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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발굴|베베르의 시해 보고서와 증언서

“일본인 폭도가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일본도로 난자했다”

러시아측 자료로 본 명성황후 시해사건

  • 박종효·전 모스크바대 교수

“일본인 폭도가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일본도로 난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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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밤인 6일 밤 12시경 경복궁을 순시하고 있을 때 광화문쪽이 소란스러웠다. 광화문 앞에 조선군의 무리가 보였고, 그 뒤에 일본군 부대가 정렬해 있었다. 조선군은 7일 새벽 2시까지 큰소리로 떠들다가 조용해졌다. 궁궐 별군관(당직 사령)의 설명으로는 며칠 전 조선군 훈련대가 경찰대와 싸웠기 때문에 이 두 부대를 해산시킨다는 소문이 돌아 훈련대가 궁궐 앞에 모여 청원시위를 벌였으나 일본군 부대가 도착해 해산시켰다고 했다.

아침에 퇴근해 집에 있으니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한 중국인이 찾아와 밤에 궁궐에 불상사가 발생할 것이라고 은밀히 경고했다. 그러나 그 말을 흘려듣고 저녁 7시에 궁궐로 가는데 길에서 우연히 그 중국인을 다시 만났다. 그는 나가지 말라고 만류하며 밤에는 절대로 궁궐에 있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 중국인은 조선군이 오늘 밤 음모를 꾸며 궁궐을 기습할 것이라는 믿을 수 없는 말만 되풀이했다.

궁궐에는 폭동의 징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궁궐 돌담 옆과 길에는 전과 다름없이 초병(哨兵)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날 밤 유럽인 경비원 당직으로는 미국인 다이 장군과 나 세레딘-사바틴이 있었다.”

세레딘-사바틴의 증언을 보면 사건 전날밤에 조선군 훈련대와 일본군이 대궐 앞에 모여 궁궐침입 예행연습을 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는 당일 밤에는 음모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도 중국인으로부터 사전에 입수했다. 그런데도 안이하게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다가 결국 대궐이 포위되는 지경에 이른다.



대궐 포위에 대한 상황 설명은 현흥택 궁궐경비대 정령과 세레딘-사바틴 그리고 이학균 부령의 증언서에서 드러나고 있다. 먼저 현흥택 정령은 증언서에서 경복궁 포위 시각을 말하고 있다.

“8일 새벽 2시 별군관(궁궐경비 당직 사령관)에게 고종의 호위경관 2명이 달려와 삼군부(광화문 앞 경비실)에 일본군과 조선군 훈련대가 운집해 있다고 보고했다. 나는 즉시 궁궐 경비병 수명을 광화문으로 급파해 상황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돌아와서 고종의 호위경관 말이 사실임을 확인해주었다. 시간이 지나 새벽 4시 조선군 훈련대 대대가 춘생문(春生門,경복궁 동북문)과 추성문(秋成門,경복궁 서북문)을 포위하였다.”

이 증언은 이미 밤 2시부터 경복궁 주위에 폭도들이 집결하여 궁궐을 포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경복궁 포위 시간과 관련해 세레딘-사바틴도 폭도들의 광화문 최초 집합 시각만 모르고 있을 뿐 춘생문과 추성문 포위 시간대는 현흥택 정령의 증언과 거의 일치한다.

“갑자기 8일 새벽 4시에 궁궐경비대 이학균 부령(당시 궁정경비대 소속으로 다이 장군의 수석통역관)이 유럽인 궁궐경비원 숙소에 뛰어와 다급한 목소리로 일본군과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이 경복궁을 포위했다고 말하였다.”

이 증언은 현흥택 정령이 앞서 말한 8일 새벽 4시에 동·서쪽 양 북문을 일본군과 조선군 훈련대가 포위했다는 시간대와 일치한다. 그러나 유럽인 궁궐경비원은 이날 새벽 2시부터 폭도들이 궁궐 주위에 집결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유럽인 경비원은 숙소에서 잠을 자다가 이학균 부령을 통해서 겨우 4시경에야 알게 되었다.

세레딘-사바틴은 궁궐 포위에 관한 증언을 계속하고 있다.

“다이 장군과 나는 이학균 부령으로부터 보고받자마자 일어나 별군관실로 갔다. 그러나 2명의 부령과 최소한 6~7명의 당직 장교가 야근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도 그곳에는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새벽 4시 반경에 다이 장군은 추성문 쪽으로 가서 그곳의 상황을 알아보려고 이학균 부령을 불러 동행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고종을 알현해 보고하는 것이 급선무라며 왕실내궁 쪽으로 갔다.

궁궐내 상황

다이 장군과 나, 둘이서 추성문에 다가가자 대문틈으로 번쩍이는 총검을 착용한 일본군 병사 40~50명이 도열해 있는 모습이 달빛에 환히 보였다. 일본군은 곧 우리의 순찰을 눈치채고 담쪽으로 몸을 숨겨버렸다. 다음엔 춘생문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그쪽에도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 약 250~300명이 일본인 교관 4~5명의 인솔을 받으며 뭔가 상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한 조선 사람이 큰소리로 대문을 열어달라고 몇 번 외쳤다.”

고종 알현

이때의 궁궐 상황은 이학균 부령의 증언서에서 잘 나타난다. 대궐이 포위된 긴박한 상황에서 고종에게 달려간 이학균 부령은 일본인 폭도들의 궁궐포위 시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8일 새벽 3시경(앞서 현흥택 정령은 광화문에 일본군과 조선군 훈련대의 출현시간을 2시로 말했다. 그리고 이곳은 동북쪽 춘생문에 집결한 시간을 말하고 있다) 경복궁 동북쪽 춘생문에 사복을 입은 일본인 수명과 그 뒤에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 훈련대 200여 명이 일본인 교관 4~5명의 지휘를 받으며 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훈련대 대장 홍계훈 정령(1882년 임오군란 때도 왕후를 구출하였으며, 이날 밤에 전사했다)이 춘생문으로 급히 가서 그들에게 왜 이곳에 훈련대가 집합해 있느냐고 물었으나 대답이 없자, 홍계훈 정령은 즉시 해산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신은 우리의 상관이 아니고 일본인 교관이 상관이니 참견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홍계훈 정령은 그곳에서 조금 떨어져 담 저쪽에 서있는 나를 불러 춘생문 앞에 일본인들과 일본인 교관이 인솔한 훈련대가 집합해 있으나, 이런 늦은 밤에 소집된 이유도 말하지 않고 해산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홍계훈 정령과 나는 궁궐상황을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 광화문쪽 경비초소로 가서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특별한 이상이 없었다. 이때 경비병이 뛰어와 보고하기를 일본군 폭도 60여 명이 서쪽 담으로 침입하고 있으며, 그중 30명은 군복을 착용하고 나머지는 사복을 입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나는 부관(副官)에게 확인하라고 지시했더니 부관이 들어와 기왓장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보고했다.

4시 반경이었다. 나는 북쪽 작은 문(왕가가 거처하는 궁으로 들어가는 문)에 서서 유난히 밝은 달빛에 망원경으로 추성문 쪽에서 움직이는 약 12명의 사람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즉시 위급함을 알리기 위해 고종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위 증언서와는 달리 이학균 부령은 고종에게 급보(急報)를 하러 가는 길에 먼저 유럽인 경비원 숙소에 들러 다이 장군과 세레딘-사바틴에게 상황을 알리고 다음에 고종을 알현했다.

이학균 부령이 왕가에 도착했을 때는 고종이 벌써 외국인 접견실과 회랑으로 연결된 별채에 앉아계셨다. 그리고 주위에는 경호원이 분주히 내왕하며 고종을 호위하고 있었다.

“이학균:왕후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고종: 왕후는 안전한 곳에 피신해 있으니 염려 말고 안심하라. 그리고 경비병은 유혈사태를 예방할 모든 대책을 강구하라. 짐은 이미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궁궐 경비병에게 발포 명령을 내렸다.”

이상의 대담으로 미루어보아 고종은 이미 새벽 4시 반 전후로 궁궐이 소란함을 알고 있었으며 민왕후는 위험한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를 떠나 어떤 피신처에 은신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 궁궐 난입

세레딘-사바틴은 당시 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새벽 5시경에 춘생문에서 조선군 무리의 큰 구호소리와 함성이 들렸다. 사전에 행동을 모의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몇 분 후에 추성문 쪽에서 총성이 들리고, 잠시 후 담을 넘은 일본인 폭도들이 궁궐경비병에게 발포하자, 경비병은 무기와 군복상의를 벗어 던져버리고 초소를 떠나 어디론가 달아나버렸다. 추성문 쪽의 총성을 신호로 춘생문 쪽에서도 일본인 폭도들과 조선군 훈련대가 난입하기 시작했으며 광화문에서는 일본인폭도 5~6명이 사다리를 타고 담을 넘었다. 이들은 경비병에게 몇 발의 총을 발사해 궁궐경비병을 도주시키고, 일본인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 훈련대가 궁궐 안으로 쳐들어오도록 대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당시 경복궁 출입문은 여러 개가 있었으나 이날 밤에 폭도들은 남쪽의 광화문, 동북쪽의 춘생문, 서북쪽의 추성문 등 3개의 문으로 침입했다. 위에서 말한 상황은 경복궁 외곽 출입문으로 일본 폭도들이 난입한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왕가 내궁(內宮)의 방어와 관련해서 세레딘-사바틴이 다시 증언하고 있다.

“궁궐경비병은 총인원 1500명에 장교가 40명이었으나 5시10분경에 남아 있는 사병은 250~300명뿐이었다. 다이 장군은 제1방어선인 경복궁 외곽 문에서 후퇴해 남은 경비병을 겨우 집합시켜 제2방어선으로 북쪽 왕가의 출입문에 배치했다. 경비병은 왼쪽 길에 서서 방위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춘생문으로 난입한 일본인 폭도와 조선군 훈련대가 왕가로 출입하는 북쪽 작은문(이학균 부령이 수비한 춘생문에서 가까운 문) 틈으로 경비병을 향해 한번에 30~40발씩 3번 집중사격을 했다. 폭도들은 많은 경비병을 살해하려는 의도가 없는 듯 머리 위로 높이 총을 발사했다.

다이 장군과 나도 추성문을 통해 난입한 폭도들이 발사하는 총의 사격권 내에 들어 있었으나 나는 오른쪽 문(3개중 중간문), 다이 장군은 왼쪽의 신무문(神武門,추성문에서 가까운 문)의 담벽에 몸을 숨겨 무사했다.

다만 내 앞에서 궁궐경비병 한 사람이 총상을 입었다. 그러나 남아 있던 궁궐경비병들은 난입자들이 첫 집중사격을 한 뒤, 한 발도 응사하지 않고 총과 군복상의를 벗어던지고 어디론가 도주해 버렸다.”

이때의 상황을 이학균 부령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동북쪽 춘생문으로 침입한 일본인과 조선군 훈련대는 내가 안에 있는 북쪽 작은문까지 왔다. 문이 잠겨있는 것을 보고 일본인 폭도 몇 명이 담에 기어올라가 담 위에서 밑에 있는 궁궐경비병을 향해 발사하는 총성이 한밤의 적막을 찢고 울리자 경비병들은 다 도망쳐 버렸다. 그러자 수명의 일본인 폭도들이 월담하여 대문 앞에 대기하고 섰던 일당에게 문을 열어주어 폭도들은 왕가의 내궁 북쪽을 점령했다.

5~6명의 사복을 입은 일본인은 칼로 무장하고 고종과 그 가족이 거처하는 곤령합(坤寧閤)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몇 몇 남은 부하 병사들과 함께 이들을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일본인 폭도들에게 달려가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누군가가 나를 떠밀어 그만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학균 부령도 궁궐수비대가 무력하게 폭도들에게 저항 한번 못하고 총성에 놀라 도주한 사실을 자인했다.

춘생문 쪽에서 침입한 폭도들은 이학균 부령이 수비한 작은 문을, 추성문 쪽의 난입자들은 다이 장군과 세레딘-사바틴이 지키고 있던 대문 수비를 거의 같은 시간에 무너뜨렸다. 최후의 제2 방위선이 무너진 것이다.

세레딘-사바틴은 추성문쪽의 침입 상황을 중국 지부 러시아공관에서 쓴 증언서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난입자들은 추성문에서 두 방향으로 밀어닥쳤다. 한 무리는 다이 장군이 지키고 있는 문쪽으로 가고, 또 다른 무리는 내가 서있는 문으로 달려들었다. 폭도들은 다이 장군을 붙잡고 유럽인 경비원 숙소쪽으로 갔으며, 나를 잡은 일단의 폭도는 왕의 침전이 있는 곤령합과 왕후의 침전인 옥호루 쪽의 담 안으로 들어섰다. 막 유럽풍의 양옥(외국인 접견실)을 지날 무렵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렸다. 별안간 총소리를 듣고 놀란 환관(宦官), 벼슬아치, 궁노(宮奴), 폭도 등 300여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일시에 뒤로 밀어닥쳤다. 60~70보 가량 떠밀려가다가 왕가에까지(곤령합과 옥호루는 별채였으나 정원으로 연결되어 있다) 진입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목재로 건축한 어떤 작은 별채에 부딪쳤다. 나는 무리와 함께 밀려가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판자에 매달렸다. 떼를 지어 밀려오던 환관과 벼슬아치, 궁노들은 내 곁을 지나 정원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나만 혼자 그곳에 남게 되어 왕후의 처소에서 벌어진 만행을 목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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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효·전 모스크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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