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중국 경제의 힘 <上>

‘13억의 견인차’ 상아탑의 경제학자

  • 강현구 중국문제전문가·경제학박사 191710@hanmail.net

    입력2004-09-03 15: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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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신비한 나라다. 세계 각국은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고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은 중국과 수교한 지 10년이나 됐지만 중국의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하기는커녕 접근하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어색하다. 중국은 우리가 가장 큰 무역수지 흑자를 내는 교역 파트너다. 그러나 전문가들조차 중국의 세밀한 사항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기 마련이다.

    하지만 좀더 살펴보면 우리는 중국에 관해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많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수천년 교류의 역사가 쌓아올린 경험의 힘은 차치하더라도 최근 10여 년 간의 급속한 한·중관계 발전에는 남 몰래 땀 흘리는 일꾼들의 힘이 숨어 있다. 문제는 이러한 경험의 역량이 체계화되어 하나로 집중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정부, 연구기관, 개인과 기업 모두가 중국에 대한 경험을 낭비하고 있다고 표현한다면 너무 지나칠까? 오히려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은 중국전문가와 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 문제인지도 모른다. 이 글은 중국 경제, 그 힘의 본질에 체계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 열쇠는 다음 4가지 키워드에 있다.

    중국 경제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가장 주효한 방법은 그 시기의 슬로건을 이해하는 것이다. 슬로건은 치열한 논쟁의 산물이다. 슬로건에는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애잔함이 동시에 나타난다. 슬로건을 장악한 자가 곧 중국의 승자이고 그들의 정책이 바로 슬로건을 통해 나타난다.

    승리한 지도자 뒤에는 언제나 그를 뒷받침하는 참모 그룹이 있다. 실제로 승리의 과실은 모두 지도자에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나, 오히려 승리의 진정한 전유물은 이들에게 돌아간다. 이들에 대한 계통적 파악이 중국 경제의 흐름을 파악하는 핵심이다.

    언뜻 보면 중국은 슬로건을 매개로 한 정책 이슈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처절한 현실의 요구가 숨어 있다. 정책 이슈에서 현실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중국 경제를 이해하는 기본이다.



    중국은 투쟁보다 담합을 선호하는 나라다. 치열한 정치투쟁의 전면에 논쟁이 있고 그 이면에는 담합이 있다. 이 담합을 주도하는 것이 바로 중국 경제계의 인맥과 학맥이다. 이것을 그들 말로 ‘관시(關係)’라고 한다. 관시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는다. 오로지 관시 속에서만 파악이 가능하다는 교훈을 잊지 말자.

    지금 중국 경제계를 좌우하는 정책 이슈는 장쩌민의 ‘5·31 연설’이다. 장쩌민이 중국사회과학원에서 당과 정부 관료들을 모아놓고 ‘2가지 방향의 창조적 혁신’과 이론상의 창조적 혁신을 강조한 이 연설은 공식적으로 ‘3개대표(三個代表)’를 내용으로 한 7·1 연설의 뒤를 잇는 공식 연설이다.

    이 연설에서 장쩌민은 당과 정부 관료들에게 경제학 공부를 할 것을 요구한다. 구체적으로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케인스 이론을 공부하라고 일갈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5·31 강화의 주요 내용은 이른바 2+1 창신, 창조적 혁신이다. 이중 2에 해당하는 ‘양개창신(兩個創新 : 두 가지 방향의 창조적 혁신)’은 이미 1999년 말에 제기된 것으로 ‘제도창신’과 ‘기술창신’을 의미한다. 중국이 당면한 현실을 능동적으로 타개하기 위해선 제도와 기술에서 창조적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이 ‘양개창신’의 요지다.

    ‘제도창신’의 핵심은 중국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정부가 먼저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과거처럼 인민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기구화해 적극적으로 시장상황에 대응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인민의 최대 이익을 대변한다는 ‘3개대표’와 맞물리면서 중국에 정부기구의 통폐합과 정부 직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바람을 몰고 왔다. 최근 대대적으로 개선되었다고 평가하는 중국 정부의 대민·대외 서비스 기능이 그 성과로 뽑힌다.

    ‘기술창신’은 기술의 근본적인 진보 없이 더 이상의 성장은 불가능하다는 중국 경제계의 뼈아픈 반성의 산물이다. 더 이상 아시아적인 양적 성장에 기댈 게 아니라 기술의 진보를 도모하자는 이론이다. 최근 중국의 기술 부문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나 장쩌민을 위시 한 첨단산업과 굴뚝산업 결합의 중요성에 대한 지속적인 지적 등이 이 이론의 결과다. 특히 중국 경제학계는 이 이론을 뒷받침할 서구이론으로 ‘내적성장이론’을 지목하며 이 부분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위해서는 중국 경제학계의 이론이 어떻게 중국 현실에 반영되는가, 정확히 이야기하면 중국 경제정책이 어떤 메커니즘을 거쳐 결정되는가에 대해 대략적이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쉽게 이해하듯이, 중국은 당·정 이중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공산당의 영도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나라이며, 해방군조차도 중국 정부의 물리력이 아닌 당의 군대다. 이를 두고 혹자는 중국이 당 우위의 국가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중국의 권력구조가 이중적이듯이 중국의 정책결정 과정도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당은 당 나름대로 정책 수렴 및 결정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고, 정을 대표하는 국무원은 국무원 나름대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당 쪽 이론가와 정 쪽 이론가의 구분이 나타난다. 물론 이들간에 교류와 소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중국의 당과 정이 그렇듯이 인적으로 교차되어 통일성을 확보한다.

    하지만 각각의 입장과 임무에서는 미묘한 차이를 갖는다. 중국의 역사에서 당·정 리더들 간에 미묘한 갈등이 있어 왔듯이 이들의 싱크탱크인 이론가들 사이에 경쟁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경제계에 이런 구조를 파생시킨 것이 중국의 본원적 권력구조라면 이것을 공고화시킨 이들이 바로 쑨예팡과 쉐무차오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이들이 경제학자로 출발했던 시기는 당·정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해방 후에도 마찬가지여서 이들 모두 관료로 재직했다.

    하지만 쑨예팡에게 불어닥친 고난의 세월은 그를 관료에서 학계로 이동시켰다. 실무를 담당하는 관료에서 ‘중국과학원 경제연구소’ 소장으로 자리매김 하게 한 것이다. 이것을 좌천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겠지만 어쨌든 일선에서 물러난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자리이동은 쑨예팡에게 두 가지 기회를 제공했다. 하나는 그가 중국경제학계 싱크탱크의 조사(祖師)로 설 수 있는 기회였고, 또 하나는 이 자리가 당시 중국 경제의 최고 지휘부인 국가계획위원회 당 조직의 구성원을 겸직하는 자리였다는 점. 여기서 쑨예팡은 오랜 정 쪽 관료의 길에서 한발 벗어나 당 쪽 이론가로서 기초를 닦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이후 중국과학원에서 독립한 중국사회과학원의 중추 연구소인 경제연구소의 기초를 닦았을 뿐 아니라, 산하에 공업조·농업조·재무조·통계조·세계경제연구조 등을 설치함으로써 현재 중국사회과학원의 여러 경제 방연구소들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했다.

    이런 구조개혁과 더불어 그는 활발한 학술 토론회를 조직, 직접 주재함으로써 당시 중국경제계에 실사구시의 학풍을 불어넣는 주역이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많은 신진학자를 발굴하고 그들의 소련 유학을 주선하여 중국과학원 경제연구소를 중국 경제학의 메카로 만들어놓는다.

    이러한 토론회의 결과물은 곧바로 문서로 만들어져 쑨예팡을 통해 당 조직에 보고되었는데, 이는 당 조직내의 폐쇄적인 논의구조에 익숙해 있던 당시에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국무원 산하기관인 중국과학원 경제연구소는 당의 비공식적 싱크탱크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이러한 메커니즘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쑨예팡이 당 쪽의 정책 수렴 메커니즘의 기초를 만들고 있을 때 쉐무차오는 영향력 있는 관료이자 정 쪽 이론가로서의 입지를 넓혀가고 있었다. 당시 중국 경제 운용의 핵심기관인 국가통계국과 국가계획위원회를 거치면서 그는 국민경제 운용에서 평형의 문제에 근거한 여러 현실적인 고민들을 구체화시켜 현실적 개혁 방안을 도출해 나가는 기회를 갖는다.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듯한 이들 두 형제가 결국은 중국 사회주의의 문제점과 그 극복 방향에 대해, 이론적 근거와 현실적 경험을 통해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의 사상적 접점은 그들의 사상을 현실에서 실현시킨 덩샤오핑이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만나게 됨으로써 마침내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사상 초유의 실험으로 나가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는 이미 그들 두 사람의 시대가 아니었다. 이 두 탁월한 경제학자는 자신들의 꿈을 후세대에게 물려주고, 드디어 ‘8대 신위’라는 뛰어난 역량의 경제학자들이 군웅할거하는 중국 경제학계의 백가쟁명 시대를 열었다.

    덩샤오핑 시대의 완성을 향한 이들의 움직임, 논쟁과 갈등, 담합과 배신의 이야기는 다음 호에서 다룬다.

    이 두 가지 방면의 창조적 혁신에 대한 중간평가 격으로 나온 것이 5·31 연설이다. 연설 대상이 당(黨)과 정(政)의 경제관료라는 점을 보면 어떤 내용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창신을 이끌어야 할 관료들이 아직도 관료주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무능하다.”

    중국 지도부의 평가는 아직 미흡하다는 것이 이번 연설의 핵심이다. 관료들이 먼저 공부해야 한다는 점을 장쩌민 이 소리 높여 강조한 것은 이러한 지도부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정책 이슈만 놓고 보면 중국은 지금 호경기를 누리면서 한가하게 집안 단속에 열중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니다. 이건 단지 슬로건일 뿐이다. 그 이면에는 처절한 현실의 흐름과 좀더 복잡한 논쟁이 숨어있다. 이 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작년 중국을 달구었던 ‘확대 재정정책’에 관한 논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01년 12월25일 중국사회과학원이 2002년 중국 경제의 흐름을 한눈에 보여줄 의미 있는 보고회를 개최했다. 이 보고회는 중국사회과학원 내 ‘중국경제 형세분석과 예측’ 프로젝트팀의 연구결과를 공유하는 자리였다. 프로젝트팀의 실무 책임자인 원내 경제연구소 소장 리우수청(劉樹成), 수량경제연구소 소장 왕퉁싼(汪同三) 두 교수가 발표를 맡았다.

    참고로 중국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는 당 정책과제를 주로 맡는 경제정책 입안의 핵심기관으로 꼽힌다. 수량경제연구소도 과거 주룽지(朱鎔基) 총리가 연구원으로 있던 곳이다. 어쨌든 시기적으로 중앙경제공작회의에서 2001년 경제운영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한 덕분인지 보고회는 화기애애한 가운데 시작되었다.

    먼저 발표를 진행한 리우교수는 보고회 직전 하버드대에서 열린 중국사회과학원·하버드 연례 세미나의 분위기를 소개하며 중국 경제가 일화독수(一花獨秀 : 중국 홀로 잘 나가고 있다는 의미)하고 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리우교수의 발표에 이어 왕퉁싼 교수의 발표가 시작되자 분위기는 반전했다. 왕교수는 중국 경제가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두 가지 정책-중국 경제정책의 핵심인 ‘적극적 재정정책’과 ‘정부주도투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 적극적 재정정책과 정부주도 투자, 이 두 가지는 중국 경제의 성장 예상치와 더불어 현재 중국 경제학계에서 관점이 엇갈리는 가장 민감한 부분이다. 이날 왕교수의 지적은 중국사회과학원 내 몇몇 소장학자들과 지방의 일부 경제학자들이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비판해 온 목소리를 공개적으로 대변한 것이었다.

    중국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정책에 대한 대내외의 비판론을 종합해보면 크게 세 가지다.

    먼저 중국의 적극적 재정정책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에 대응한 한시적인 정책인데 지금까지 계속해온 것 자체가 비정상적이다. 적극적 재정정책은 다음 네 가지 위험에 직면해 있다. 첫째, 적극적 재정정책의 성장 기여도가 나날이 떨어지고 있다. 둘째, 국채 투자의 효과(중국어로 효익, 즉 효과와 수익을 동시에 가리킴)가 반감된다. 셋째, 재정 부담이 지속적으로 상승한다. 넷째, 채권상환 부담이 높아지고 있다. 중국의 재정 상황을 보면 부채 의존도가 60%나 되어 선진국의 10%대는 물론 개발도상국 평균인 25%보다 월등히 높아 이들의 우려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다음은 정부주도 투자가 지닌 위험성이다. 왕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현재 중국 정부의 성장은 내수와 투자가 주도하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정부주도 투자는 계속 증가하는 반면 민간주도 투자 비중이 줄어들고 증가율 자체도 하락하고 있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중국 경제가 기형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의미다.

    끝으로 이들은 앞에서의 주장을 근거로 중국 경제의 성장 예상치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중국 경제정책 입안자나 집행자들의 시각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현실과 동떨어진 부분이 적지 않다.

    중국 경제에 대한 이런 상반된 시각은 ‘적극적 재정정책’ 부분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이날 보고회에서 왕교수가 투자과열이라고 지적하면서 그 근거로 내세운 것이 1950년대 말 류궈광(劉國光), 둥푸렁(董輔仍) 두 원로교수가 중국 경제의 적정 투자비율은 25%라고 한 연구결과다. 왕교수는 2000년 현재 50%에 달하는 투자율을 지적하면서 이는 1950~60년대 15%대의 집적률(투자율에 상응하는 사회주의의 개념)은 물론 8차 5개년 계획기간의 30%보다 월등히 높은 수준이라며 투자와 소비간의 심각한 불균형을 우려했다.

    사실 이 문제는 적극적 재정정책을 쓸 때부터 계속된 고민이다. 1997년 이후 중국의 투자율이 점점 높아지자 주룽지 총리는 한때 위기를 느꼈다고 한다. 이때 자문에 응한 중국사회과학원의 한 교수가 류궈광, 둥푸렁 두 원로교수의 연구결과를 인용하면서 당시 소비수준과 지금의 소비수준은 천지 차이라는 점을 들어 투자와 소비간의 연관관계에 대해 설명하자, 주총리는 전적으로 동의했고 투자 확대 쪽으로 신념을 굳혔다고 한다. 똑같은 자료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다.

    정부주도 투자에 대한 관점에서도 양측의 시각차는 확연히 드러난다. 투자가 정부주도로 편중되어 있고 민간투자가 저조하다는 지적과 달리, 주류의 시각은 비정부 부문의 투자가 활성화되고 있다는 데 일치하고 있다. 중국 국가발전계획위원회 경제연구소 소장인 천둥치(陳東琪) 교수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고질적인 유효수요 부족 상태에서 중국의 고정자산 투자 증가율이 아시아 금융위기 때의 14%대와 비교해 1999년 5.1%, 2000년 9.3%로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비정부 부문 투자의 증가율이 2001년 1월에서 10월 사이 17.4%로, 2000년의 9.3% 비해 현저히 높아졌음을 예로 들었다.

    이런 정부의 공식입장은 왕교수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중국의 각 투자 부문의 형태에 대한 시각차에서 발생한 것이다. 천교수가 제시한 비정부 부문과 왕교수가 2001년 7.5% 증가했다고 주장하는 비국유 부문과의 차이인 것이다.

    다음으로 중국의 올해 성장 예상치에 대한 논쟁을 살펴보자. 이 논쟁은 먼저 천교수가 중국 경제가 확대 내수정책의 실시로 외부의 장애를 극복하며 1993~99년 7.1%의 성장률로 저점을 통과한 뒤 2000년 8%, 2001년 7.3%의 W형 파동을 그리고 있다며 2002년 성장 예상치로 7.5%를 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왕젠(王建) 국가발전계획위원회 거시경제연구원 부주임은 선진국 경기가 바닥권에 있으며 중국 역시 하향곡선을 그릴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상반된 의견을 제시했다.

    사실 이런 의견차는 늘 있었다. 2001년 경제성장 예상치만 봐도 중국 경제가 V자를 그리며 8~9% 성장할 것이란 낙관론과, 7.5~8%의 안정적 성장을 할 것이라는 신중한 낙관론, 그리고 중국 경제의 회생력 부족으로 7~7.5% 성장할 것이라는 상대적 비관론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작년 중국 경제는 7.3% 성장에 그쳤지만 그것이 상대적 비관론의 주장처럼 회생력 부족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렇게 중국 내 경제전망이 투자와 소비 관계를 중심으로 한 적극적 재정정책을 축으로 엇갈리고 있는 데 반해, 외부의 시각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에 쏠려 있다. 특히 요사이 유행하고 있는 중국 경제에 대한 비관적인 관점의 책들은 이 부분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다.

    중국 경제학계도 중국이 안고 있는 세 가지 구조적 문제에 관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먼저 중국 경제의 지속적인 안정성장에 대한 문제다. 중국 경제는 1996년 연착륙 성공 이후 7~8%대의 안정적인 성장을 계속하고 있지만 이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이 문제는 중국 정부로 하여금 적극적 재정정책을 유지할 수밖에 없게 하는 근본 원인이지만 비판의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

    중국의 고민은 ‘자산가치’ 유지

    중국 정부도 지금 중국 경제에 위험요소가 산재해 있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인식은 중국 바깥의 인식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외부에서는 주로 중국의 재정적자, 국유기업 부실, 실업문제 등을 우려하고 있으나 중국 정부가 고민하는 부분은 자산가치의 문제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국유기업이나 실업의 문제는 당장 중국 정부가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게 중국 정부의 현실 인식이다. 재정적자 문제도 인식에 차이가 있다.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줄인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낼 뿐 이라는 게 중국 정부의 솔직한 입장이다. 지금 중국 정부가 걱정하는 것은 ‘자산가치’로, 전체 자산을 올바르게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역설적으로 홍콩 반환에서 시작된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덩이가 굴러들어 온다고 생각했다. 홍콩반환은 실제로 중국에게 큰 행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상황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지금 홍콩의 경제상황은 최악이다. 문제는 홍콩의 불경기가 곧바로 중국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것도 단순히 중국의 경기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자산가치’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중국은 외자를 매개로 성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외자의 45% 이상이 홍콩 자본이다. 홍콩의 불경기는 곧바로 대중국 투자에 영향을 주고, 홍콩의 몰락은 곧 중국의 몰락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중국은 홍콩을 살리고, 중국의 자산가치를 보호해 외자의 안정적인 도입을 어떻게 유지하느냐로 고민하고 있다. 사소한 수입과 지출에 신경을 쓰다가 집안이 거덜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중국 지도부 내에 팽배하다.

    문제해결의 첩경은 중국 인민폐의 절상이다. 인민폐의 가치가 높아지면 중국의 대외 자산가치가 상승할 뿐 아니라 홍콩 경제의 주름을 펴주는 효과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수출에 목을 메는 현실에서 인민폐 절상은 내부의 극심한 반발을 일으킬 수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다.

    인민폐 절상은 중국이 독자적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홍콩과의 협의가 필수적이다. 합리적 해결을 위해 중국 정부는 2001년 상반기 중국사회과학원 프로젝트팀을 홍콩으로 파견해 6개월 동안 연구를 진행했다.

    인민폐 절상 논란

    이 팀은 공산당 쪽 라인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직접 경제를 운용하는 정부 쪽에서 인민폐 절상에 흔쾌히 동의할 리 없기 때문에 당 쪽 싱크탱크를 동원한 것이다. 애당초 중국 지도부는 2001년 하반기에 인민폐를 조정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작년 발생한 미국의 9·11테러사태 때문이었다.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와 곧이은 달러화의 약세는 중국 정부의 선택의 폭을 좁혔다. 그러나 중국으로서는 인민폐 절상이 시급한 과제다. 이런 객관적 상황이 중국 주류로 하여금 팽팽한 논쟁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드는 원인이다.

    다시 정리하면 ‘양개창신’은 중국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정책과제이며, 그것의 진행과정은 정부 직능의 변화와 기술혁신의 기반 마련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상존하는 문제의 산발적인 해결이 아닌 자산가치의 안정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자산가치 안정을 위해선 인민폐의 조정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수출에 치중하는 기업과 관료조직의 반대가 예상된다.

    이에 장쩌민은 관료들에게 ‘이론창신’을 강조하며 공부해라, 더 크게 보라고 하며 반대의 여지를 미리 없애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곧 정책 반대세력에 대한 정비작업과도 일치한다. 이를 위해 중국 경제계의 주류들이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주류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일찌감치 중국 경제의 이슈를 ‘확대 재정정책’으로 몰고 나감으로써 중국 정부의 위상을 약화시키려 하고 있다. 이들은 좀더 급격한 시장경제를 꿈꾸는 집단들이다. 이들에 대한 주류의 답은 ‘3개대표’‘양개창신’이다. 중국 경제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경제학계의 복잡한 지형은 이미 개혁·개방 전에 그 맹아가 형성되어 개혁·개방을 거치며 남순강화를 기점으로 체제개혁 모델을 둘러싼 7개 학파로 자리잡는다. 이들 학파는 스승을 중심으로 몇 대째 내려온 학파도 있고, 몇몇의 뜻 맞는 사람들이 연대한 소장학자 그룹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미 동일한 경향성을 가진 이들이 계속 제자 배출을 통해서 자기 재생산을 한다는 것이다. 학파의 정책은 바뀔 수 있어도 이들의 관계는 지속될 것이다. 이들 학파의 구성원 중에는 학계나 정부의 여러 연구소에서 중국의 경제정책을 직접적으로 입안하는 사람, 관계에서 정책을 집행하는 사람, 기업인 등 다양한 유형이 존재한다. 이들이 현재 중국 경제계를 이끄는 중심세력이라는 데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이해, 특히 정책적 입장과 그 역학관계에 대한 이해는 중국 경제에 접근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일 것이다.

    중국의 경제학계 역시 보수적인 면과 개방적인 부분이 혼재돼 있다. 이것은 개혁·개방이라는 역사적 조건이 산출해낸 중국적인 모습이다. 우선 중국 경제학계의 보수적인 성향은 여전히 생존해 있는 원로들에게 그 일차적인 원인이 있다. 중국의 정치지도자들을 생각해보면 쉽게 수긍할 수 있듯이, 지식분자라 불리는 중국 인텔리들은 장수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항일전쟁의 격변기를 헤쳐 나오면서 형성된 그들의 정체성이 아직 살아있다는 걸 의미한다.

    지금의 중국 경제학계는 이들 원로들을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이들 원로들을 정점으로 모든 경제학계가 학연으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중국 경제학계 원로들의 지형을 알기 위해선 먼저 쑨예팡(孫冶方·1908~83)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보아야 한다. 쑨예팡은 중국 당대의 탁월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며 중국 사회주의 경제체제 개혁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이같은 평가는 덩샤오핑에 버금가는 헌사다.

    하지만 중국 경제학계에서 그의 위치는 이런 거창한 헌사만으로 부족하다. 그는 중국 경제개혁의 알파요 오메가다. 개혁·개방 이전은 물론이고, 해방 전에도 그는 중국의 가장 유력한 경제학자였으며, 누구보다 먼저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한 사고를 내놓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돋보이게 하는 건 그가 배출한 제자들이다. 그는 중국 경제의 중추기구인 중국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의 초기 멤버로서 이른바 쑨예팡의 8대 신위라 불리는 걸출한 경제학자들을 배출시켰다. 이들 8명의 경제학자들은 지금 중국 경제학계의 살아있는 신화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당연히 이들은 뒤에 언급할 중국 경제학의 7대 조류의 핵심인물들이다.

    쑨예팡의 본명은 쉐어궈(薛켍果)이고 자는 면즈(勉之)나 1937년 이후 당내에서는 쑹량(宋亮)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장쑤(江蘇)성 우시(無錫)현의 회사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925년 소련이 중국혁명의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건립한 중산(中山)대학에서 공부한 뒤, 이 대학과 역시 소련이 동아시아의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동방노동자대학에서 정치경제학 강의와 통역을 담당했다.

    1930년 귀국한 후 ‘중국농촌경제연구회’를 조직했으며 이 조직의 기관지인 ‘중국농촌’의 편집을 담당했다. 해방 후에는 ‘상해 군사관제위원회’의 중공업처 처장, 국가통계국 부국장, 중국과학원 경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전국 5차 정치협상회의 의원과 중국공산당 제12기 대회 대표, 그리고 덩샤오핑이 당 원로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이같은 약력을 보면 평탄한 인생을 산 것 같지만, 쑨예팡의 삶은 도전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는 평생을 권력에 안주하지 않고 권력의 금기와 투쟁해왔고 그 결과 고난의 생을 살았다.

    그는 중국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다 1931년 첫 체포·구금된 것을 시작으로 문화혁명 기간에는 ‘중국 최대의 수정주의자’라는 공격을 받으며 7년을 차디찬 감방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가 격동의 시대에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 긴 시간을 보내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국가 통계국의 부국장으로 있던 1956년 소련 시찰에서 비롯되었다. 그해 7, 8월 소련을 시찰하던 중, 그는 중국 경제관리 체제와 정책에 중대한 폐단이 있음을 도출해냈다. 그는 이 시찰의 경험을 다음해 11월 스탈린의 가치법칙과 국민경제 계획관리 이론에 대한 비평을 중심으로 문서화해 정식으로 개혁 건의를 하는데, 결국 이 건의와 이를 체계화한 ‘사회주의 경제론’이 문제가 되어 오랜 고난의 길로 들어선다.

    쑨예팡의 경제사상은 크게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해방 전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에 심취해 있던 시기, 다음 1950~60년대 사회주의 경제이론의 신 관점과 신체계를 도출해내던 시기, 끝으로 문화대혁명 말기와 개혁·개방 초기 그가 간암으로 투병하면서도 인생의 마지막 정열을 쏟아내던 시기다.

    먼저 그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보급과 선전에 열중해 있던 1930~40년대 그의 사상 조류는 당내 사상논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정치경제학의 연구대상이 사회적 생산관계이지 생산력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 눈길을 끌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적 생산관계의 연구 과정이 생산력 연구와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인 연구 대상은 사회적 생산관계라는 것이다. 이는 당시 중국의 사회발전 단계가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이며, 이것의 배후에는 국제 재정자본의 통치와 전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발전과 양자간 결합이 있다는 이론과 더불어 해방 전 그의 핵심 이론을 형성하게 된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당시 중국공산당 내에 팽배해 있던 급좌 경향, 혹은 급진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이 숨어 있다. 이는 1950~60년대 그의 ‘스탈린식 사회주의 모델’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어 그만의 독특한 사회주의 이론을 형성하는 원천이 된다.

    또 하나의 거목 쉐무차오

    지금 중국 경제이론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당사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뚜렷이 대비되는 인물이 쑨예팡 과 쉐무차오(薛暮橋)다. 이들은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핵심인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상당히 다른 길을 걸어왔다.

    재미있는 점은 이들이 한 고향에서 태어나고 자랐을 뿐만 아니라 4촌형제라는 것이다. 게다가 해방 전에는 같이 활동했다. 하지만 해방 후 중국 사회의 혼란은 4촌형제이자 유력한 두 경제학자가 서로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만든다. 뒤에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쑨예팡이 죽기 직전 쉐무차오가 그에게 병 문안을 가 화해하기 전까지 수십년 세월동안 이들 형제는 절연으로 일관한다.

    쉐무차오에 대한 중국의 공식 평가는 ‘중국 저명 경제학자, 중국 제1세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걸출한 대표 중 하나’다. 공식 평가에서 쉐무차오가 쑨예팡에 비해 떨어지는 이유는 아무래도 개혁·개방 전 그가 양지에 있었다는 점과, 쑨예팡이 걸출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했다는 데 에 있다. 하지만 중국 경제학에서 그의 위상은 결코 쑨예팡에 뒤지지 않는다. 그는 실제로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의 핵심 주창자일 뿐 아니라, 현재 중국 경제의 핵심기조인 ‘거시조절’ 이론의 중요한 기초자다.

    그의 본명은 설우림으로 1904년 장쑤성 우시현에서 태어났다. 1930년대 쑨예팡과 더불어 ‘중국 농촌경제 연구회’의 이사를 지내며 ‘중국농촌’이란 잡지의 주편(편집장)을 담당했다. 이후 산둥해방구성정부의 비서장 겸 실업청 청장, 화베이 재정사무처의 부주임 및 중앙 재정부 비서장을 역임했다. 해방 후 그는 정무원 재정위원회 비서장, 국가계획위원회의 위원이자 부주임 겸 통계국 국장, 전국 물가위원회 주임을 역임했다. 이른바 핵심요직을 두루 거치며 중국경제계를 지켜온 산 증인이다. 최근엔 중국 공산당 제11차 3기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이후, 국무원 경제체제개혁 사무실 고문과 국무원 발전연구센터의 총간사와 고문까지 지냈다.

    쉐무차오는 개혁·개방 전에 비교적 안정적인 지위에 있었으나 그 시대의 중국인이면 누구나 그렇듯 그도 편안한 세월만 보낸 것은 아니다. 그는 1927년 국민당에 체포되어 3년 반의 세월을 육군감옥에서 보내게 되는데 이때 같이 잡혀 온 사람 중에 ‘중국공산당 저장성 위원회’ 서기인 장치우런이 있었다. 쉐무차오는 이를 계기로 자신의 학문적 체계를 형성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두고 지인들은 그가 감옥대학을 졸업했다고 말한다.

    쉐무차오의 경제이론은 크게 6개 방면에서 독특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 특히 그가 1979년 주편한 ‘사회주의 경제의 이론 문제’는 중국 내외로 700만부가 나간 걸작이며, 중국 개혁·개방의 이론적 틀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참고로 이야기하면 이 책은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10권의 책 중 수위에 올라있다.

    소련 경제의 실패를 넘어

    쑨예팡과 쉐무차오의 이론은 그 체계에서나 주요내용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이들은 항일전쟁이라는 동일한 역사적 조건에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을 터전으로 성장했지만, 해방 후 신중국 건설과정에서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결국 이런 차이는 그들 4촌형제를 기나긴 절연의 길로 들어서게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화해하고, 다시 개혁·개방이라는 동일한 인식의 출발선에 있게 한 1980년까지 그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는 그들의 제자, 후배들에게 훌륭한 논쟁거리를 제시함으로써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선의의 경쟁을 벌일 수 있는 토대로 작용하게 된다. 이렇게 쑨예팡과 쉐무차오가 기초를 제공한 중국의 경제개혁은 이른바 쑨예팡의 8대 신위라 불리는 지금 중국경제의 원로들에게 직접 계승된다. 이들은 이 두 거장이 내세운 이론들의 통일점과 분리점 사이에서 교묘하게 작용하며 자신들만의 고유한 이론체계, 그리하여 중국적 특색을 갖는 경제이론의 완성을 추구하게 된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왜 쑨예팡의 8대 신위가 쑨예팡 을 일방적으로 지지하지 않고 그이 라이벌이라고도 할 수 있는 쉐무차오와의 사이에서 이론적 고민을 해야 하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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