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이호군 비씨카드 사장

‘빠른 길’ 대신 ‘바른 길’ 택해 내실성장 다졌다

  • 입력2003-11-27 11:0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연체율 상승과 내수 침체로 신용카드사들이 수조원대의 적자에 허덕이며 ‘카드채 대란(大亂)’을 우려하는 요즘도 비씨카드는 흑자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일시적인 시류에 편승해 실적 올리기에 급급하지 않았던 덕분이다. ‘기본에 충실한 판단’은 언제나 옳은 결과를 가져다준다.
    이호군 비씨카드 사장

    직원들과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누는 이호군 사장(왼쪽).

    “자신이 하는 일, 자신과 같이 일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직장을 가장 좋은 곳으로 여겨라”. 선친의 이 가르침은 내 삶에 있어 더없이 큰 교훈이 되었다. 조직 구성원이 자기 업무에 최선을 다하면 그에 따른 시너지 효과 덕분에 결국은 조직이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은 사람에서 비롯된다는 신념은 복잡한 의사결정의 순간에도 나침반처럼 길을 제시해준다.

    외환위기가 금융권을 얼어붙게 하던 1999년, 나는 신용카드 업계의 맏형 격인 비씨카드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때껏 꾸준히 성장해온 신용카드업은 경기 침체로 인해 매출과 수익이 급감하는 상태였다. 더욱이 비씨카드 회원은행들이 구조조정이라는 후폭풍에 내몰린 바로 그 시기에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한 재벌계 카드회사들이 시장을 공략하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무차별적으로 신용카드 회원을 모집하는 영업방식이 만연했고, 신용카드 본래의 기능인 상품결제보다는 현금서비스나 카드론 등 현금대출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돌아보면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시기였던 듯하다.

    시장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업계 1위 회사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해야 한다는 책임감, 신임 CEO로서 역동적인 면모를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일시적인 시류에 편승해 눈앞의 실적만 요란하게 포장하는 것은 긴 안목으로 볼 때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용카드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고 금융기관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빠른 길’이 아닌 ‘바른 길’을 선택했다. 회원에 대한 신용평가가 생명인 신용카드를 원칙이나 기준 없이 마구잡이로 발행한다든지, 현금이나 경품을 내걸고 회원을 모집하다 보면 결국 소중한 고객에게는 물론 금융기관, 더 나아가 국가경제에도 큰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침묵의 리더십’이 필요한 이유



    얼마 전 비씨카드는 급변하는 신용카드 업계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 회사의 중·장기 비전을 새롭게 추진해나갈 전략개발 부서를 신설했다. 기획통 중간관리자 몇 사람이 책상에 앉아서 전략을 만드는 관행을 없애고, 회사 발전에 열정을 가진 직원이라면 직급과 부서에 관계없이 참여해 조직 안의 다양한 목소리를 전략에 반영시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회사의 비전과 발전방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화려한 경력을 가진 외부 컨설턴트나 강력한 CEO가 아니라 조직 구성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연체율 상승과 내수침체로 인해 경쟁사들이 ‘카드채 대란(大亂)’과 수조원대의 적자에 허덕이는 요즘, 비씨카드는 업계에서 유일하게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기본에 충실한 판단은 이처럼 언제나 옳은 결과를 가져다준다.

    고객들의 급격한 욕구변화와 IT(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업종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신용카드업도 이러한 변화의 기류에서 예외일 수 없다. 그래서 다양한 기업체와 전략적 파트너 관계를 맺는 ‘제휴카드’ 발행이 증가하고 있고, 하나의 카드에 여러 업체가 공동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이젠 드문 일이 아니다.

    나는 이 분야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들에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 “파트너를 존중해야 우리도 존중받을 수 있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한다. 기업과 기업의 만남은 고객만족을 통해 상호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윈-윈관계라야 하기 때문이다.

    긴밀한 조직운영을 위해 결재라인도 대폭 단축시켰다. 회사 조직이 팀제로 운영되다 보니 담당자의 권한이 부서장 못지않게 중요해졌고, 그래서 조직원 모두가 매순간 핵심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CEO 역할도 하고 있다. 전직원이 자기 담당 업무에 있어 최종 결정자란 책임감을 갖고 업무를 추진하되, 비씨카드의 이익 추구와 함께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때 제휴처와의 시너지 효과가 배가될 것이다.

    중대한 일을 결정해야 할 때면 담당자와 해당 부서장의 의견을 경청한 후 생각할 시간을 갖곤 한다. CEO인 나는 물론, 실무자에게도 한 번 더 숙고해볼 기회를 주는 것이다. 사내에서는 이를 두고 ‘침묵의 리더십’이라고도 하지만, 실무진과 사장이 입장을 바꿔 ‘보다 나은 방법’을 고민한 끝에 내린 의사결정에는 실패가 없다고 믿는다.

    비씨카드는 다른 신용카드사와 달리 은행의 공동 브랜드 관리, 신용카드 네트워크 구축 및 운영을 비롯한 은행의 카드업무를 대행하고 지원하는 회사다. 우리나라 경제활동인구의 80%가 넘는 1700만명의 고객에게는 가장 사용하기 편리한 신용카드 서비스를, 비씨카드 주주이자 고객인 회원은행에는 최고 품질의 카드 프로세싱을 제공하고자 노력한다.

    어느 CEO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객이다. 카드를 사용하는 회원, 비씨카드를 발행하는 금융기관, 회사 내부 고객에 이르기까지 조직을 둘러싼 고객들로부터 인정받고 이들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 기업의 존재 이유일 것이며, 또한 기업이 발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고객이 기업에 대해 느끼는 이미지나 만족도는 고객이 기업을 처음 만나는 15초 이내의 극히 짧은 ‘진실의 순간(Moments of Truth)’에 결정된다. 고객과 비씨카드가 만나는 접점인 콜센터에는 하루에 40만건 이상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러니 콜센터는 매일 40만번에 이르는 ‘진실의 순간’이 발생하고, 그 눈깜짝할 순간에 비씨카드에 대한 이미지와 만족도가 결정되는 중요한 장소다. 사장으로 취임할 때부터 지금껏 꾸준히 콜센터에 관심을 가져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때문에 신입사원을 채용하면 가장 먼저 콜센터에서 교육을 받게 했으며, 전직원이 순번을 정해 콜센터에서 일일 상담원으로 근무하도록 함으로써 고객만족 마인드를 심어주려 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금융감독원에서 민원유발 정도를 평가하는 고객민원지수 평가에서 신용카드회사 가운데 2년 연속 큰 격차로 1위 기업에 선정됐다. ‘고객은 A, 카드는 BC’가 우리의 모토였다.

    21세기 CEO의 미덕은 친근함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를 지낸 기업 연구가 짐 콜린스는 그의 저서 ‘Good to the Great’에서 “조직원들의 자율성과 창의력을 개발해줄 수 있는 독특한 리더십을 가지는 것이 CEO의 가장 큰 덕목”이라고 했다.

    1970∼80년대의 ‘밀어붙이기’ 개발시대에는 CEO의 강력한 카리스마가 미덕이었다. 하지만 시스템의 시대인 21세기에는 직원들이 가진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또한 그런 여건을 조성해주는 ‘친근한 CEO’가 적격이라고 생각한다. 사장은 회사를 대표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한 조직에서 직원들과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는 조직 구성원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비씨카드 CEO로 취임했을 때만 해도 업종 특성 탓인지 이 회사가 매우 보수적인 조직문화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직을 밝고 생기있게 만들어볼 요량으로 2001년 금융권에서는 이례적으로 자율 복장제를 도입했다. 정장과 넥타이, 유니폼으로 상징되던 공간에서 개성과 창의성이 살아나도록 해 업무 효율성을 높이려 한 것이다. 처음에는 격식을 갖추고 고객을 맞아야 한다는, 이른바 전통적 금융기관 문화에 익숙한 임원들은 물론 평사원들 중에서도 걱정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한껏 멋을 내고 고객에게 밝은 모습을 보여주며 편하게 일하는 요즘 직원들의 모습을 보면 괜한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는 회사에 머물러 있는 동안 직원들과 최대한 자주, 많이 만나려고 노력한다. 출근길에 직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아침인사를 나누고, 회사 부근 식당에서 직원들과 밥상을 놓고 마주앉는 시간들이 즐겁다. 매달 ‘호프 미팅데이’를 열어 직원들과 격의없이 어울리기도 한다.

    인트라넷에는 ‘나눔터’라는 사이버 공간을 만들어놓고 여기에 올라온 의견들을 수시로 열어보고 직접 답변을 해준다. ‘나눔터’에서는 경영진에 대한 바람, 업무개선 제안 등 회사 발전을 위해 전직원이 자유롭게 익명으로 토론할 수 있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각종 경제지표나 시장상황은 경기에 극히 민감한 신용카드사에겐 아직 긍정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한마디로 여전히 위기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기에는 위험과 함께 기회가 동전의 양면처럼 상존한다. 현재의 어려움을 오히려 내실 다지기의 계기로 삼아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도록 전직원이 합심해서 노력하고 있다. 좋은 기업이 되겠다는 비전을 품고 변화를 추구하는 한 비씨카드는 언제나 젊을 것이다.

    (‘CEO 경영일기’는 이번호로 끝맺습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편집자)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