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불량 에이전트’가 태극전사 발목 잡는다

한국축구 스포츠마케팅은 D학점

  • 전용준 스포츠투데이 기자 toto@sportstoday.co.kr

    입력2004-09-08 15: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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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열기가 두 달이 넘도록 가시지 않고 있다. 연일 관중 신기록을 기록중인 K리그의 폭발적인 인기, 월드컵을 통해 탄생한 축구 스타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화제의 중심이 되고있다. 하지만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했던가. 4강에 진출하며 마치 대표팀의 모든 선수들이 유럽의 빅리그로 진출할 것처럼 떠들어대던 신바람과 지금의 현실은 판이하게 다르다.

    이을용이 유럽리그 중에서도 가장 거칠고 열악하다고 소문난 터키리그에 둥지를 틀었고, 차두리도 독일 분데스리가 레버쿠젠과 계약 후 올시즌 1부로 올라온 약체 빌레펠트로 임대되었다. 그나마 송종국 정도가 사정이 나은 편. 송종국의 소속팀 부산아이콘스는 8월12일 “네덜란드 페예노르트 구단과 이적료 400만달러에 완전 이적을 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안정환, 이영표, 이천수, 유상철 등 나머지 선수들의 유럽진출과 재이적은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은 채 꼬여만 가고 있다. 유럽리그 시작은 대략 8, 9월, 이미 때를 지났다는 소리가 높다.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많은 전문가들은 한국 선수들의 해외진출이 좌절되는 상황에 대해 여러 원인을 지적한다. 한국 에이전트들의 능력 부재와 아시아 출신의 한계, 소속 구단들의 무성의와 자기 보신주의 등등…. 하지만 그중에도 가장 눈총을 받는 부분이 바로 부실한 국내의 선수 에이전트다. 이들의 무능력과 여기에 잇따르는 도덕성 부재, 안일한 구단과 선수들의 무지 등이 뒤섞여 곧바로 갈 수 있는 유럽 진출의 길이 여러 가닥으로 꼬이고 있다.

    매니저사, 위임장 남발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안정환. 2000년 이탈리아 페루자에 진출한 그는 그간 두 번의 임대와 계약연장 등의 협상을 거치며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결국 월드컵 16강전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골든골을 터뜨린 대가로 이탈리아 페루자로부터 “입단 당시 샌드위치 하나 살 돈이 없는 길 잃은 양이었다”는 폭언마저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미로처럼 얽힌 계약관계 때문에 변변한 저항 한번 제대로 못했다. 결국 안정환은 영국이 아닌 적들로 가득한 페루자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상한 모양새를 보이고 말았다. 물론 안정환이 두 시즌 동안 이탈리아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해 월드컵 전에 이적할 팀을 찾지 못한 점이 아쉽기도 하다. 그러나 월드컵 이후 폭등한 인기를 바탕으로 확실한 구단 하나 섭외하지 못한 에이전트의 로비력과 섭외력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안정환 본인의 문제도 끼어있다. 이미 계약한 매니저사가 있음에도 확실한 대안이 마련되지 않자 여기에 불안을 느껴 월드컵 직전 다른 에이전트에게 위임장을 써주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 결과 유럽 구단, 특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구단에 안정환의 위임장이 집중적으로 남발되었고 접촉 구단들은 모두 “어떤 대리인이 진짜 대리인인지 가려지기 전에는 협상에 들어갈 수 없다”며 전격적으로 협상을 중단했다. 위임장을 받은 한국의 에이전트들이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유럽의 현지 에이전트에게 위임장을 다시 넘기는 과정에서 ‘하청위임장’이 양산된 것이다.

    이처럼 협상 당사자가 혼란을 겪게 되면 선수의 몸값은 낮아지고 협상 파트너는 입맛에 따라 많은 부분을 얻어낼 수 있다. 결국 페루자와 안정환의 매니저사는 난마처럼 얽힌 협상을 풀기 위해 ‘창구 단일화’라는 방안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모든 물음은 결국 돈으로 귀결됐다.

    안정환에게 2년간 400만달러(약 48억원)를 투자한 페루자는 안정환을 소속 선수로 완전 영입한 후 다른 구단에 되파는 과정을 통해 차익을 남기려고 했다. 하지만 안정환은 페루자와의 계약이 끝났다고 단정, 부산구단에게 돌아가는 이적료를 최소화하고 연봉을 높게 받으려는 복안을 갖고 여러 구단과 접촉해왔다. 이런 움직임에 발끈한 페루자는 FIFA에 조정을 부탁했고, 외교력이 부족한 대한축구협회와 부산구단은 페루자의 전횡과 계약위반에 대해 지적 한번 제대로 못하고 선수를 내주고 말았다.

    에이전트들의 능력에도 상당 부분 물음표가 제기된다. 현재 국내에서 활동준인 FIFA 공식 에이전트는 모두 16명. 하지만 무자격자도 상당부분 선수 개인의 친분과 알음알이를 내세워 활동하고 있다. 이처럼 공식·비공식 에이전트들 가운데 활발하게 움직이는 사람은 대략 7명선. 이들도 대부분 해외에 네트워크 없이 유럽의 FIFA 에이전트들을 끼고 ‘선수장사’를 하는 수준이다. 영어에 능통하거나 구단과 친분이 있는 사람은 한두 사람 손에 꼽을 정도. 많아야 4, 5명의 직원을 두고 영업을 하고 있다. 어떤 에이전트는 팩스를 받고 잡무를 하는 여직원 한 명만을 둔 채 진짜 구멍가게 같은 영업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체계적이지 못한 활동을 하다보니 정보력이나 협상력에서 국제적인 에이전트회사들과의 경쟁에서 성과를 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후진적인 환경이 해외진출을 원하는 선수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작은 국내 축구시장과 열악한 축구환경을 감안하면 유럽에 진출할 수 있을 정도의 선수를 탄생시킨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 ‘우량품’의 수량이 한정되다 보니 에이전트간엔 선수를 사이에 놓고 ‘물밑 배팅’과 ‘사탕발림’이 진행되면서 상도덕이 무너졌다.

    해외의 경우 선수 에이전트의 규모나 조직이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체계적이지만 무엇보다도 선수들과의 계약관계가 깨끗하고 후견인 개념이 존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대성할 가능성이 보이는 선수들을 유소년부터 육성하거나 청소년의 경우 거금의 계약금을 주고 정식으로 자신의 소속사로 끌어들이는 등 투자를 기본으로 비즈니스를 한다. 영세한 한국의 에이전트들로서는 물론 꿈도 꾸지 못할 일이지만 투자가 가능한 몇몇 ‘큰손’들도 체계적인 비즈니스엔 관심이 없고 오직 슈퍼스타의 쟁탈전에만 몰입하는 양상이다.

    최근엔 이런 주먹구구식 에이전트를 없애고 질적으로 높은 수준의 에이전트를 양성하기 위해 FIFA가 제도적으로 시험의 강도를 높였다. FIFA는 지난해 9월부터 에이전트의 자격증을 허가제에서 시험제로 바꿨다. 이전까지 FIFA는 각국 축구협회가 서류를 제출하면 간단한 심사를 통해 에이전트 자격증을 발급해왔다. 하지만 이젠 엄격한 시험을 통해 에이전트를 선발한다. 시험은 3월과 9월 두 번. 응시료는 10만원.

    대한민국 국적이 있거나 최소 2년 이상 한국에 주소를 둔 개인이 해당자이며 FIFA 대륙연맹 축구협회 모든 구단 또는 그 연관단체와 관련이 없는 자에 한한다. 물론 전과 경력이 없어야 한다. FIFA에서 영어로 FIFA 제 규정에 관한 15문항을 출제(75%)하고 대한축구협회에서 민법과 국내규정(프로축구 선수단 관리 규칙 포함)에 관한 5문항을 한국어로 출제(25%)한다. 시험을 치른 후 일정 점수에 도달한 사람에게만 에이전트 자격이 주어진다. 합격한 사람들은 스위스 은행에 200만 스위스프랑(약 16억원)을 예치하거나 거기에 상응하는 보험을 들면 자격증을 발급받을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제적으로 감각이 있고 또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법적으로도 대처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선별, 선진적인 에이전트로 양성하겠다는 것이 FIFA의 계획이다.

    에이전트들의 능력도 문제지만 아시아 선수의 한계를 무시한 무리한 몸값 요구나 높은 기대치도 선수들이 유럽으로 진출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된다. 한국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불리는 안정환은 이탈리아 리그에서 두 시즌을 뛴 후 “빅리그가 아니라도 주전으로 뛸 수 있는 구단이라면 벨기에나 네덜란드 어디라도 갈 수 있다”고 자신의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그만큼 적응과 성공이 어렵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최근 월드컵 4강의 성적을 업고 많은 에이전트들이 잉글랜드,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의 빅3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선수들도 자신의 실력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에 부화뇌동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한국 축구가 월드컵 4강이란 신기원을 이룩했고 그 구성원들의 기량이 출중했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얻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3위를 차지한 크로아티아 대표팀과 비교하면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당시 크로아티아 대표팀은 뛰어난 개인기와 조직력을 바탕으로 세계 강호들을 차례로 물리치며 월드컵 3위의 기적을 이루었다. 당연히 대부분의 선수들이 월드컵 기간에, 또는 월드컵이 끝난 후에 유럽의 빅리그로 대거 진출했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홈 경기의 이점을 안고 있었고 히딩크 감독이 원했던 조직력이 개인기를 압도하면서 좋은 성적이 가능했던 것이다. 각자 개개인을 조직에서 뜯어내 유럽리그에 투입했을 때 크로아티아 대표팀 선수처럼 잘 적응할지 의문이다. 또한 한국과의 경기에서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은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의 빅리그 관계자들이 한국 선수들에 대해 제기한 “과연 진정한 실력이었을까?”라는 의문부호도 무시할 수 없다.

    중요한 점은 현재 유럽진출을 준비중인 월드컵 대표선수들의 정확한 몸값이 냉정하게 어느 정도 되는가 하는 부분이다. 해외진출 파동을 겪고 있는 선수들의 에이전트들은 대부분 300만달러(약 36억원) 이상을 받아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다. 하지만 이런 몸값을 받고 테스트 없이 나갈 수 있는 선수는 거의 없다고 봐야 옳다. 현재 선수들의 몸값 적정선은 100만∼150만달러(약 12억∼18억원)란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월드컵이 끝난 후 중국의 리웨이펑이 프리미어리그 에버튼으로, 일본대표팀의 이나모토가 잉글랜드 풀햄으로, 스즈키가 벨기에의 갱크, 나카무라는 이탈리아 레지나로 이적했지만 이들과 한국 선수들의 해외진출을 같은 시각에서 봐선 안된다. 유럽 구단은 한국 선수보다는 중국이나 일본 선수들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일본, 중국 선수란 상품값이 한국 선수보다 높기 때문이다. 이들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일본인들에겐 엄청난 엔파워가 있다. 또한 세계 각지에서 차이나타운을 형성하고 있는 중국인들도 경제력이나 양적인 측면에서 공략해 볼만한 매력적인 시장임에 틀림없다.

    이런 아시아 스타 마케팅의 극단적인 예가 바로 일본의 축구 영웅 나카타. 나카타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 직후 일본기업으로부터 개인스폰서를 받고 이적료 330만달러(약 39억원) 연봉 8000만엔(약 8억원)에 이탈리아 페루자로 이적했다. 당시 일본 기업의 스폰서 비중이 50%에 달해 페루자로서도 큰 부담이 없는 입장. 하지만 나카타는 두 시즌을 페루자에서 뛴 후 2000년 AS로마로 이적하며 엄청난 액수의 몸값을 받았다. 5년간 AS로마에서 뛰는 조건으로 이적료 300억리라(약 187억원)와 연봉 30억리라(약 18억7000만원)를 챙긴 것. 2년 사이에 몸값이 무려 4배 이상 껑충 뛰어올랐다. 페루자는 돈벼락을 맞은 셈.

    나카타는 2001년 다시 파르마로 이적하며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다시 거머쥐었다. 세계 슈퍼스타급 선수들이 받는 2000만달러(약 240억원)를 훨씬 뛰어넘는 2600만달러(약 310억원)의 몸값을 받은 것. 이탈리아리그 진출 4년 만에 몸값이 6배나 폭등하는 신화를 연출했다.

    실력으로만 본다면 나카타의 몸값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다. 하지만 이탈리아 클럽이 무리를 해서라도 나카타를 잡은 까닭은 그를 통해 얻는 장내·외 수익에 더욱 눈독을 들였기 때문이다. 몇천명씩 몰려드는 일본 축구팬들과 이들이 경기장 곳곳에 쏟아붓고 가는 엔화의 저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페루자 시절 나카타의 유니폼이 불티나게 팔려 이 유니폼 판매로만 수십억의 이익을 남긴 전례를 감안하면 이탈리아 클럽들이 왜 유망한 일본인 선수의 영입에 안달이 나있는지 알 수 있다.

    나카타를 영입하며 일본인들의 ‘돈맛’을 본 파르마는 9500만유로(약 960억원)에 달하는 ‘나카타 채권’을 발행한다는 계획도 세운 바 있다. 스테파노 탄치 파르마 회장은 지난해 연리 5%로 1000억원어치의 채권을 발행, 클럽경영을 건전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파르마의 한 관계자도 “이 채권은 일본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며 일본인들을 채권 발행의 주고객으로 삼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밝혔다. 최근 포지션 확보가 힘들어진 나카타의 세리에A 잔류 여부를 일본의 재력가들에게 맡긴 셈. 일본자금이 이탈리아 세리에A로 흘러들어갈 경우 나카타는 파르마의 플레이메이커 자리를 돈으로 약속받게 되는 셈이다.

    일본 선수들에겐 이처럼 엄청난 부가가치가 존재하고 있지만 한국 선수는 그렇지 않다. 나카타로 재미를 본 페루자는 안정환을 통해 같은 시너지 효과를 노렸지만 경기 때마다 관중석엔 눈을 씻고 찾아봐도 태극기를 볼 수 없었고 그의 등 번호와 ‘안(AHN)’이 새겨진 캐릭터 숍의 유니폼엔 먼지만 쌓여갔다. 이처럼 한국 선수는 이미 마케팅 측면에선 큰 매력이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실력으로만 성공해야 하는 상황이다.

    물론 나카타의 성공 이면엔 ‘서니 사이드 업(Sunny Side Up)’이란 일본의 뛰어난 마케팅 회사가 자리잡았던 것도 사실이다. 나카타의 천부적인 재능 외에 일본의 철저한 ‘나카타 관리’가 한 몫을 한 것이다. 일본은 나카타를 페루자에 진출시키면서 전담팀을 구성했다. 웨이트트레이닝까지 지도할 수 있는 마사지사와 통역, 여기에 언론 및 잡무를 처리하는 매니저 등이 그들이다. 아직도 나카타의 곁에는 이들이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다. 물론 이러한 준비는 적잖은 기업들이 스폰서를 자처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에이전트 산업이 활성화되지 않은 일본도 이처럼 투자를 통해 선수를 만들어내는 체계와 상식 정도는 가지고 있다.

    최근 J리그 가시와레이솔에서 활동하다가 유럽 무대를 노크하기 위해 7월 고별전을 가진 유상철도 에이전트의 꼼꼼하지 못한 일처리로 궁지에 몰린 경우다. 유상철은 월드컵에서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포함한 유럽의 명문 구단으로부터 입단 제안을 받아 유럽 진출에 탄력을 받은 상태에서 가시와레이솔과 작별했다. 하지만 이후 제1협상 구단이던 프리미어리그 아스톤 빌라가 재정 악화를 이유로 영입에 난색을 표명하면서 일순간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제2, 제3구단과의 이적 협의를 좀더 깊숙이 진행하면서 현재의 소속팀을 떠나야 했던 것이 올바른 순서였지만 조급증이 화를 부른 셈이다.

    에이전트의 문제 못지않게 국내 구단들의 소극적인 자세 또한 걸림돌이다. 스타급 선수들의 해외진출은 곧바로 구단 성적과 직결되기 때문에 감독이나 구단 프런트 모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당연한 일.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최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사우스햄턴으로 진출이 좌절된 이천수.

    이천수의 소속 구단인 울산현대의 한 관계자는 “이천수 몸값이 300만달러를 넘지 않는다면 절대 보내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현재 한국 선수들의 해외시장에서의 공식 가격을 몰라도 한참 모른 발언이다. 그러나 사우스햄턴이 이천수를 검증되지 않은 선수로 분류, 테스트를 요구한 상황에서 구단은 너무 자신의 선수를 고평가한 것이다.

    이적료에 대한 기대치가 높기도 했지만 그 이면엔 이천수가 팀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 올 시즌 K리그 성적을 염려해 선뜻 해외진출을 허락치 못하는 마음도 숨어있다. 어쩌면 그래서 터무니없는 가격을 불렀을 수도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결국 이천수는 마음고생만 많이하고 잉글랜드 근처엔 가보지도 못한 채 국내 프로리그에 전념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지난해 독일 분데스리가 프랑크푸르트도 진출했던 부산의 심재원도 구단이 발목을 잡은 케이스. 우승을 위해 전문 수비수인 심재원을 보낸다는 것은 상당히 큰 모험이었고 구단은 끝까지 독일행을 꺼려했지만 결국 여론에 밀려 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같은 부산 소속의 송종국도 비슷한 이유로 해외진출에 애태우다가 겨우 성사된 케이스다. 우선 확실한 이적 구단을 잡지 못하고 여러 구단에 발을 걸쳐놓고 있었던 것이 문제. 선뜻 그를 잡아채는 곳이 없었다. 부산의 최만희 부단장도 “네덜란드 페예노르트가 유일하게 구체적인 입단 제의를 했을 뿐이다”고 실토했다. 가장 큰 이유는 부산구단이 생각하는 액수가 너무 많았던 데다 빅리그도 아닌 네덜란드리그에 송종국을 보낼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협상 막판이 되어서야 페예노르트가 400만달러라는 대단히 큰 금액을 제시하고 나서야 마음을 돌렸다고 하니 배짱의 성공인지, 전략적 배짱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대표팀 영스타 중 체력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세계수준에 가장 근접하며 유럽에서 선호할 선수로 손 꼽혔던 송종국이 이처럼 힘들게 유럽의 변방리그인 네덜란드에 갔다는 것은 다른 선수들의 험난할 길을 예고한다.

    부산구단 역시 해외진출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미 안정환을 페루자로 이적시키면서 250만달러란 거액을 손에 쥔 부산은 송종국의 해외진출이 조급할 까닭이 없었다. 느긋함의 이면엔 그의 몸값을 극대화하겠다는 논리가 숨어있다. 한 예로 구단은 부단장을 송종국의 에이전트와 함께 유럽으로까지 파견해서 확실한 구단을 섭외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에이전트의 능력과 신뢰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갖고 있다는 것도 있지만 직접 모든 일을 챙기면서 구단의 이익을 우선시하겠다는 의도였다. 물론 시장경제의 논리상, 또한 프로구단의 특성상 선수를 팔아 이익을 남기는 것은 구단 마케팅의 한 방법인 동시에 재정을 튼튼히 하는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빈약한 한국축구의 체질과 앞으로의 나아갈 바를 감안한다면 때에 따라서 프로구단이 이윤에서 많은 부분을 양보해야 할 필요도 있다.

    한국축구의 장기적인 발전과 2006년 월드컵을 위한 대표팀의 체질개선이란 단기 과제를 모두 수행하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선수들이 많이 유럽에 나가 배우고 또한 자신의 기량을 향상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경우에 따라선 다른 어떤 조건보다도 ‘무조건적’인 해외진출이 최상의 가치가 될 수 있다. 학업을 중간에 그만두고 해외무대를 밟은 설기현과 차두리는 구단과의 마찰이나 이적료에 대한 부담이 없었기 때문에 쉽게 유럽 대륙에 터치다운을 할 수 있었다.

    무자격 에이전트들이 판치고 있는 국내 상황도 선수들의 유럽 진출에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현재 해외진출을 추진중인 대표팀 선수를 직접적으로 담당하는 에이전트 중 50% 가량이 무자격자다. FIFA가 규정하는 선수 매니저의 자격은 FIFA 공식 에이전트나 변호사, 친인척에 한정한다. 하지만 무자격자들은 이런 점을 악용, 변호사나 선수의 가족들을 끼고 비즈니스를 한다. 일처리 경험도 부족하고 능력도 검증받지 못한 무자격자 손에서 처리가 되면서 여러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다. 실력으로 안되니 한국적 정서인 ‘형님, 아우’식의 정(情)의 문화로 비벼대는 경우가 허다하다.

    설치는 브로커들

    물론 인간적으로 친해지고 가까워지는 것은 바람직하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일처럼 업무를 진행할 수 있고, 선수를 아끼는 마음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이 과해서 선수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경우도 많다. 어떤 에이전트는 자기가 관리하는 선수와 술판을 벌이는 등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행위를 벌이기도 한다.

    이런 일들이 벌어진 데에는 축구협회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 FIFA 에이전트 시험을 치르고 자격증을 발급하는 기관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잡음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 축구협회의 남광우 사무총장은 “FIFA 에이전트 자격시험이 생기면서 많은 부분이 개선됐지만 실제적으로 FIFA가 각 축구협회에 에이전트를 처벌하고 시정을 권고하는 등의 권리까지 준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표팀 선수들이 이처럼 무자격자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는 현실에서 FIFA의 산하기관인 대한축구협회가 손을 놓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적극적으로 현재 에이전트의 실태를 파악하고 프로구단과 공조를 취해 정상적인 에이전트가 아닌 사람들에 대해 자격의 문제를 따져야 한다. 문제가 발생한 무자격 에이전트에 대해선 거래선수의 타구단 이적이나 임대시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 에이전트들은 중간에 브로커들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다. 언론도 확인 안된 에이전트의 말만 믿고 곧바로 써버리는 경향이 있다. 처음엔 이적료가 적더라도 일단은 내보내야 하는데 이런 비즈니스를 수행할 에이전트가 사실 없다. 과연 누가 유럽통인가? 기껏해야 일본 정도의 상황에만 익숙하다.” 프로축구 성남 일화의 김영진 부단장의 국내 에이전트에 대한 불만이다.

    1999년 에이전트의 말만 믿고 웨스트햄 구단에 테스트를 하러 갔다가 고개를 떨군 최용수, 김도근 파동이 대표적인 부실한 에이전트 관련 케이스다. 흥정은 밀고 당겨야 하는데 구단이 일방적으로 시세도 모르고 에이전트 말만 믿는 경우가 많다. 에이전트들이 ‘얼마 받아줄 테니까 걱정 말아라’고 이야기하지만 거의가 자신의 말에 책임지지 못한다.

    한 구단의 관계자는 에이전트들의 도덕성에 관해 의문을 던졌다. “1995년 외국인 선수를 데려오면서 이적료를 지급한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선수는 이적료를 줄 필요가 없는 자유계약 선수였다. 후일 에이전트와 구단의 이해 당사자가 거짓으로 작성된 이적료를 나눠먹은 것이 적발됐지만 쉬쉬하면서 넘어간 적이 있다. 아직도 이런 불투명하고 부정직한 상거래가 근절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엔 오가는 액수에 따라 검증도 되지 않는 선수를 데려오는 경우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번 월드컵 열기를 이용한 해외진출이 ‘한철 장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선수를 유럽의 선진 축구클럽으로 보내기 위해선 국내지도자 일색인 프로축구의 체질을 대폭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마디로 현재 K리그는 대원군 시절의 쇄국정책을 방불케 한다. 10개 구단 중 단 한 팀도 외국인 감독을 기용하고 있지 않다. 중국과 일본은 프로축구에 유럽과 남미의 명장들이 집중 배치되면서 선수들의 전체적인 축구 수준이 많이 업그레이드 되었다. 물론 한국 지도자의 수준이 미천하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국내 감독의 큰 약점은 세계축구의 흐름에 약하고 세계 축구계에 어떠한 인맥도 없다는 점이다.

    대표팀만 예로 들어도 중국은 잉글랜드 휴튼 감독의 후임에 세계적인 명장 밀루티노비치를 앉히면서 세계 축구계의 주목을 받으며 많은 내적 교류를 이루어냈다. 일본도 트루시에 감독이 4년간 집권하며 축구 외적인 부분에까지 큰 도움을 받았다. 또한 J-리그 곳곳에 포진하고 있던 외국인 감독들의 추천과 분석이 해외 스카우터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에 반해 한국은 계속 한국인 감독들로 ‘열성유전’을 반복하면서 국내외적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히딩크 감독이 1년6개월간 대표팀 지휘봉을 잡으며 정보의 중요성에 대해 커다란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가 돌아간 지금 한국인 감독들의 밥그릇 싸움과 구단 정책권자의 좁은 안목은 계속되고 있다. 아니 더 심화될 수도 있다. 체질개선 없이 안으로 계속 곪아들어간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한국 선수들의 해외진출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한국 선수들의 유럽진출을 위해 에이전트들의 수준을 높이고 국내리그의 체질을 개선, 좀더 당당하게 제값을 받는 길을 열어야 한다. 물론 높아진 한국축구의 위상과 선수들의 질적 향상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에 따르지 못하는 에이전트의 수준과 국내리그의 답보가 해결되지 않고는 한국축구의 선진화는 요원하다. 현재 한국축구는 질적인 부분을 담보하지 못한 불량 에이전트와 ‘동침’을 하며 하향 평준화의 길로 가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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