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호

왕실 주방장은 총리급, 인간의 젖 먹여 키운 돼지요리

  • 글: 고광석 중국문화연구가 keyesko@hanmail.net

    입력2003-07-30 11: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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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중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중국 관련 책들이 넘쳐나고 있지만 중국 음식에 관한 책은 별로 없다.
    • 중국은 삶의 요소를 ‘의식주’가 아닌 ‘식의주’라 표현할 만큼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고 음식 문화가 발달해 있다.
    • 중국인에게 음식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이고 중국 역사 속에서 음식문화는 어떻게 자리잡았을까.
    왕실 주방장은 총리급, 인간의 젖 먹여 키운 돼지요리
    언젠가 필자는 중국인 친구에게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민족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대답 대신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중국 사람은 먹느라 돈을 없애고 한국 사람은 옷 사 입고 집 옮기느라 없애고 일본 사람은 저축하느라 없앤다’는 것.

    우리가 흔히 삶의 요소를 압축해서 말할 때 의식주(衣食住)라고 하는 데 비해 중국인들은 식의주(食衣住)라고 한다. 그만큼 중국인들은 먹는 데 관심이 많다.

    우리의 지난날을 돌아보면 양반 집이든 아니든 밥상 앞에서의 투정은 용납되지 않았다. 우리 역사 속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훌륭한 위인들도 미식가와는 거리가 멀었고 하나같이 ‘쓴 나물이 고기보다 맛있다’고 노래하곤 했다. 임금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는 다르다. 중국 역사상 명군으로 이름난 청(淸)나라 강희제(康熙帝)만 해도 미식가로 유명하다. 이름난 학자나 예술가, 정치가 중에도 식도락가가 즐비하다. 실제로 황제의 수라상이 얼마나 요란한지는, 청나라 말기 서태후에 대한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돼지 허벅지고기 50근, 돼지 한 마리, 양 한 마리, 닭과 오리 각 두 마리를 재료로 한 각종 요리와 과일은 기본이고 여기에 강소(江蘇)의 조유(糟油), 진강(鎭江)의 준치, 하남(河南)의 유차(油茶, 밀가루 소뼈 생강 땅콩 참깨 따위로 만든 죽), 절강(浙江)의 꿀대추, 옥천산(玉泉山)에서 길어온 물 등이 ‘유난을 부리지 않은’ 서태후의 한끼 밥상이었다.



    계절에 따라 황제의 혀를 만족시키기 위한 노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예를 들면 부춘강(富春江)의 시어를 나르는 특급작전이 그것. 그물에 걸려든 시어를 산 채로 황제에게 올리기 위해서는 3000마리의 말과 수천 명의 사람이 동원된다. 황실과 강까지의 거리가 1300km나 됐기 때문에 1000마리를 나르면 겨우 네댓 마리가 살아남았고 그 중에서도 황제가 직접 먹게 되는 것은 한두 마리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 음식이 바로 청증시어(淸蒸?魚)다.

    이렇듯 중국인에게 먹는다는 것은 황제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예로부터 의식동원(醫食同源)이고 음화식덕(飮和食德)이라고 생각했다. 의약과 먹는 것은 뿌리가 같고, 마시고 먹는 일은 덕이라는 뜻. 의식동원은 중국의 한약재 점포에서 인삼, 녹용 등의 각종 한약재와 상어 지느러미, 말린 전복, 해삼, 오징어 등의 건어물들을 함께 취급하고 있는 것만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인에게 마시고 먹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그리고 역사에 음식문화가 어떻게 자리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정치의 중심에 선 음식

    ‘서경(書經)’을 보면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기자(箕子)가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설명하는 말이 나온다.

    “나라를 다스리는 여덟 가지 사항의 으뜸은 먹는 것이요, 둘째는 재물이다.”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은 이것을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왕은 백성으로 하늘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王以民爲天 民以食爲天).”

    우리나라 역대 왕조는 잦은 기근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500년 정도는 유지해왔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북방 유목민의 침략이 없어도 굶주린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왕조는 멸망했다. 참을성 많기로 소문난 중국 사람도 굶주림만큼은 못 참았던 것. 지금의 공산당 정권이 들어설 때도 당시의 국민당 정권이 썩었기 때문에 스스로 무너졌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가진 자들의 것을 빼앗아 나눠준다는 공산당의 약속이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끌어들이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현재 중국 지도층의 첫째 관심사도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는 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수천만 명의 백성이 굶주리며 죽는 것을 목격한 진보파들은 사회주의의 한계를 깨달았고, 그 돌파구로 도입한 것이 바로 개혁과 개방이었다.

    그뿐 아니다. 동아시아인의 정신세계를 수백 년 이상 지배해온 유교의 교조 공자와 맹자도 그 가르침에서 음식타령을 빠뜨리지 않았다. 맹자는 일찍이 “맛있는 음식과 예쁜 여자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했고 공자는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은 없으나 참맛을 아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공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논어’의 향당편(鄕黨篇)에서 음식을 바르게 만들어 먹는 요령에 대해 자상한 가르침을 남기기도 했다.

    “쉰밥이나 상한 생선은 먹지 말라. 색깔이나 냄새가 나쁜 것은 먹지 말라. 익지 않거나 제철이 아닌 것은 먹지 말라. 반듯하게 자른 것이 아니면 먹지 말라. 간이 맞지 않은 음식은 먹지 말라. 식욕이 당기는 대로 고기를 먹지 말라. 몸가짐이 흐트러질 정도로 술을 마시지 말라. 제사에 쓴 고기는 사흘을 넘기지말라. 먹을 때 말하지 말라.”

    또 중국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음식을 만드는 조리사가 상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왕실의 주방장은 지위가 매우 높았다. 재상(宰相)이라는 글자의 재(宰)는 집안을 뜻하는 갓머리 밑에 요리용 칼을 뜻하는 신(辛)자가 어우러져 만들어졌다. 고대 국가에서 제사는 중요한 국가적 행사였고 이를 주재하는 주방장은 곧 국가의 총리급 인물이었던 것. 하(夏)의 6대 임금인 소강(少康)이 한때 왕실의 주방장이기도 했다. 이처럼 고대 중국은 역사의 출발점에서부터 정치와 음식문화가 깊숙이 관계되어 있었다.

    음식 사치로 나라 기울어

    전한(前漢) 때의 환관(桓寬)이 지은 ‘염철론(鹽鐵論)’이라는 책에는 은(殷)의 기자(箕子)가 세상을 걱정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주왕(紂王)이 상아로 젓가락을 만든 것을 보고 기자는 “상아로 젓가락을 만들어 사용하려면 그릇은 옥그릇을 써야 할 것이고, 그릇이 옥이면 아무 음식이나 담아 먹을 수가 없어 진귀한 요리를 만들어 먹을 것이다. 이렇게 사치스런 생활을 하다 보면 나라를 망치지 않겠는가?”고 말하며 은나라의 어두운 장래를 예언했다. 음식 사치가 지나친 것을 보고 이미 나라가 기울 것임을 알았던 것.

    진(晋)나라 무제(武帝) 때에도 나라를 망칠 정도의 사치스런 음식 문화가 있었다. 하루는 무제가 사위인 양수(羊琇)의 집에 초대받았다. 통째로 삶은 돼지가 나왔는데 그 맛이 각별해서 비법을 물어보니 인간의 젖을 먹여 키운 것이라고 대답했다. 현재 일본에서는 맥주를 먹이고 마사지를 하며 키우는 소가 있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이미 1700년 전에 한 수 위의 사육법이 있었던 것이다.

    진(晋)나라 혜제(惠帝) 때 기근이 매우 심한 적이 있었다. 굶어 죽는 백성들이 많다고 신하들이 말하자 혜제는 “백성들은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고기죽을 끓여 먹으면 될 텐데”라고 한탄했다. 백성들의 고달픈 삶에 대한 이해가 이 정도니 나라가 온전히 지탱하란 어려운 일이다.

    역사적으로 위진남북조시대라 일컬는 이 시기는 중국 역사상 매우 암울했던 시대로, 어진 이(竹林七賢)들이 대나무 숲에서 술을 마시며 세상을 걱정했던 때다.

    또 종종 밥상에서 받는 차별이 나라를 망치기도 했다. 중산국(中山國) 왕은 연회를 베풀면서 양으로 국을 끓였는데 양이 모자라 사마자기(司馬子期)에게 국을 주지 않았다.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한 그는 위나라의 힘을 빌려 중산국을 쳤다. 중산국 왕은 그제야 “양고기국 한 사발 때문에 나라를 망쳤구나” 하고 탄식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또 전국시대에 송(宋)의 장군 화원(華元)은 전쟁에 나가기 전날 밤 양을 잡아 군사들을 배불리 먹였는데 자기가 타는 전차를 모는 부하를 깜박 잊고 부르질 않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부하는 다음날 전투가 시작되자 화원을 태우고 곧바로 적진으로 돌진했고 화원은 포로가 되고 말았다. 화원 장군의 옛일을 기억하고 있는 중국인들은 지금도 기사들의 식사를 챙겨주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왕실 주방장은 총리급, 인간의 젖 먹여 키운 돼지요리

    위진남북조 시대 주방을 그린 풍속화

    춘추전국시대는 7개의 강국이 대립하며 패권을 다퉜다. 각국의 지도자들은 천하의 인재를 불러모아 손님으로 모시고 그들의 재주를 활용했는데, 그 중에서도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은 식객이 3000명이 넘었다. 그 중에는 별의별 재주를 가진 인물들이 많았다고 한다. 어느 날 풍훤(馮?)이라는 가난뱅이가 맹상군을 찾아왔다.

    “무슨 특기라도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나 맹상군은 웃으면서 그를 받아 들였다. 다른 식객들은 그를 업신여겼고 그에게 나오는 음식도 좋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하루는 풍훤이 기둥에 기대어 칼을 두들기며 노래를 불렀다.

    “나의 긴칼이여, 돌아가자. 나의 밥상엔 고기 한 점 없구나.”

    이를 전해들은 맹상군의 지시로 그의 상에는 고기가 오르게 됐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칼을 두들기며 다시 노래를 불렀다.

    “나의 긴칼이여, 돌아가자. 여기선 가족을 먹여살릴 수가 없구나.”

    그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안 맹상군은 모자가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후 맹상군은 식객들을 모아놓고 자기의 영지인 설(薛) 땅에 가서 빚을 받아올 사람을 찾았다.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는데 풍훤이 자기가 해결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곳에 가서 채권문서를 거두어들인 다음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풍훤이 돌아오자 맹상군이 물었다.

    “빚을 받아왔는가?”

    “빚을 받아서 의(義)를 사왔습니다.”

    맹상군은 기가 막혔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맹상군의 명성을 시기한 제(齊)의 민왕(泯王)은 그를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맹상군이 갈 곳은 설 땅밖에 없었다. 가는 길에 맹상군이 풍훤에게 “그대 덕분에 내가 돌아갈 곳이 마련됐구나”고 말했다.

    풍원은 “꾀 많은 토끼는 도망갈 굴을 세 개쯤 마련해둡니다. 대인께서는 이제 겨우 한 개밖에 마련하지 못했으니 제가 두 개를 더 마련해보겠습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풍훤은 양(梁)나라로 가서 혜왕(惠王)에게 말했다.

    “제나라는 훌륭한 재상을 놓쳤습니다. 어느 나라고 맹상군을 맞이하면 강국이 될 겁니다.”

    혜왕이 맹상군을 재상으로 영입하려 하자, 제나라 민왕은 맹상군에게 사과를 하고 다시 재상의 자리에 서게 했다. 풍훤은 맹상군에게 제나라의 종묘를 설 땅에 세우도록 권했다.

    “선대 임금의 종묘를 모시면 임금이 공격하지 않을 겁니다. 이것으로 대인은 세 개의 굴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훗날 많은 대신들이 임금의 공격을 받았지만 종묘를 모시고 있는 맹상군은 안전할 수 있었다.

    중국요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궁보(宮保)라는 단어는 원래 왕자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뜻하다가 훗날 국가에 공을 세운 대신들에게 주는 호칭으로 사용됐다. 궁보라는 수식어가 붙은 대표적인 요리가 궁보계정(宮保鷄丁, 궁바오지딩)이다. 궁보계정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仁者 이름 딴 궁보계정·동파육

    19세기 중엽 청나라의 정보정(丁寶楨)이라는 인물이 산동에 근무할 때 공을 세워 궁보(宮保)의 명예를 얻었다. 그 후로 사람들은 그를 정궁보(丁宮保)라고 불렀는데, 그가 궁보의 명예를 얻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당시의 실권은 자희태후(慈禧太后)에게 있었다. 그는 중국 역사상 3대 악녀(한 고조의 황후 여후(呂后), 당의 무측천(武則天), 그리고 청의 서태후다) 중 하나다. 나라가 망할 때 언제나 그렇듯이 서태후도 태감(太監, 내시)들에게 너무 의지해 나랏일을 그르쳤다. 안덕해(安德海)라는 태감은 그의 절대적인 총애를 믿고 대신들까지도 부하 다루듯이 했다.

    참다 못한 대신과 왕족들이 일제히 탄핵하자 태후도 어쩔 수 없어 그를 비밀리에 지방으로 보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지방 수령들에게 흠차대신(欽差大臣, 임금의 명을 받고 특별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파견된 고관)으로 행세하며 위세를 떨쳤는데, 그가 산동에 이르렀을 때 이곳을 다스리던 이가 바로 정보정이었다.

    정보정은 안덕해가 나타나자마자 체포해 목을 자르고 조정에 보고했다. 내시가 공식 허락 없이 대궐을 떠났기 때문에 처단했다고 분명히 밝힌 것이다. 태후도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태감이 공식적인 허락 없이 궁궐을 떠나는 것은 큰 죄에 해당했다. 안덕해의 처단으로 정보정의 이름은 전국에 널리 알려졌고 백성들의 칭송을 받게 됐다.

    왕실 주방장은 총리급, 인간의 젖 먹여 키운 돼지요리

    청증시어, 궁보계정, 마파두부

    그런데 당시에는 안덕해가 내시로 위장했을 뿐 사실은 멀쩡한 남자로 태후의 정부이기 때문에 그토록 위세가 당당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정보정은 그를 처단한 다음 벌거벗긴 시체를 사흘동안 길거리에 방치해 소문이 사실이 아닌 것을 입증하면서 태후의 체면을 세워줬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그에게 궁보의 명예가 주어졌다.

    그렇다면 이토록 대쪽 같은 정궁보가 궁보계정이라는 요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보자. 정궁보가 사천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고향인 귀주에 잠시 들렀다. 일가 친척들이 음식을 장만하느라 고생이 많을 것을 걱정한 그는 친척들에게 닭볶음이나 한 접시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요리사들이 그의 지시를 받아 정성 들여 개발한 닭볶음 요리가 바로 궁보계정이다. 계정(鷄丁)은 네모나게 썬 닭고기를 뜻한다. 원래 귀주요리였으나 정보정이 근무하던 사천 사람들도 먹게 됐고 이제는 분류상으로도 사천요리에 속하게 됐다.

    그에 앞선 송나라 시기, 정치가이자 위대한 문학가였던 동파(東坡) 소식(蘇軾)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호를 노도(老?), 즉 식탐 늙은이라고 했을 정도로 대단한 미식가였다.

    그가 항주(杭州)에서 태수를 지낼 때의 일이다. 당시 관리 소홀로 인해 서호의 일부가 메워지고 잡초만 자라 폐허가 되면서 저수지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이를 본 동파는 백성들의 힘을 빌어 서호를 완벽하게 복구했다. 항주 사람들이 이를 고맙게 생각해 그에게 돼지를 바쳤다. 백성을 사랑하는 동파는 돼지를 요리해 백성들과 함께 먹었고, 사람들이 그 돼지요리를 그의 호인 동파(東波)를 따 동파육(東波肉, 둥버러우)이라 부르게 됐다.

    음식 때문에 관직 버리기도

    그밖에도 음식과 얽힌 중국 역사의 에피소드는 무척 많다. 진(晉)의 장한(張翰)이라는 사람은 음식 때문에 관직을 버리기도 했다. 그는 낙양에서 벼슬을 살았는데 가을철이 되자 고향의 순채국(蓴菜湯)과 농어회(?膾) 생각이 간절했다. 그는 사표를 내던지고 천릿길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순로지사(蓴?之事)라 하면 고향 땅, 고향음식을 그리워함을 뜻하게 됐다. 우리 같으면 관직에 오른 이가 한낱 음식 때문에 관직을 버린 것에 대해 두고두고 비난하겠지만, 중국에서는 미식가의 한 표본으로 존경을 받는다고 한다.

    삼국시대 오나라의 왕 손책(孫策)과 대만의 장개석(蔣介石) 전 총통은 음식을 먹으면서 놀란 만한 판단력과 재치를 보이기도 했다.

    어느 날 손책은 사탕수수로 만든 시럽을 먹으려다가 그 위에 쥐똥이 떨어져 있음을 알게 됐다. 환관이 보관책임자를 파면시킬 것을 건의하자 손책은 책임자를 불러 물었다.

    “너는 저 환관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느냐?”

    그러자 “환관이 관물을 빌려달라는 것을 거절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이에 손책은 “쥐똥이 푹 젖지 않은 것으로 보니 이는 창고에서 가지고 오는 동안에 넣은 것”이라며 환관을 처벌했다.

    몇십 년 전 우리나라 고위정치인 중 한 사람이 대만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장개석 총통이 그를 위해 특별만찬을 베풀었는데, 식탁에 음식과 함께 손을 씻을 차가 담긴 그릇이 나왔다. 그는 별 생각 없이 이것을 마셔버렸고 이에 식탁 분위기는 갑자기 어색해졌다. 장총통은 얼른 자기 앞의 사발을 들어 자연스럽게 마셨다. 대만의 최고 권력자가 차를 마시니 다른 사람들도 감히 손을 씻을 수가 없었다.

    다민족 국가인 중국에서 음식은 민족화합의 수단이기도 했다.

    청나라 시절 만주족은 자민족 우대 정책을 시행했다. 연회에서도 이같은 질서는 엄격히 지켜져, 궁중요리도 만주식 연회를 뜻하는 만석(滿席)과 한족식 연회를 뜻하는 한석(漢席)으로 구분했다. 만석은 여섯 개, 한석은 다섯 개의 등급이 있었는데, 여기에 쓰이는 재료와 예산에 대해서 각각 규정이 정해져 있었다.

    이렇게 만석과 한석으로 구분되던 궁중음식이 만한전석으로 합쳐진 것은 청나라 강희제 말기 때다. 강희제는 자신의 회갑을 맞아 65세 이상 노인 2800명을 초청해 대연회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만석과 한석을 두루 갖춘 잔칫상을 가리켜 친히 만한전석(滿漢全席)이라 말했다. 그는 만족과 한족의 산해진미를 두루 갖춘 연회에 보다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

    지금까지 중국의 음식문화가 역사 속에 어떻게 자리했는지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음식문화와 인간의 심성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알아보겠다.

    기름지고 부드러운 중국음식을 맛보면서 우리는 중국인의 만만디(慢慢地) 성격과 중국어의 성조(聲調)를 떠올릴 수가 있다. 깊은 맛이 느껴지지 않고 두어 젓가락 먹으면 끝나는 일본음식의 상차림을 보면 우리는 겉과 속이 다른 섬나라 근성과 간지럽게 느껴지는 일본어를 연결지을 수가 있다. 투박한 보리 빵에 뭉툭한 소시지는 게르만족의 성격과 거친 발음의 독일어를 연상시킨다. 온갖 소스와 재료로 맛을 낸 프랑스나 이탈리아 요리를 먹으면 우리는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그들의 생활을 머리에 그릴 수가 있다.

    그러면 우리의 음식은 어떠한가. 우리의 입맛은 일제 침략 이후 격동의 현대사를 겪으면서 엄청나게 변했다. 우선 맛이 너무 강렬해졌다. 고추와 후추, 마늘 따위를 듬뿍 넣고 조리함으로써, 우리의 혀끝은 마비가 될 지경이다. 마늘과 고춧가루의 사용량으로 맛을 경쟁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 고추와 후추만 해도 우리 고유의 양념이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전해졌다는 설이 대체로 인정되고 있는데, 왜 이것들이 우리 식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양념으로 굳어졌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맵고 짠 음식을 주로 먹으면서 우리의 심성이 거칠어졌고 일상어에서도 된소리와 육두문자가 많아졌다.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에만 해도 있었던 부드러운 입술가벼운소리(△, , )가 사라진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 매운 요리로 유명한 지역 호남(湖南)과 사천(四川)은 혁명가의 본고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두 지역은 우리나라의 영호남 관계처럼 라이벌 의식이 강하다.

    사천에 매운 음식으로 마파두부(麻婆豆腐)가 있다면 호남에는 동안자계(東安子鷄)가 있고, 혁명가로 사천에 등소평(鄧小平) 양상곤(楊尙昆) 등이 있다면 호남에는 모택동(毛澤東), 유소기(劉少奇) 등이 있다. 이들의 경쟁관계에서 나온 말이 ‘파부라 부파라’이다.

    호남 사람들이 “우리는 매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不?辣, 부파라)”고 하면, 사천 사람들은 “우리는 맵지 않은 것을 두려워한다(?不辣, 파부라)”고 응수한다.

    그런데 두 곳의 매운 맛에도 약간의 차이는 있다. 호남요리는 입에 넣으면 혀끝에서 톡 쏘듯이 맵고 사천요리는 마랄(麻辣) 때문에 속이 얼얼하면서 맵다. 그래서인지 우리 한국사람들에게는 사천요리가 더 입에 맞는 편이다.

    호남성 출신의 모택동은 “매운 것을 먹지 않는 사람은 혁명을 말할 수 없다(不吃辣的東西的人 不能講對革命)”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중국의 건국 원로 중에 사천과 호남 출신들이 별나게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특히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영호남 출신들이 현대 정치사에서 굵직굵직한 역할을 했던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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