종으로 보통닭보다 뼈대가 굵고 다리와 목이 길며 직립형이다.

    닭싸움은 동남아에서만 성행하는 것이 아니라 멕시코, 스페인에서도 인기있는 도박이다. 자연히 우수한 싸움닭이 서로 교류하게 마련이다. 요즘 필리핀의 토종 싸움닭인 샤모종은 외세에 밀려 명맥마저 끊어질 지경이다.

    레몬, 달리싸얀 등 수입종이 판을 치지만 그중에서도 텍사스(Texas)와 홀로(Jolo)가 닭싸움을 주도한다. 텍사스는 매우 빠르지만 상처를 입으면 금방 죽는 게 흠이고, 홀로는 롱다리에 피투성이가 되어도 끝까지 싸우지만 동작이 굼뜬 게 결점이다.

    랜디는 15마리의 싸움닭을 키우는데 주종은 텍사스다. 그는 싸움닭에 보통 정성을 쏟는 게 아니다. ‘선더버드’란 싸움닭 전용 수입사료를 먹이는 것은 기본이다. 그에 더해 랜디가 개발한, 공개할 수 없는 비장의 강장제가 있다. 그는 강장제에 비타민과 한국산 인삼도 들어 있다며 귓속말로 속삭인다.



    닭싸움은 도박판이기에 싸움닭 사육장에서부터 야릇한 음모가 펼쳐진다. 랜디의 얘기를 들어보자.

    “4전4승을 올리던 천하무적 킹이 작년 말 힘 한번 못 써보고 상대의 칼날에 피를 토하고 죽어버렸어요. 닭싸움이 있기 며칠 전, 킹에 원한을 품은 놈이 몰래 사육장에 들어와 독약을 뿌리고 간 게 틀림없다구요.”

    지난 3월, 랜디는 비장의 다크호스 ‘이글’을 안고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킹이 죽고 난 후 새로 발굴해낸 텍사스종이다. 랜디는 이글에 집중투자를 해 걸출한 투사로 길러낸 것이다.

    사육장에서 실전연습을 할 땐 날카로운 엄지발가락에 글러브를 씌운다. 이글과 맞붙은 스파링 파트너는 예외없이 2, 3합에 꼬리를 내렸다고 한다.

    랜디는 트라이시클 손님자리에 위풍도 당당한 이글을 앉히고, 2시간을 달려 솔라노 콕핏으로 달려갔다.

    콕핏(닭싸움 스타디움)의 함성은 10리 밖에서도 들린다. 권투경기장과 흡사한 콕핏의 닭싸움 무대는 로마시대 검투장 이름 그대로 아레나(Arena)라 부른다.

    주인의 품에 안긴 싸움닭이 아레나에 오르면 서로 얼굴을 맞대 전의를 북돋우고 심판의 호각소리에 싸움닭을 아레나 바닥에 내려놓는다.

    두 마리의 싸움닭은 서로 노려보며 아레나를 반 바퀴쯤 돌다가 바닥을 박차고 튀어올라 공중전 일 합을 펼친다.

    단 일 합에 피를 튀기며 바닥에 쓰러지는 패자가 생기기도 한다. 아레나에 오르는 싸움닭은 엄지발가락(닭의 엄지는 착지하는 다른 발가락과 달리 닭의 발목에 붙어 있다)에 예리한 칼날을 채우기 때문이다. 아레나 밖엔 칼날만 채워주는 전문가들이 있다.

    닭싸움은 빠르면 1합에, 길어야 5, 6합을 넘기지 않는다. 1합, 2합 싸움닭이 튀어오를 때마다 관중의 함성은 귀를 찢는다.

    필리핀 전통의 닭싸움 도박판
    관중들은 엄격하게 인사이드와 아웃사이드로 구분돼 있다. 인사이드 관중은 전문 도박꾼인 멤버들로 그들에겐 매니저가 한 사람 있다. 두 마리의 싸움닭이 아레나에 오르면 매니저는 멤버들의 의견을 취합해서 한 마리에 배팅을 한다. 멤버가 아닌 아웃사이더들은 개별적으로 배팅을 하지만 대체로 멤버들의 반대쪽에 선다.

    닭주인에게 특별한 보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싸움닭을 안고 오는 닭주인은 자기 닭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기에 자기 닭에 큰 돈을 배팅한다. 닭싸움판에 돈을 걸어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속출하여 콕핏에서 총기난동 사건이 비일비재하지만 토·일요일은 온 필리핀이 콕핏의 함성으로 떠들썩하다.

    지난 3월, 이글을 믿는 랜디와 동네 사람들을 가득 태운 트라이시클 열두어 대가 솔라노 콕핏에 의기양양하게 도착했다. 랜디는 단골 칼잡이에게 부탁, 이글의 엄지발가락에 예리한 칼날을 채웠다.

    이글의 눈은 이글이글 불탄다. 마침내 랜디가 이글을 안고 아레나 위로 올라갔다. 상대는 이글보다 왜소하다. 아레나 위의 스포트라이트는 눈이 부시고 관중의 함성은 귀를 찢는다.

    심판의 호각이 울린다. 랜디는 파이팅을 외치며 이글을 아레나 바닥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때, 바로 그때, 상대가 머리를 땅에 깔고 이글에게 달려오자 이글은 꽁무니를 빼고 날개를 펴 푸드덕 날아올라 관중석으로 처박혀 버렸다.

    심판의 호각이 울려 승패가 결정났다. 관중의 함성과 스포트라이트에 놀란 ‘천하무적(?)’ 이글의 해프닝을 생각하면 지금도 랜디는 열이 치오른다.

    필리핀 전통의 닭싸움 도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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