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출발부터 이러한 관행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김대중 정부의 초대총리 지명자 김종필씨에 대한 국회의 인준 표결은 투표방식을 둘러싸고 여야간 몸싸움 끝에 투표함이 열리지 못한 채 봉(封)해지는 사태에 직면했다.
이러한 초유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각 당의 의석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96년 15대 총선 결과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전신)은 총 299석의 의석 중 157석, 국민회의(민주당의 전신)는 78석, 자민련은 45석의 의석을 얻었다. 19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의석 분포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인제 의원 등 일부 의원들이 신한국당을 이탈했다. 반면 이기택씨가 이끌던 작은 민주당과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의 제정구 의원 등 10여 명이 신한국당과 합당, 한나라당을 만듦으로서 이탈세력의 공백을 만회해 한나라당은 여전히 150석 이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이렇다할 의석의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연말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 뒤 이듬해 들어 의석분포에 상당한 변화가 발생한다. 공동여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각각 103석과 52석으로 대선 전보다 30여 석이 늘어나 과반수를 상회하게 되었다. 한나라당의 의석은 대폭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130석 이상을 가진 거대 야당으로 남아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비롯됐다.
소속의원들의 줄 이은 이탈로 한나라당은 초긴장 상태가 되었다. 한나라당은 즉각 야당파괴공작이라며 대여(對與)투쟁에 나섰다. 김대중 정부의 입장에서도 산적한 국가 현안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원내 과반수의 확보가 시급한 과제였을 것이다.
이러한 양측의 절박한 정치적 이해가 1998년 3월2일 김종필 총리 내정자에 대한 국회인준 표결을 공동여당이 강행하는 과정에서 전면적인 충돌로 표면화 한 것이다. 이때부터 김종필 총리 내정자는 5개월 이상 ‘서리’라는 꼬리를 달고 총리 노릇을 했다. 이로써 김총리 서리는 제1공화국에서의 3명의 총리(신성모, 백두진, 허정)를 제외하고 최장수 총리서리라는 기록을 세웠다.
총리인준을 둘러싼 여야간의 불신은 극에 달해서 정치는 실종되고 민생은 철저히 외면됐다. 8월17일 우여곡절 끝에 임명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해서 정식 총리가 됨으로써 김종필 총리는 명실상부한 여권의 2인자 자리를 굳혔다. 하지만 총리인준문제로 김대중 대통령이 입은 정치적 내상도 심각한 상태였다. 총리인준도 처리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국정의 안정적 운영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는 여권의 자탄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올 정도였다.
사실 당시의 국가적 상황은 매우 긴박했다. 나라는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 겨우 연명하고 있었고 실업자가 200만명에 육박하고 길거리에는 노숙자가 넘쳐나는 실정이었다. 여기에 노사 합의에 의한 구조조정과 각 분야의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 등 국가적 현안이 산적해 있었다. 정치권도 마지못해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회 차원의 뒷받침에 합의했지만 총리인준 문제를 둘러싼 대립과 충돌로 국회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김대중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자민련 몫의 김종필 총리 문제처리에 엄청난 정치적 에너지를 쏟아 부음으로써 국정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상당한 진통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