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나서 1세기가 지난 오늘날, 사건의 원인과 결과는 학계의 꾸준한 노력으로 대부분 밝혀졌지만 사건 당일의 자세한 진상은 미궁에 빠진 채 여러 주장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동안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연구는 미·소 냉전의 영향으로 인해 러시아측 자료는 도외시된 반면, 국내자료와 영·미 자료 그리고 은폐조작된 일본측 자료에 의존해왔다. 최근에는 시간설(屍姦說)과 황후 시신을 일본인이 궁정 밖으로 빼돌렸다는 충격적인 주장도 나오고 있다
과연 지금까지의 여러 주장들이 얼마만큼 진실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명성황후 시해사건 관련문서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알려진 러시아 외무성 제정(帝政)러시아 대외정책문서국 자료와는 다소 차이점이 있는 것 같다.
러시아측이 보관하고 있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문서는 당시 서울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Вебер К И )가 외상 로바노프-로스토브스키(Лобаов-Ростобский А)에게 보낸 보고서 그리고 당시 고종을 위시한 여러 목격자의 증언서 등이다.
서방국가의 자료에서도 베베르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 서울주재 외교 대표단의 회합을 주선하고,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에게 항의하여 마침내 일본공사가 조선의 국모(國母) 시해사건의 주모자였음을 밝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에 관련해 러시아 외상에게 보낸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전 농상공부 대신 이범진(李範晋)이 10월8일 이른 아침에 러시아공사관으로 찾아와 궁궐이 일본군에 포위되어 민왕후(1897년 이전에는 왕후로 호칭)의 생명이 위태롭다고 말했다.
그때 마침 궁궐 현장에서 사건을 목격하고 우리 공사관으로 온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레딘-사바틴(Середин-Cабатин)도 일본 폭도들이 왕후를 위해(危害)하려 한다고 증언했다. 나는 조선 국왕의 절박한 구원 요청에 조선과 이해관계가 많은 미국의 앨런(Allen) 공사대리와 동행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즉시 앨런에게 연락, 그와 함께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일본공사관을 방문했다. 그러나 미우라 공사가 출타중이라는 말을 듣고 바로 궁궐로 가서 고종을 알현했는데 벌써 일본공사 미우라와 대원군(大院君)이 와 있었다.
오후에 일본공사를 만나 일본군이 조선궁궐에 난입한 진상을 듣기로 하였다. 대원군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사건과 무관함을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베베르는 1895년 10월8일 을미사변(乙未事變) 당일 즉시 러시아 외상에게 숫자로 된 난수표 암호전문을 보내고, 다음날 10월9일에는 현장 목격자로부터 증언서를 받아 보고서에 첨부해 함께 외상에게 보냈다. 러시아 외상은 베베르의 보고서를 사건 목격자 증언서와 함께 니콜라이 II세 황제에게 상주(上奏)하였다.
니콜라이 II세(당시 그는 대관식 이전이었으나 황제 직무수행)는 베베르 보고서를 읽고 상단에 친필로 “천인공노할 사건이니 좀더 자세히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급기야 일본의 만행을 경계해 조선과 러시아 사이의 두만강 국경과 인접해 있는 러시아극동아무르 군관구 사령관에게 산하 부대를 비상대기시키라고 명령했다.
베베르의 민첩한 활동
이와 같은 베베르 보고문서와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서 등이 현재 러시아 외무성 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국에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그 문서의 종류는 아래와 같다.
▲고종의 증언서(1897년 대한제국선포 이후에 고종은 황제로 호칭. 민왕후도 이후부터 명성황후로 추존) ▲시해 현장에 있던 무명 상궁의 증언서 ▲전 농상공부 대신 이범진(李範晋) 증언서 ▲조선군 부령(副領, 중령) 이학균(李學均) 증언서 ▲조선군 정령(正領, 대령) 현흥택(玄興澤) 증언서 ▲러시아인 궁궐 경비원 건축기사 세레딘-사바틴의 증언서 ▲가톨릭 서울주교 프랑스인 구스타프 뮤텔(Gustave Mutel)의 증언서 ▲10월8일 서울 일본공사관에서 서울주재 서방 외교대표(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가 모여서 미우라 일본공사에게 항의하며 나눈 대담록(영국 총영사가 기록) ▲조선 외부대신(外部大臣) 성명서 ▲서울에서 일본인이 발행한 한성신보(漢城新報) 기사 ▲일본군 궁궐 침입로 도면(圖面)
그밖에 베베르가 10월 9일 이후에 외상 로바노프-로스토브스키에게 보낸 문서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고종의 서명 없이 일본이 강압적으로 발표한 왕후폐위칙서(王后廢位勅書) ▲대원군의 성명서 ▲10월25일자, 11월5일자, 11월13일자 일본공사관에서 서울 외교대표들이 일본공사에게 항의하며 나눈 대담록 ▲베베르의 보고서와 전문(電文) ▲동경주재 러시아공사 히트로보의 전문 ▲중국에서 보낸 세레딘-사바틴의 2차보고서(사건 당일 밤 궁궐의 서양인 경비원으로 미국인 다이(W.M. Dye)와 함께 있었던 세레딘-사바틴이 서울 공사관에서 다 쓸 수 없었던 내용을 중국지부 러시아영사관에서 러시아 외무성에 2차 보고한 증언서 ▲고종에게 보낸 일본천황의 친서 등이다.
우선 위와 같은 증언서를 포함해서 자세한 사건보고서를 러시아 외무성에 제출한 서울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는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베베르는 1841년 7월5일 러시아 리바프 지방에서 독일계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루터교 선교사였으며 어머니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그는 1865년에 페테르부르크대학 동양학부를 졸업한 후 러시아 외무성 외교관 시보로 채용되어 베이징(北京)에서 5년간 중국어 공부를 계속했다. 그후 중국 톈진(天津)주재 영사, 일본주재 총영사, 베이징주재 임시공사대리를 역임하고, 1885년에 대리공사 겸 총영사로 조선에 부임하였다.
그는 동양의 예절에 밝아 고종의 환심을 사게 되었으며 처(妻)언니인 독일인 존딱에게 서울에 ‘손탁(러시아어로는 ‘존딱’)호텔’을 경영하도록 했다. 존딱은 이렇게 민왕후의 측근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고종의 총애를 받은 베베르
베베르는 조·러 수교 조약체결을 비롯해 고종이 친러책을 펴도록 한 러시아의 매우 유능한 외교관이었다고 볼 수 있다. 후에 베베르는 고종황제로부터 황실가족에게 수여하는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제외하고는 일반인으로서는 최고 훈장인 충무훈장(忠武勳章)을 받기도 했다.
그는 민왕후 시해사건 때 관련 목격자들의 증언서를 사건 당일에 받는 민첩한 수완을 발휘했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일본공사와 일본정부의 은폐에도 불구하고 다른 서울주재 외교 대표들의 선두에서 일본의 만행을 밝혀내고 범인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범진(李範晋)은 그의 증언서에서 당일 밤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본군대와 조선군이 궁궐을 포위했다는 급보(急報)를 받고 고종은 나에게 시간을다투어 미국공사관과 러시아공사관에 뛰어가 도움을 요청하라는 어명(御命)을 내리셨다. 나는 서쪽 담으로 기어올라가 밖을 보았더니, 정원은 군인들로 온통 가득 차 있었다. 남쪽에 있는 광화문(光化門) 쪽도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어 동남쪽 담의 구석에 있는 작은 탑에 올라가보았다. 그곳에도 밖에는 2명의 일본군인이 순찰을 하고 있었다.
나는 순찰병이 좀 멀리 간 틈을 타 약 4~5m 높이에서 밑으로 뛰어내려 궁궐을 탈출했다. 미국공사관에 도착했을 때 대궐 쪽에서 첫 총성이 들려왔다.”
고종이 이범진을 러시아공사관에 앞서 미국공사관으로 보낸 것은 당시 조선에는 궁내부 고문(宮內府 顧問)으로 미국인 레젠드르(C.W. Legendre) 장군, 군사교관으로 다이(W.M. Dye) 장군(퇴역 대령 출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가 150여 명이나 활동하고 있었고, 미국공사관에서 앨런(중국과 조선에서 의료선교사로 근무한 후 서울 미국공사관에 채용되었다)이 왕실에 의료봉사를 하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고종은 위급한 상황에서 제일의 구원자로 미국공사관을 생각해 냈을 것이다.
이범진은 아무튼 미국공사관을 거쳐서 러시아공사관을 찾아가 궁궐이 일본군에 포위되었다고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궁궐 포위 앞뒤로 발생한 사건은 러시아인 세레딘-사바틴이 증언하고 있다.
세레딘-사바틴(당시 미국과 러시아의 외교관들은 고종에게 일본은 유럽을 두려워한다면서 유럽인 경비원을 여러 명 궁궐에 채용하도록 건의했다. 세레딘은 그중 한명이다)은 서울 러시아공사관에서 쓴 증언서에서 사전 사건모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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