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기는 기회다. 시련은 값진 경험이다. 자신감만 있으면 못 해낼 일이 없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롯데에 뼈를 묻고 40년을 뛰었다. 사막의 모래바람도, 외환위기의 거친 파도도 그렇게 뛰며 이겨냈다.
건설 현장을 둘러보는 임승남 사장(오른쪽). “매일처럼 전국의 현장을 누비는 게 즐겁기만 하다”고 한다.
이런 시장 상황을 반영하듯 최근 기업들은 너나 없이 불필요한 투자와 지출을 줄이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생산활동에 필수적인 부분을 제외한 비용은 최소화하거나 아예 없애고, 신규 채용에도 인색하기만 하다.
그런데 요사이 내가 자주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위기는 기회다”라는 것이다. 위기라고 위축되거나 좌절하지 말고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아 위기 자체를 극복하자는 말이다. 물론 기회가 그냥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위기에 대비해 역량을 키워둔 사람만이 이런 순간을 기회로 이용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한 개인에게 필요한 것은 꾸준히 준비하는 업무 수행 태도 및 이와 관련된 학습일 것이고, 기업에게 필요한 것은 탄탄한 재무개선 활동과 첨단 기술력, 영업 노하우 확보 등일 것이다.
얼마 전 최근 10년간의 대기업 순위 변화에 대해 다룬 신문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선두를 달리던 재벌이 순식간에 10위권 밖으로 밀려나거나, 심지어는 아예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경우도 허다했다. 이러한 변화는 점점 더 가속화하고 있어 이젠 그 누구도 기업의 내일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이는 쉼없는 자기 혁신의 노력이 없으면 언제든지 도태될 수 있음을 입증한다.
올해로 나는 직장생활 40주년을 맞는다. 국가 산업 근대화와 함께한 나의 청춘 시절을 뒤돌아보면 자기 혁신의 노력이 있었기에 나 자신은 물론 내 주변과 내가 몸담고 있는 기업도 꾸준히 발전하지 않았나 싶다.
모래바람과 ‘밑 빠진 독’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것은 연세대학교 화공학과 4학년이던 1964년이다.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롯데그룹 공채 1기로 입사해 일본 롯데연구소에서 근무했다. 이곳에서 나는 초콜릿, 껌 등을 생산하는 일부터 배웠다. 그후 롯데제과, 롯데칠성음료 이사와 롯데잠실건설본부장 등을 거쳐 1998년 4월 롯데건설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롯데건설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1년 롯데건설 중동본부장을 맡으면서였다. 롯데건설의 전신인 ㈜평화건업이 중동 건설붐을 타고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벌인 해외 사업의 수습 책임자로 발령되어 중동으로 날아갔는데, 당시 그곳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형국이었다.
국내 건설업체들 사이의 지나친 경쟁과 이에 따른 덤핑 수주, 공사와 관련 없는 무리한 클레임 등으로 복마전을 빚고 있었다. 직원들의 사기도 저하되어 이직률이 30%에 이르렀고, 무사안일과 적당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적자가 얼마나 되는지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을 만큼 자금관리에도 문제점이 많았다.
나는 부임하자마자 현장 내 인화단결을 도모하고, 기강확립을 통한 적당주의의 배격, 각 현장의 구체적인 적자 파악, 자금 조달의 일원화, 정확한 수주 원가 계산 등 해외공사 정리작업을 펼쳤다. 잠시도 자리에 앉아 있지 않고 현장을 뛰어다닌 결과 밑이 보이지 않던 ‘문제 공사’들이 하나하나 해결되어갔다. 그 결과 총연장 111㎞의 알랴마니아-아담 간 연결도로, 리야드 공군본부 지하사령부, 제다 공업단지 등을 성공적으로 완공했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사 여건상 신규 수주를 중단하고, 진행중인 사업장에 총력을 기울임으로써 더 이상 손실이 커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새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는 것보다는 기존 사업장을 무사히 정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불어닥치는 거센 모래바람, 마치 밑빠진 독이라도 되는 것처럼 끝도 없이 새나가는 각종 비용 등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아찔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런 시련이 결국에는 큰 기회이자 좋은 경험이 됐다. 쉴새없이 쏟아지는 땀방울을 연신 훔쳐대며 인내를 배웠다. 리야드 공군본부 지하작전사령부를 원자폭탄이 떨어져도 끄떡없게끔 짓고, 끝없는 모래벌판 위에 도로를 닦으면서 수준 높은 시공 기술을 축적했다. 생각해보면 엄청난 무형의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중동에 진출해 있던 세계 유수의 건설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쌓아올린 기술이 오늘의 롯데건설을 있게 한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한다.
롯데건설 사장으로 부임한 1998년은 내로라하는 국내 건설회사들이 하나 둘 쓰러져가던 외환위기 무렵이었다. 그해 롯데건설은 건설회사의 능력을 가늠하는 시공능력 순위가 19위에 불과했고, 토목공사 등을 중심으로 하다 보니 주택 시공의 비중은 낮은 편이었다.
롯데건설에 와서 맨 먼저 착수한 것이 아파트의 브랜드화였다. 앞으로는 단순히 시공사의 이름을 갖다붙인 아파트가 아니라 각각의 아파트가 가진 독특한 컨셉트를 브랜드화해 아파트를 지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서울 잠실 롯데월드 석촌호수에 있는 아름다운 작은 성(城·Castle)에 착안해 1999년 업계 최초로 ‘롯데캐슬’이라는 브랜드 아파트를 시장에 내놓았다. 브랜드 포지셔닝(brand positioning)을 고급화와 차별화에 두고, 고급 아파트 수요층을 집중 공략한 것이다. 그런 개념의 브랜드를 처음으로 적용한 서울 서초동의 ‘캐슬84’는 평당 분양가가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1000만원이 넘었음에도 순식간에 100% 분양이라는 대박을 터뜨렸다.
‘롯데캐슬’ 브랜드는 롯데가 지닌 고급스런 이미지를 성의 그것과 연계한 것인 만큼 아파트 외벽을 화강석으로 시공해 성의 느낌을 강조했고, 호텔에서나 받을 수 있는 고급 서비스를 아파트에 적용해 입주자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아파트’ ‘△△빌리지’로나 불리던 아파트 시장에서 처음으로 브랜드를 사용한 것은 당시로서는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외환위기로 다들 어려운 시기에 평당 1000만원이 넘는 아파트를 분양하는 것은 무모하다는 주위의 반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소비자의 요구를 정확히 파악한 브랜드화, 고급화 전략은 크게 성공해 결과적으로 롯데건설을 또 한번 도약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후 계속적으로 분양에 성공하면서 롯데캐슬은 고급 아파트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Service·Smart·Smile
롯데에 근무한 40년 동안 롯데의 주력사업 부문이라 할 수 있는 유통, 호텔 등의 서비스 정신이 몸에 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손님을 만나거나 제품을 선보일 때면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입할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 일환으로 2000년 봄에 ‘LSP(Lady’s Service Part·여성고객 서비스 전담반)’를 조직했다. LSP는 건설회사가 가진 거칠고 딱딱한 이미지를 깨고, 건설업계의 고질적 약점으로 지적돼온 미흡한 애프터서비스를 개선하기 위해 만든 조직으로 건축 및 설비를 전공한 30대 주부들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이들은 서울, 부산, 대구 등지에서 맹활약하고 있으며, 사소한 시공에서 구조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여러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아파트 하자 관련 고객 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처음엔 이들이 입고 있는 빨간 제복 때문에 ‘보험 아줌마’ 등으로 오인받기도 했지만, 이제는 입주민들이 아파트에 문제가 생기면 남자 시공기술자보다 먼저 LSP를 찾는다고 한다.
회사 밖에 LSP가 있다면 회사 안에는 ‘3S 운동’이 있다. 3S는 롯데건설 직원들이 가져야 할 세 가지 기본 태도를 지칭하는 운동으로, ‘Service(봉사)·Smart(단정)· Smile(친절)’을 의미한다. 고객에 대한 서비스를 최우선으로 하면서 항상 단정한 태도와 웃음을 잃지 않는 밝은 얼굴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우리 롯데건설은 그 절반도 안 되는 시기에 강산 이상을 변화시켰고, 이제 또 다른 큰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1998년 3000여 가구에 불과하던 분양 가구수가 지난해엔 1만3000가구로 4배 이상 증가했다. 매출도 2배 이상 증가해 올해 매출 목표는 2조원에 이른다.
나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 있으면 못 할 일이 없다. 지난날 중동에서 사막의 모래바람과 맞설 때도, 외환위기를 이겨낼 때도, 소비자 만족을 위해 고민할 때도 나를 지탱해준 것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그래서 예순을 한참 넘긴 나이에도 매일처럼 전국을 누비며 현장을 챙기는 게 즐겁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