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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 명택 9|경남 거창 정온(鄭蘊 )종택

혁명 기상 충만한 强骨 집안

  •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혁명 기상 충만한 强骨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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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치일란(一治一亂), 한번 치세가 있으면 다음번에는 난세가 오는 법. 이는 비단 국가뿐만 아니라 한 집안사에도 적용되는 것인가. 정씨 집안에서 동계라는 인물이 집안을 명문가로 올려놓은 것이 치세였다고 한다면, 동계의 현손인 정희량(鄭希亮: ?∼1728년)의 출현은 정씨 집안을 존폐의 기로에 몰아넣은 일대 난세였다.

정희량은 영조 4년에 발생한 무신란(戊申亂,1728년)의 주동자였다. 무신란은 조선 후기 반란사건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고, 거기에 가담하였던 충청, 영남, 호남의 내로라하는 명문집안들은 거의 멸문되거나 쑥대밭이 된 사건이었다. 상층 엘리트들이 대거 가담하였다는 측면에서 무신란은 일반 민란과는 약간 성격이 다른 정변적(政變的)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보인다.

기록과 정황을 종합하면 무신란의 발생 원인은 네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는 경종의 독살설. 경종이 게장(蟹醬)을 특별히 좋아하였는데 독이 든 게장을 먹은 직후 갑자기 죽었다는 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경종이 죽을 때 입에서 붉은 피를 토하고 죽은 점, 임종 직후 경종의 시체에 반점이 퍼진 사실이 독살설을 뒷받침한다.

둘째는 경종의 뒤를 이은 영조가 숙종의 친자가 아니라는 점이 제기되었다. 그 증거로 역대 이씨 왕실의 남자들이 수염이 별로 없는 데 반해 영조는 이상하게 수염이 많아, 이는 결국 영조 어머니인 무수리의 미천한 신분과 관련되면서 영조가 이씨 왕통이 아니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셋째는 경종의 뒤를 이은 영조의 등장과 함께 노론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고, 노론에게 밀려난 남인들과 소론(준소)들은 정권에서 완전히 소외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난을 일으켰다는 설이다.



넷째는 당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극심한 흉년이 계속돼 사람을 잡아먹는 상황에 이를 정도로 민심이 흉흉했다는 점이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민란의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을 만큼 수많은 민란이 발생하고 있었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여러 배경으로 인해 일어난 무신란은 이인좌(李麟佐)의 난이라고도 하고 정희량(鄭希亮)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 각종 반란사건의 수사기록인 ‘추안급국안(推案及鞠案)’에서 무신란 관련 기록을 들춰보면 문건 타이틀에 이인좌, 정희량의 이름이 보인다. 동계의 현손인 정희량이 무신란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충신의 후손에서 일순간에 역적 집안으로 전락한 강동의 정씨들은 30명 정도가 사건에 연루되어 죽어야 하였고, 약 20년 동안 동네를 떠나 이곳 저곳에 뿔뿔이 흩어져 숨어 살아야 하였다. 한마디로 집안이 결딴난 것이다. 조선시대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이 쿠데타에 실패한 역적이었으니까, 이후로 정희량에 관한 사실은 초계 정씨 족보에서부터 문집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록에서 철저하게 삭제되었음은 물론이다.

소설가 이병주가 그랬던가! 승자의 기록은 햇빛을 받아 역사로 남지만, 패자의 기록은 달빛을 받아 신화나 전설이 된다고. 정희량에 관한 내용도 마찬가지다. 강동 마을에서 구전으로만 희미하게 전해지는 정희량에 관한 이야기를 후손인 정양원씨(鄭亮元, 62세)가 99년에 ‘강동(薑洞)이야기’라는 책으로 펴냈다.

정양원씨는 현재 사업체(成現商運)를 운영하는 사장이지만 십수년간 시간 나는 대로 자료를 찾고 현지를 답사하면서 정희량에 관한 자료와 정보를 꼼꼼하게 섭렵한 향토사학자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역적이었지만 이제 시대가 바뀌었으니 새로운 시각에서 정희량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서 책을 펴냈다는 것. 이 책에는 정희량에 관한 몇 가지 일화가 나온다. 정희량은 어릴 때부터 인물이 대단히 준수하였고 두뇌가 비상하였으며 생각하는 것이 엉뚱하다 할 정도로 호방하였다고 한다.

정희량이 네댓 살쯤 된 어느 봄날 조부인 제천공이 어린 손자인 정희량을 안고 집 앞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때 마침 우측으로 바라보이는 금원산에 산불이 나서 대단한 기세로 타고 있었다고 한다.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가리고 그 연기 사이로 불꽃이 널름거리는 광경을 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 품에 안겨 있던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 저 둥그런 하늘이 솥(鼎)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허허 고놈이! 하늘이 어떻게 솥이 될 수가 있겠느냐. 그래 하늘이 솥이라면 무엇을 할 것이냐?”

“만약 하늘이 솥이라면 저 불로 죽을 끓여서 굶는 백성들을 모두 먹이면 온 나라 안에 배고픈 사람이 없을 것 아닙니까?”

어린 손자에게 이 말을 들은 제천공은 손자의 생각이 기특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그 그릇이 너무 크고 생각이 지나치게 거창하여 걱정스러운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정감록’과 풍수도참 사상

필자의 주목을 끄는 또 하나의 전설이 있다. 무신년 봄에 정희량이 거사를 하려고 하자 누나가 주역을 펴놓고 골똘히 괘를 풀어보았다. 정씨집 여자들은 주역을 공부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뛰어난 예지력을 갖춘 여성들이 많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 누나는 주역을 풀어본 뒤 동생 정희량의 손을 붙들고 이렇게 말했다.

“네가 정히 큰 일을 할 명운을 타고났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니 조금 더 기다렸다가 금년 가을 나락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할 때가 천시(天時)에 맞다. 그때 하거라.”

그러나 상황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형편이라고 정희량이 대답하니, 누나는 “이것도 역시 우리집 가운이고 너의 명운이라 어쩔 수가 없구나. 지금 거사를 하면 너는 뒷날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무덤 없는 혼백이 될 것이다”라고 한탄하였다 한다.

이러한 전설들은 알고 보면 풍수도참(風水圖讖)에 관한 내용들이고, 한걸음 더 유추하여 보면 정희량 자신도 풍수도참적인 맥락에서 특별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 후기 각종 반란사건의 이념적 기반 중의 하나가 다름아닌 풍수도참이고, 대표적으로 ‘정감록’이 조선시대의 그러한 풍수도참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실제로 ‘정감록’이라는 이름이 공식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가 바로 무신란 때부터다. 혹시 무신란 주도멤버 중 누군가가 ‘정감록’을 비롯한 풍수도참설을 유포하여 민심을 움직이려 한 것은 아닐까? 정씨인 정희량은 혹시 자신을 정도령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조선시대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지배했던 풍수도참적인 시각에서 보면 동계 종택의 풍수와 정희량이라는 인물의 출생은 몇 가지 점에서 부합되는 부분이 발견된다.

다소 어렵긴 하지만 이를 풀어보기로 한다. 태조산인 금원산의 정기를 받은 인물이 강동마을 정씨 집안에서 언젠가 한 명 태어나기 마련이다. 그 사람은 열두 띠 가운데 일단 원숭이해에 출생한 신년생(申年生)으로 범위를 좁혀볼 수 있다. 바로 금원산이 원숭이(申)의 정기가 뭉쳐 있는 산이기 때문. 그 다음에는 원숭이띠 중에도 천간(天干)에 임(壬)자가 들어간 임신년(壬申年)생 인물이 금원산의 정기를 받아먹을 것이다. 바로 동계 종택의 좌향이 임좌(壬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즉 풍수의 이기법(理氣法)을 동원하면 종택 좌향의 임(壬)과 태조산인 금원산의 신(申)이 결합하면 임신(壬申)이 되는 이치다.

그런데 정희량은 역적이라고 해서 모든 기록에서 지워졌으므로 그 출생연도를 확인해볼 수 없다. 추리해 보면 정희량과 함께 난을 꾸민 이인좌의 나이가 무신란 당시 36세였고, 두 사람이 흉금을 터놓고 같이 어울렸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비슷한 연배였을 것이다. 또 기록에 따르면 무신년에 정희량이 큰며느리를 보았다고 돼 있는데, 당시 혼인 적령기가 17∼18세였음을 감안하면 정희량은 무신란 당시 37∼38세쯤이 아니었을까. 무신년을 기점으로 육십갑자를 소급해 올라가면 37세 나이는 임신년(壬申年) 생이다.

그 다음에 생각해볼 요소가 거사년인 무신년(戊申年)이다. 이 역시 원숭이해다. 원숭이띠가 원숭이해에 거사를 한 셈. 이러한 중복은 상서롭게 본다. 그런데 여기에 원숭이가 한 마리 더 첨가되어 세 마리 원숭이가 삼중으로 중복되어야만 제대로 힘을 쓴다고 본다. 전설에 따르면 주역을 잘한 정희량의 누나는 “나락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할 때 거사를 하라”고 정희량에게 충고했다고 하는데, 바로 그때가 음력 7월로 신월(申月)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희량은 그 말을 듣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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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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