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환위기가 터졌다. 구조조정이 불가피했다. 우선 회사 사정을 투명하게 공개, 구조조정이 최선이라는 공감을 얻어냈다. 대상자들을 한 명씩 불러 “당신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자리를 없애야 하기 때문”이라고 간곡히 설득했다. 전직 알선 등 배려와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회사가 정상화되면 꼭 다시 부르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구조조정은 성공했고, 재도약의 발판도 마련됐다.
“회장실에서 당신을 삼성과 GE의 합작회사로 승진 발령하겠다네. 해외 합작회사 근무, 그리고 해외사업 총괄경력 때문이라는구먼….”
거나하게 취한 이필곤 사장의 목소리였다. GE와 최초로 인연을 맺는 순간이었다.
삼성을 거쳐 GE라는 세계적인 기업의 한국 사장이 될 때까지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참으로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아왔다. 나 스스로도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사랑과 정성으로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하며 자신을 낮추고 배우고자 하는 자세로 매사에 임하려 했다.
역경은 덤으로 얻는 기회
GE에선 나를 ‘CW Lee’로 부른다. 나는 내 이름 이니셜을 “Challenge and Win, CW입니다”라고 소개한다. 그러면 다시 만난 외국인들은 내 이름을 기억했다가 “Challenge and Win, CW!”라며 반갑게 맞아준다.
나는 학창시절이나 직장생활을 할 때나 늘 도전(Challenge)해서 극복(Win)하고자 노력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형편이 어려워 철공소에서 기술을 배우려 했다. 그러나 운좋게 장학생으로 선발돼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고2 때부터 가정교사 노릇을 하며 어렵사리 공부를 계속했다. 그런 만큼 얼른 학교를 마치고 군청의 5급 공무원(지금의 9급)이 되는 게 꿈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다행스럽게도 4년 학비 전액을 지원받는 영남대학교 천마장학생으로 선발돼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등록금은 면제됐다지만 극심한 생활고로 중도에 학업을 그만둘 뻔도 했으나, 군입대 후 베트남전에 파병돼 모은 돈 덕분에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이런 역경을 극복하면서 나는 그저 힘들어만 하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기회를 덤으로 얻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나님이 나와 항상 함께하며 나를 인도하고 내게 손을 내민다’는 성경 시편 23편은 늘 내 기도 제목이었다. ‘덤으로 얻은 인생’이라는 생각은 나로 하여금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뭔가를 배우려는 자세를 갖게 했고, 아무리 어려운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게 했다.
삼성과 GE에 근무하는 동안에도 늘 공부하고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 후배들에 귀감이 되고자 했다. 바쁜 중에도 밤 시간 등을 이용해 성균관대 무역대학원, 한국외대 어학연수원, 고려대 국제대학원,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그리고 서울대 경영대 최고경영자 과정 등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토인비가 역사는 ‘도전과 응전(Challenge and Response)’이라고 했던가. GE에서도 도전과 극복은 계속됐다. 처음 GE와 삼성의 의료부문 합작회사를 맡았을 당시 회사는 존폐의 기로에 서 있었다. 설립 6년 만에 자본금은 반 이상 잠식됐고, 수원 공장은 가동률이 27%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비전이 보이지 않으면 조기에 정리하고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직원들에게 차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전 임직원들에게 “모두 사표 쓰고 죽을 각오로 회사를 살려보자”고 호소했다.
5년간 연평균 46% 성장
그래도 한편으로는 사업을 정리해가지 않으면 안 됐다. 공장과 생산시설을 매각하고, 130여 명의 생산인력은 삼성 관계사에 자리를 마련해줬다. 그리고 100명도 채 되지 않는 판매·서비스·마케팅 인력만 서울로 이전시켰다. 그런 다음 회사측에 “이 비즈니스는 인류에 공헌할 수 있고, 삼성의 이미지를 제고하기에 좋고, 고수익도 올릴 수 있는 하이테크 사업이므로 계속해야 한다”고 건의했더니 맡아서 해보라고 했다.
그러나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인사·총무·수입·마케팅·판매·해외사업 총괄 등을 거친 내 경력으로 첨단 제품인 의료기기 사업을 하려니 막막하기만 했다. 먼저 합작비율을 재조정해 경영권을 확보했다. 그리고 영업·기술·개발·생산 부문의 전문가들을 물색, 이들과 머리를 맞댄 끝에 국내시장에 적합한 품목으로 초음파 의료기기와 CT(컴퓨터단층촬영기)를 골라 GE와 기술이전 협의에 들어갔다.
SKD(Semi Knockdown·수입국의 부품을 일부 끼워넣어 조립하는 방식)와 CKD(Complete Knockdown·부품 전체를 수입해 조립하는 방식)로 시작한 초음파 의료기기 생산 실적은 GE와 삼성 모두의 기대치를 훨씬 뛰어넘었고, 마침내 자체모델 개발에 성공해 두 회사를 놀라게 했다. 이들 제품을 GE 네트워크를 활용해 전세계로 수출, 숨통을 틔운 결과 과거에 내보낸 인력들도 다시 불러들일 수 있게 됐다. 이들 제품은 그 어렵던 외환위기 때 회사를 먹여 살리는 젖줄 노릇을 했고, 지금도 연 1억달러의 고수익을 안겨주고 있다.
국내 매출과 서비스 부문도 급성장해 지난 5년간 연평균 46% 성장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낳았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삼성전자보다 10% 정도 더 높은 수준의 급여를 줄 수 있게 됐을 뿐 아니라 복리·후생 면에서도 최고의 대우를 해줄 수 있게 됐다. 이같은 성과는 몇 가지 요소가 상호작용을 일으켰기에 가능했다.
첫째는 과감한 구조조정이었다. 가동률이 27%밖에 안 되는 공장을 폐쇄하고 인력을 60% 이상 줄였다. 둘째, 사표를 쓴 뒤 거듭난다는 각오와 결의를 가지고 조직원이 하나가 되도록 했다. 셋째, 핵심역량에 적합한 새로운 제품 발굴과 그에 맞는 비전을 창출하고자 했다. 넷째, 새로운 비전을 달성할 수 있도록 직원들의 열정과 도전정신을 이끌어내고, 지식경영에 근거하여 전원이 참여하게 했다. 다섯째, 결과에 대한 보상을 분명하게 해줬다.
“CW가 또 왔다. 이번엔 몇 명일까…”
겨우 한숨 돌리며 이제 좀 여유있게 일할 수 있겠구나 했더니 GE의 파울로 프레스코 부회장(현 피아트자동차 회장)이 삼성그룹에 편지를 보냈다. “CW를 GE로 보내주든지, 아니면 파견이라도 해달라”는 것이었다. 성장 잠재력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던 GE의 동남아·태평양 지역 시장을 내게 맡길 요량이었다. 이건희 회장의 재가를 받아 난 결론은 파견이었다.
파견 근무는 1996년 여름, 오래 전 내가 파월장병으로 복무했던 베트남에서 시작됐다. 그 이튿날 동남아·태평양 본부가 있는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13개국을 관리하는 동남아·태평양 본부는 다양한 업무와 언어, 갖가지 인종들의 집합조직으로서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갖추고 있었다.
우선 각국별 인력을 정비하고 우수한 인재를 채용하면서 조직을 확대했다. 사실 성장전략을 전개하는 건 쉽다. 승진기회가 많은 만큼 직원들은 신바람이 나고, GE라는 이름 덕분에 우수한 인재도 많이 몰려들었다. 부품센터에서 이익이 나므로 재원을 확보하는 데도 별 문제가 없었다. 부임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성장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GE 본사에서는 한국에서와 같은 또 하나의 기적을 기대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1997년 하반기 들어 내 관할지역 중 하나인 태국에서 외환위기가 시작됐다. 이어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심지어 호주, 뉴질랜드, 싱가포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어제까지의 확대전략을 축소전략으로 갑작스럽게 180도 선회해 구조조정을 해야 했다.
경영자로서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사람을 내보내는 일이다. 내 손으로 채용한 사람을 1년도 안돼 내 손으로 내보내야 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불가피한 일이었다. 1단계, 2단계, 3단계 재편계획을 세운 뒤 각국을 순회하면서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내가 사무실에 나타나면 직원들은 불안한 낯빛으로 수군거렸다. 현지어라 알아듣지는 못해도 분위기는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CW가 또 왔다. 이번엔 몇 명일까…”라는 뜻이었다. 이렇듯 고통스런 구조조정을 어렵사리 마무리지었다. 동남아·태평양 본부는 그후 매년 말에 실시하는 직원 만족도 조사에서 아시아 최고 수준인 76%로 표창을 받기도 했다.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투명성이다. 회사가 처한 어려움을 전 직원에게 알리고,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최선책이 구조조정이라는 것을 진솔하게 설명해 공감과 동의를 얻어냈다. 둘째, 구조조정 대상자들의 명예를 존중했다. 그들을 한 명씩 불러 “당신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자리를 없앨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 때문”이라는 점을 간곡히 설득했다. 또한 대상자 선별을 최대한 공정하게 했다. 셋째, 구조조정 대상자의 전직(轉職)을 적극 알선하고 그들에 대한 배려와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넷째, 그들과의 인간적인 관계를 존중했고, 회사가 정상화되면 꼭 다시 부르겠다고 분명하게 약속했다.
구조조정을 끝내고 귀국을 결심하고 있을 즈음 GE에서 새로운 제안을 해왔다. 파견 형태가 아니라 아예 GE에 몸을 담으라는 제안이었다. 고심 끝에 26년간 일해온 삼성을 떠나기로 했다.
1998년 말부터 새로 맡은 자리는 GE 초음파 의료기기의 아시아 총괄사장이라는 중책이었다. 고객에 대해 직접 서비스를 제공하는 판매·유통·광고 등의 다운스트림(downstream) 인력이 420여 명, 시장조사·디자인·연구개발 등의 업스트림(upstream) 인력도 390여 명이나 되는 큰 조직이었다.
이곳에서 4년 연속 연평균 30% 이상의 고성장을 이룩한 것은 내게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줄 수 있는 훌륭한 스태프들과 함께 신바람나는 조직문화를 만들어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I Love U/S(Ultrasound·초음파), Catch the Wave, Win Every Order’ 등의 슬로건을 내걸어 조직을 활기차고 강하게 만들었다. 강력한 인센티브 프로그램을 실시한 것도 주효했다.
분기마다 미국 본사에서는 제프 이멜트 회장(당시는 GE메디컬시스템스 사장)이 주재하는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지역별 평가가 이뤄지는데, 3개 지역본부 중 아시아본부가 가장 높은 성장을 한 것으로 평가됐다. 제프는 내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CW, 좀더 해낼 수 없을까” 하며 내게 힘을 실어주곤 했다. 그는 GE 회장에 취임한 뒤 1년이 안돼 나를 GE코리아 사장으로 발탁, 30억달러가 넘는 규모의 비즈니스를 맡겼다.
정직과 성실이 GE의 힘
지난해 5월 귀국해 총괄 사장의 임무를 맡은 이후 나는 몇 가지 중점 활동사항과 목표를 정해놓고 있다.
첫째, 30억달러인 한국의 사업규모를 50억달러로 키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내부 성장뿐만 아니라 기업의 인수·합병을 통한 신규 사업 개발도 강화할 생각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이 투자하기 좋은 곳이라는 사실을 본사에 끊임없이 설득해야 한다.
둘째, ‘하나의 GE’다. GE의 17개의 법인체와 합작회사가 고유의 비즈니스 특성에 맞게 활동하되, GE라는 동일한 정체성 아래 하나의 GE를 이루는 것이다.
셋째, 직원들의 만족도를 높이는 일이다. 그러자면 직원들이 회사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을 갖고 신바람나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넷째, 선진경영 기법을 한국 기업에 전수함으로써 한국 기업의 발전에도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각종 매체와의 인터뷰, 외부협회·단체 및 대학 경영자과정 강의 등을 통해 미력하나마 봉사하고 싶다.
아울러 지역사회 발전에도 헌신하고자 한다. 전세계 10여 개 나라에 75개 이상의 지부와 3만6000여 명의 회원을 갖고 있는 GE의 봉사단체 ELFUN(Electrical Fund)을 통해 사회봉사활동을 적극 지원하고자 한다. 한국에서도 이미 200명의 회원이 모였는데, 올 연말까지는 500명을 확보할 계획이다. 나 자신도 작은 도움이나마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자 강사료 등은 모두 주위를 돌아보는 데 사용하고 있다.
125년 동안 GE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지속적인 혁신을 통해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정직과 성실이다. 나 또한 정직과 성실을 바탕으로 공사를 분별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많은 사람의 지혜를 모으고자 한다. 오늘도 내 마지막 직장인 GE에서의 소망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또한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