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문화의 단절 없는 공간 고서점

  • 탁석산 / 철학자·저술가stonemt@naver.com

    입력2004-09-08 16: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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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월말 날씨가 제법 쌀쌀한 때 친구를 만나러 도쿄에 갔다. 고교 동창생으로 일본 국제협력은행에서 일하는 그는 일본에서 산 지 20년 됐다. 그는 일본이 해외에 제공하는 차관을 심사하는 부서에서 일하는데 업무량이 많아 보였다. 잠시 틈을 낸 친구는 그 은행에서 가까운 고서점가를 둘러볼 것을 권했다. 고서점가는 걸어서 5분 거리인 진보초(神保町)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꽤 길게 이어졌다.

    나는 이 고서점가의 정취에 흠뻑 빠졌다. 정말 오래된 옛 책들이 빽빽이 차있었고 도서관처럼 잘 분류돼 있었다. 많은 책방 중엔 2층까지 있는 제법 규모 큰 서점도 있었다. 들어가 보니 직원 몇 명이 앉거나 서있었는데 내가 상상했던 허름한 차림의 헌책방 주인이 아니라 회사원처럼 세련된 복장이었다. 책값도 매우 비쌌다. 몇만엔은 보통이고 복사본도 꽤 비쌌다. 1774년에 네덜란드 해부학 책을 번역하여 출간한 ‘해체신서’도 볼 수 있었다. 이틀에 걸쳐 고서점가를 둘러보면서 나는 마음이 흐뭇했다. 전에 읽은 ‘일본 고서점 그라피티-동경편’(이케가요 이사오 지음/ 신한미디어)에 나왔던 고서점들을 그대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의 가치 제대로 모른 척박한 문화 풍토

    이 책은 한 면에 한 서점씩 직접 세밀하게 그린 스케치 밑에 간단한 설명을 달고 책 중간중간에 ‘장서가의 조건’과 같은 글을 싣고 있다. 예를 들어 진보초의 야구치서점 편은 위에서 내려본 듯한 각도에서 서점 전경을 세밀히 그려놓았는데 주인의 얼굴 표정, 특징이 되는 책들의 목록과 위치도 쓰여져 있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세련되고 정성이 깃든 느낌이다. 서점에 대한 저자의 간단한 소개도 덧붙였다. 이를테면, ‘영화·연극·시나리오 관련서적, 잡지, 문헌 등의 전문점. 좌측 선반엔 ‘키네마신보’의 백넘버가 있고 영화, TV드라마 시나리오도 풍부하다. 특히 ‘태양을 향해 외쳐라’의 시나리오가 충실. 영화 애호가나 시나리오 라이터를 지망하는 손님도 많다’라고 돼 있다.

    책에 대한 단상은 어떨까. ‘장서가의 조건’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말해, 어느 정도 책을 가지고 있어야 장서가라고 부를까? 대개 3000권 이상이 그 기준으로 돼 있는 것 같다. 3000권의 근거는 잘 모르겠지만, 그 숫자를 넘기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 무엇이 어려운 일인가? 이에 대해 저자는 ‘보관 장소’ 외엔 아무 문제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러고는 책 한 권을 두는 공간에 480엔이 소요되는 셈이라는 친절한 계산을 제시하며 짓궂게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이제부터는 고서점의 균일 진열대에서 한 권에 100엔인 책을 찾아냈다고 기뻐하기만 해서는 안된다. 그 책 한 권에는 약 1000엔의 보관비용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도쿄의 고서점들을 돌아보면서 고등학교 때 자주 배회하던 청계천의 헌책방이 떠올랐다. 1970년대 전반 청계천엔 많은 헌책방이 있었다. 작은 서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나는 이곳에 자주 갔었다. 친구들은 입시 공부에 열중했지만, 나는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해지고 오래된 책이 주는 분위기가 그런 대로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곳은 고서점이 아니라 헌책방이었다. 나는 헌책방을 중고서적을 파는 서점으로 이해한다. 즉 출간연도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비교적 많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중고서적을 파는 서점은 헌책방으로, 오래전 출간됐고 많은 사람이 찾지는 않지만 학술적 가치, 희귀함에서 부여되는 가치, 마니아를 갖고 있는 책을 주로 다루는 서점을 고서점으로 이해한다. 고교 시절 매일 등교길에 지나던 인사동의 서점들이 아마 고서점에 속할 것이다. 인사동 고서점 앞을 그렇게 자주 지나다녔지만 들어가본 적은 몇 차례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분위기만은 아직도 기억한다. 약간은 어둡고 무질서하며 한문책이 주는 중압감….

    왜 한국에선 고서점가를 찾을 수 없을까? 고서점가가 생기려면 우선 오래전에 나온 책이 많아야 한다. 적어도 100년쯤 전에 많은 책이 쏟아져 나온 적이 있어야 지금 거래할 정도의 양이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18세기의 실학자 이덕무는 ‘근자에 강남의 서적이 나가사키에 많이 몰려들어 집집마다 책을 읽고 사람마다 문장을 쓰니 오랑캐의 풍속이 점점 변해간다’고 전하고 있다. 19세기에 이미 일본에 전업작가가 1만명에 달했다는 보고도 있으니 일본이 고서점가를 형성할 정도의 많은 책을 출간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떤가. 구한말에 프랑스와 일본, 러시아 등이 합법적으로 사들여간 책만 해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하니 고서점가를 형성하기에 책의 양이 부족했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물론 일본만큼 책이 일반적이 되고 대중 속에 파고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면 외국으로 반출된 책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고서점가 형성이 어려운 것일까? 나는 그렇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물론 반출로 인해 책의 절대량이 준 것도 큰 원인이겠지만 그보다는 책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문화 풍토에 더 많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한국의 경우 1970년대까지 문화재 반출이 계속됐고 그후론 많이 줄었다고 하는데 그 원인은 더 이상 반출될 만한 문화재가 별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간을 관통하는 옛날 책들

    책도 마찬가지다. 이제 반출될 만한 책은 얼마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1950년 이후 우리가 고서적에 별로 관심을 쏟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에 고서적이 돈이 된다고 한문으로 된 책을 무조건 ‘진품명품’에 들고 나오는 정도다. 이런 풍토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후를 상상해보면 더욱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즉 책의 양도 문제지만 헌책방이 아닌 고서점에 꽂히려면 책이 상당한 가치를 지녀야 한다. 과연 지금 출간되고 있는 그 많은 책들 가운데 고서점 서가를 채워넣을 만한 책이 몇 권이나 될까. 반짝하는 베스트셀러, 시류에 영합하는 기획물들이 과연 시간의 험난한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까. 한국에 고서점가가 형성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책을 존중하지 않는 문화적 분위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고서점이 지닌 문화적 의미는 상당히 크다.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문화의 두터움이다. 고서점가가 생기려면 신간 출간, 독자의 호응, 평가 작업, 세월이 지난 후에도 다시 찾는 고객의 발생 등 절차가 필요하다. 이런 절차는 부박한 문화에선 매우 힘들다. 왜냐하면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도 옛날 책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야 하는데, 이는 각자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 수준에 오르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고 또한 그 숫자도 서점가를 형성할 정도로 많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문화의 연속성이다. 고서적의 특징은 시간을 관통하여 흐른다는 것이다. 대학도서관을 이용할 때의 즐거움 중 하나는 꽤 오래된 책의 뒷면 대출카드에 이름을 적는 재미다. 지금도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카드엔 앞서 책을 빌렸던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꽤 유명한 사람의 이름이 있는 경우도 있다. 이때 왠지 나도 어느 줄인가에 속하는 느낌이 들었다. 즉 무엇인가 계속되고 있다는 느낌, 고서점에선 이런 느낌이 일상이 된다.

    도쿄 편에 이어 ‘일본 고서점 그라피티-교토·오사카·고베편’(이케가요 이사오 지음/ 신한미디어)도 나왔다. 팔릴 것 같지 않은 책을 만드는 그들의 용기와 배짱이 부럽고도 고맙다. 이 책엔 한국과 관련된 내용도 있는데 이를 소개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오사카 이쿠노(生野)에 있는 히노데서방(日之出書房)의 주인은 재일교포 2세인데 저자는 이 책방을 소개하며 자신이 한국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책 전문가가 한국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도 놀랍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쓴다는 것도 어찌 보면 한국에 대한 무시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방의 주인 곽씨의 아들은 현재 한국에 유학중이며, 언젠가는 한국에 지점을 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고 한다. 때문에 저자는 ‘아들과 함께 장래에 일본과 한국의 좋은 파이프 역할을 하고 싶은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나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 일본문화가 전면 개방된다고 하는데 일본 고서점이 한국에 상륙해 번창한다면 일본까지 가서 고서점의 향기를 맡을 필요가 없을 것이고, 고서점이 서울의 거리 풍경을 조금은 바꿀 수도 있을 테니까. 그리고 한국문화의 깊이도 두터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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