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호

심갑보 삼익LMS(주) 대표이사 부회장

시장점유율 1위·노사 무분규, 투명경영으로 ‘두 마리 토끼’ 잡다

  • 입력2003-07-29 16: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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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세기 기업인은 성직자에 준하는 도덕성을 지녀야 한다.”
    • “눈 덮인 들판을 걷더라도 발걸음을 흩뜨리지 마라. 뒤에 오는 이에게 이정표가 된다”. 정도경영에 매진하면서 매일처럼 떠올리는 경구다. 투명한 회계, 부정과 결탁하지 않는 경영원칙이 기업 경쟁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심갑보 삼익LMS(주) 대표이사 부회장

    각종 자료들로 가득찬 심갑보 부회장의 집무실. 세미나와 강연에 참석해 직접 녹음한 테이프만도 3000여 개에 이른다.

    필자는 33년 전인 1970년 1월, 창업 10년째를 맞은 삼익LMS(주)-당시 회사명은 삼익줄공업(주)-의 상무이사에 취임하면서 경영에 참여하게 됐다. 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강사 1년, 부친의 유업을 계승한 건설업체 경영 4년, 연구기관 재직 1년 등의 경력을 쌓았지만, 그만한 경험과 실력으로 제조업체 경영을 제대로 수행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그해 가을 학기부터 회사 창업자(현 회장)의 배려로 고려대 경영대학원에 입학해 경영학 공부를 시작했는데, 당시 이 대학원에는 조익순·이준범·김희집·김동기 교수 등 저명한 학자들이 많아 단기간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대학원을 수료한 후에도 실무능력을 기르려고 한국생산성본부와 여타 연구기관에서 시행하는 단기 과정에 수시로 참여해 영업, 회계, 재무, 생산관리, 무역실무, 기획업무 같은 공부를 계속했다. 경제단체와 연구기관, 경영대학원 동창회 등에서 주최하는 조찬회나 춘계·하계·추계 경영자 연찬회(세미나) 강의도 거의 빼놓지 않고 수강했다. 서울대 경영대 최고경영자과정(1977)과 공과대 최고산업전략과정(1992), 전국경제인연합회 정보전략최고경영자과정(1999) 등도 이수했다.

    초기에는 경영 실무에 도움이 되는 과목을 중심으로 강의를 들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초기 산업사회에서 후기 산업사회로, 다시 정보화사회로 급변하고, 세계경제 질서도 WTO시대와 무한경쟁시대로 변모함으로써 경영환경 변화의 흐름을 제때 파악하고 남보다 한 발 앞서가려면 공부의 범위를 계속 넓혀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도 매주 2∼3회 각종 조찬회에 참석하며, 중요한 세미나는 시간이 허용하는 한 수강하려고 노력한다.

    목표·채권관리로 시스템 혁신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강의를 들으며 한시도 허비하지 않고 공부한 것이 실제로 기업을 경영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필자가 입사할 당시 우리 회사는 창업 때부터 시작한 ‘줄(File·공구의 일종)’과 1972년 업종에 추가한 ‘삼익쌀통’ 두 가지 품목을 생산·판매하고 있었는데, 일선 영업사원들의 역량과 판단에 의해 매출이 이뤄질 뿐 체계적인 영업관리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다행히 경영대학원과 각종 세미나 수강을 통해 ‘시스템’에 의한 영업관리체제를 구축하지 않으면 회사의 정상적인 성장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늦게나마 깨달았다.

    주변을 꼼꼼히 살펴보니 그 무렵 외국의 대형 회사들과 관계를 맺고 있던 동아제약, 유한양행, 대웅제약 등의 제약회사들이 영업관리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이들을 벤치마킹해 우리 회사 실정에 적합한 제도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목표관리제도와 채권관리제도(포인트 시스템 병행)가 바로 그것이다.

    목표관리제도란 매출 목표, 수금(명목 수금과 실질 수금) 목표, 매출이익목표, 회전일수 목표, 대손금 하한선 목표, 거래처 가동률 목표 등 제반 목표를 설정해 영업장과 영업사원들에게 적용시킨 것이다. 매출채권 회수분석표(판매실적, 수금실적, 회전일수 실적 등 표시), 외상잔액 분포명세서(장부의 잔액이 언제 것인지 파악), 시장 정보수집 명세서 등의 양식에 의거, 영업현황을 계수화해 이를 성과급 지급의 기초자료로 활용한 것이다. 이에 따라 급여 시스템도 ‘기본급+성과급 체계’로 변모했다.

    회사는 당시 전국에 산재한 1500여 개의 거래처에 외상 판매를 하고 있었는데, 영업관리를 잘못하면 대손이 발생, 이익을 잠식하기 때문에 합리적인 채권관리제도를 도입하는 일이 절실하던 터였다. 그래서 거래처별 신용조사를 실시해 전국의 거래처를 A·B·C·D등급으로 구분하고 신용 정도에 따라 여신 한도액을 책정, 신용한도액 내에서 외상거래를 하도록 했다. 또한 매월 ‘받을 어음 점검부’를 확인해 불량 어음과 수표를 사전에 검색하고, ‘불량 거래처 체크리스트’를 작성케 해서 대손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도록 했다.

    처음에는 거래처와 영업사원들의 반발이 여간 크지 않았으나 설득을 거듭하면서 이 제도를 정착시켜나갔다. 이와 같은 영업관리 시스템 덕택에 당사 제품은 줄과 쌀통 모두 동종업계 1위 자리를 고수하면서 질적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다.

    당시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에서 이런 경영시스템을 도입해 성공시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제도가 성공하려면 외형누락이나 분식회계가 없는 투명경영이 필수적인데, 우리 회사는 창업 때부터 정도경영을 해왔기 때문에 이를 시행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1970년대를 흘려보내면서 노동집약 제품인 줄과 쌀통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1980년대 들어 과감한 변신을 시도했다.

    향후 기계공업과 관련해서는 자동화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하고, 1983년부터 기계 자동화의 필수 부품인 ‘직선운동 베어링(LM가이드)’을 세계적 메이커인 일본 THK사로부터 수입,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줄과 쌀통으로 구축한 전국 영업망을 최대한 활용하고, 목표관리제도와 채권관리제도도 함께 적용했다. 1984년에는 THK사 제품의 한국대리점 계약을 체결했고, 다행히 경영성과가 좋아 1989년 9월에는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외국 제품을 국내에서 판매만 하는 것은 외국 생산자에게 국내 시장을 열어주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기에 THK사를 끈질기게 설득, 1991년에 합작투자 및 기술도입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에 따라 대구에 LM가이드 공장을 준공하고 자체 생산에 들어갔다. THK사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 회사와 합작계약을 한 것은 우리의 투명경영과 영업능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내 생산을 하고 시장을 넓혀가면서 한 가지 염려되는 점이 있었다. 중소기업이 성장성 있는 제품을 애써 개발해 시장을 개척해놓으면 대기업이 막강한 자본력과 조직력으로 시장을 잠식해버리는 일이 종종 있어왔던 것이다. 이를 방지할 수 있는 영업정책이 필요했다. 대기업이 쉽게 따라올 수 없게 하려면 차별화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고 판단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강한 동물과 약한 동물의 생존방법이 다르듯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생존방법에도 차이가 있다. 우리는 대기업이 일반적으로 채택하는 대리점이나 특약점 거래방식을 피하고 실수요 거래처와의 직거래를 통한 맞춤식 고객만족 경영기법으로 활로를 찾았다.

    우선 11개의 전국 영업장을 중심으로 1500개가 넘는 실수요 업체(반도체장비, 자동화설비, 산업용 로봇, 공작기계, 자동차 설비라인 등) 설계부서와 생산부서를 하나하나 방문해 세미나를 실시하는 등 판촉활동에 주력했다. 우리 제품의 특성, 경쟁사 제품과의 비교우위 및 고유한 장점, 제작기계 부품으로서의 적합성과 효율성, 우리 제품을 사용할 때 창출되는 부가가치 등을 상세히 설명한 다음 직접 주문을 받아 공급했다.

    대기업이 그 규모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작은 업체에도 제품을 공급하는 틈새전략-물이 작은 공간에까지 침투하는 것처럼-도 구사했다. 그 결과 일부 대기업들이 외국 유명 브랜드 제품을 수입해 시장을 공략했지만 우리가 발로 뛰며 구축해놓은 아성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회사가 취급하는 품목은 매우 다양했다. 하지만 선택과 집중으로 효율을 극대화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시대가 왔다. GE의 잭 웰치 전 회장도 “1등과 2등 이외에는 다 버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호닝파이프, 유공압실린더, 쌀통, 그리고 일부 기계류 사업은 그 분야에 종사하던 회사 간부들에게 양도해 독립경영을 하게 하고, 자동차 부품은 자회사인 삼익오토텍에 넘겨줬다. 삼익LMS는 창업품목인 줄(지금도 국내 시장 점유율이 80%를 넘는다)과 자동화 관련 부품(LM시스템과 정밀감속기) 사업만 집중 육성키로 하고 1999년까지 구조조정을 마무리했다.

    또한 삼익LMS는 정도경영과 윤리경영이 경쟁력의 원천임을 확신하고 열린 경영과 투명경영을 정착시켜왔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해 500개 기업을 대상으로 기업윤리 실태를 조사한 결과 응답한 292개 기업 중 49.7%가 윤리헌장을 마련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30대 그룹에 드는 대기업들은 76.3%가 윤리헌장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 회사는 정부가 노사협의회제도를 시행토록 권유하기 10여 년 전인 1970년대 초반부터 노사협의회를 구성, 경영성과를 공개하고 중요 사항을 근로자들과 협의해 결정하는 풍토를 뿌리내렸다. 회계의 투명성이 그 전제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경영진과 사원들 간에 두터운 신뢰를 쌓은 덕분에 우리 회사는 창업 이래 43년간 단 한 번도 노사분규로 인해 회사 문을 닫아본 적이 없다.

    정도경영과 관련된 사례 두 가지만 소개한다.

    1970년대 중반에 우리 회사에서 전자밥솥, 전자밥통 같은 가정용 전자제품을 생산한 적이 있다. 그런데 대다수 경쟁업체들이 부가가치세와 특별소비세 등을 관행적으로 탈루하는 바람에 탈세하지 않고는 도저히 경쟁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세금을 탈루하지 않고서 사업을 유지할 수 없다면 생산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는 창업자의 뜻에 따라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면서 조업을 중단하고 말았다.

    또 하나는 1976년에 경쟁업체의 모함으로 대구지방국세청으로부터 세무사찰을 받은 일이다. 정밀조사 결과 무혐의 판정을 받았는데, 당시 대구지역에서 세무사찰을 받고서도 무혐의 처분을 받은 업체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안다.

    우리가 정도경영에 매진하면서 늘 되새기곤 하는 두 개의 명언이 있다. 하나는 ‘강대국의 흥망’을 쓴 폴 케네디의 “21세기의 기업가나 정치가는 성직자에 준하는 고도의 도덕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안 되며, 경영자의 도덕성이 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백범 김구 선생이 서산대사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눈 덮인 벌판을 혼자 걷더라도 발걸음을 흩뜨리지 마라. 뒤에 오는 사람에게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다”라는 경구다.

    가끔 가까운 친구들로부터 “그동안 당신이 그토록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기업을 그 정도밖에 키우지 못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나라에서 40년 이상 꾸준히 성장해온 기업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부정한 방법과 결탁하지 않고 정도경영을 통해 경쟁력을 길러왔기에 영세기업을 중견기업 규모로 키워낼 수 있었다.”

    ‘장점 중시 경영’

    기술 집약적인 첨단 제품을 생산해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유수의 대기업에 납품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인재를 뽑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 여건에서는 이른바 일류학교 출신들이 중소기업을 외면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크다.

    이런 한계를 타개하기 위해 삼익LMS는 지방대학이나 전문대학의 기계·전자관련 학과 출신들을 선발해 그들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사내 교육 및 사외 파견교육을 통해 실력을 향상시킴으로써 업무를 수행하게 한다. 한 마디로 말해 ‘장점 중시 경영’이다. 또한 성과를 올린 사원에 대해서는 학력과 관계없이 승진과 대우를 보장하므로 임직원들이 업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경영전략 덕분에 삼익LMS는 국내 LM가이드 분야에서 가장 높은 시장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에도 판매목표를 초과 달성해 주주들에게는 고율(18%)의 배당을 실시했고, 사원들에게는 기본 상여금 600% 외에 300% 정도의 추가 상여금을 지급할 수 있었다. 올 상반기에도 판매목표를 초과 달성했으며 이것이 주가에 반영돼 높은 시세가 형성됐다.



    필자는 앞으로도 계속 배우고 가르치면서 삼익LMS를 경쟁력 있는 초일류 기업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내가 회장에 취임할 때보다 내가 원하는 후임자를 육성해 그에게 내 자리를 물려주고 퇴임할 때가 더 행복했다”고 한 GE의 잭 웰치처럼 나도 앞으로 후임자를 육성하는 데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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