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훈(李宗勳)씨는 YS정권 시절인 1993년 3월부터 5년간 한국전력 사장을 지낸 사람이다. 한국전력 정규 공채 출신으로는 최초로 사장이 된 그는 1996년 의지를 갖고 은밀히 핵 재처리시설 도입을 추진했다.
그가 도입을 추진했던 재처리시설은 핵무기 제조용이 아니다. 한국의 열여섯 개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해, 다시 원자로에 넣는 MOX 연료(Mixed OXide Fuel·혼합 산화연료)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씨를 중심으로 한 한국전력 원자력인들의 노력은 IMF 경제위기와 DJ정권 출범 후 새로 한전사장이 된 장영식(張榮植)씨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씨는 어떤 이유로 핵 재처리시설을 도입하려고 했는가. 그리고 그의 노력은 어떤 이유로 좌절되었는가. 그 전말을 밝혀보기로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은 세계 핵주권을 장악하고 있는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핵은 미국의 동의없이 마음대로 움직이기 어렵다.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등 핵무기를 갖고 있는 4대 강국도 미국의 눈치를 봐가며 원자로를 수출한다. 한국 또한 미국의 이해없이는 제대로 된 원자력 정책을 펴기 어렵다.
한국은 원자력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덕분에 일찌감치 원자로를 도입했다. 6·25전쟁의 화약연기가 폴폴 날리던 1956년, 양유찬 주미대사는 미국 워싱턴에서 로버트슨 미국 국무차관보, 스트라우스 미국 원자력위원장과 함께 ‘원자력의 민간 이용에 관한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 정부간의 협력을 위한 협정(한미원자력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이 한국 원자력 산업을 싹 틔우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 협정에는 미국은 한국의 연구용 원자로 도입을 지원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62년 이에 따라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트리가마크 Ⅱ라는 시험용 원자로(250㎾)를 최초로 도입했다.
비슷한 시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도 미국과 원자력 협정을 맺었으니, 국가 수준으로 봐서 한국은 아주 일찍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맺었던 셈이다. 그리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인 1970년 한국은 최초의 상업용 원자로인 고리 1호기(60만㎾) 건설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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