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주요 문화매체로 서서히 떠오른 비디오테이프 확산에 힘입어 이 영화는 입소문으로 전파되며 언더그라운드 컬트로 추앙받게 되었다. 급기야 10년 만인 1991년에 감독 편집판으로 다시 개봉되는 행운을 누렸다. 사실 ‘블레이드 러너’는 1982년 개봉 당시 너무나도 암울한 스타일 때문에 배급업자가 멋대로 해피엔딩 장면을 갖다붙이는 등 감독 의도와는 상관없이 손상된 상태였다.
그밖에 자아의 정체성 혼란이라는 테마를 박진감 넘치게 그린 영화 ‘토탈 리콜’ 역시 딕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것이다. SF영화팬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스크리머스’ 역시 그의 단편이 원작이다. ‘스크리머스’는 인간이 만든 전쟁로봇이 스스로 진화하여 인간 그 자체를 완벽하게 복제한다는 이야기로, 같은 팀의 사람들 중에서 누가 진짜 인간이고 로봇인지 가려낼 수 없어서 혼란을 겪는 주인공의 공포가 매우 섬뜩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올해 미국에서 개봉되었으나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임포스터’라는 영화도 딕의 작품을 바탕 삼아 만든 것이다. 원작 소설에서 주인공은 지구와 전쟁중인 외계인이 몰래 지구에 심어놓은 시한폭탄이라는 혐의를 받는다. 하나의 인격을 지닌 인간으로서 정체성을 의심치 않던 주인공이 ‘설마 내가 정말…’이라는 내용의 독백을 하는 순간 터져버린다는 이야기다. 바로 그 독백이 시한폭탄의 방아쇠였던 것이다.
이상의 작품들로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이 딕은 항상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진실인가’하는 주제에 집착했다. 이것은 사실 SF장르 고유의 정서라고 일컫는 ‘경이감(sense of wonder)’이나 과학기술적 상상력과는 그 줄기가 다른 테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딕은 생전에 SF팬으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한편 주류문학계 역시 이 SF라는 마이너 영역에서 괴상한 이야기를 계속 토해내는 작가를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작고한 뒤 1980~90년대로 넘어오면서 비로소 주류문학계가 그의 ‘시대를 앞서가는 정서적 방랑’을 재발견했고, 급기야 21세기 노벨문학상 후보라는 찬사까지 보내게 된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작가로서의 딕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그의 생애가 매우 독특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인생 후반부를 우리 식대로 말하자면 ‘귀신에 홀린, 또는 신내림을 받은 듯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이런 삶은 그의 작품세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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