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런 역사가 역설적으로 새로운 문물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계기를 만들었는데, 전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에릭슨은 전화기가 발명된 지 채 2년도 지나지 않아 재빠르게 전화기 사업에 뛰어들었고, 전화 발명가이자 그의 경쟁자인 벨보다 더 싼 가격에 전화기를 공급하면서 시장을 넓혀갔다. 스웨덴은 유럽의 변방이었지만, 이처럼 기민한 신기술 수용능력을 바탕으로 전화가 도입된 지 12년 만인 1888년에 전국적인 전화망 구축을 계획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에릭슨도 거대 통신기업의 면모를 갖췄다.
스웨덴은 내수시장이 협소했기 때문에 에릭슨은 1890년부터 본격적으로 글로벌 사업을 전개했다. 독일, 러시아 같은 주변국은 물론 영국, 미국, 남미 등에 전화기와 교환기를 판매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멀리 중국으로까지 시장을 확대했다. 그 무렵 에릭슨은 한국과도 인연을 맺었다. 1896년 에릭슨은 고종황제를 위해 궁내부에 최초로 교환기와 전화기를 공급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도 이 전화와 관련된 대목이 있다. 1896년 백범이 일본군 장교를 살해한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감옥에 수감됐을 때 고종이 인천 감리에게 전화를 걸어 감형을 명령, 목숨을 살려줬다는 것.
우리나라에는 아직 근대적인 기업의 씨앗조차 뿌려지지 않았던 시기에 에릭슨은 앞선 통신기술과 글로벌 사업전략을 통해 동양의 변방인 우리나라에까지 시장을 넓혔던 것이다. 1897년 에릭슨은 전체 매출 중 19%만을 스웨덴에서 올렸고, 나머지 65%는 다른 유럽 국가, 16%는 미주를 비롯한 기타지역에서 기록했을 정도다.
유·무선 아우른 경쟁력
에릭슨이라는 활동적이고 정력적인 기업을 통해 스웨덴의 정보통신산업도 점차 선진국 수준으로 다가갔다. 스웨덴은 1930년대만 해도 전화 보급률이 8%에 지나지 않았으나, 1950년대에는 23%로 상승, 미국 수준(27%)에 근접하는 통신 선진국으로 도약했다.
무선통신 부문에서도 스웨덴과 에릭슨은 콤비를 이루며 시장을 선도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이동통신은 전화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AT&T의 벨연구소(현재는 루슨트 산하)에서 처음으로 개념화했다. 그러나 무선통신은 산림으로 뒤덮인 광대한 국토를 가진 스웨덴에서 유선통신보다 더 적합한 통신수단이다. 스웨덴은 임업의 나라다. 숲에서 벌채된 나무는 강을 따라서 뗏목으로 운반하는데, 이 과정에서 목재회사들은 벌채목의 운송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이런 사정이 자연스럽게 무선통신 보급을 촉진했다.
그 결과 스웨덴에선 현대적인 의미의 이동통신이 보급되기 10년 전인 1970년대 초반에 거의 모든 산림지역을 커버하는 무선 네트워크가 구축됐고, 약 10만대의 차량에 무선장비가 장착됐다. 우리가 CDMA 상용화 과정에서 경험한 것처럼 자국 시장에서 기술과 제품혁신이 활발하게 이뤄지면 그 분야 기업의 경쟁력도 높아진다. 에릭슨도 스웨덴 내수 시장의 넓고 탄탄한 무선통신 활용기반을 토대로 1981년 1세대 아날로그 휴대전화(자동차 전화)를 상용화하면서 이동통신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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