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흔히 삶의 요소를 압축해서 말할 때 의식주(衣食住)라고 하는 데 비해 중국인들은 식의주(食衣住)라고 한다. 그만큼 중국인들은 먹는 데 관심이 많다.
우리의 지난날을 돌아보면 양반 집이든 아니든 밥상 앞에서의 투정은 용납되지 않았다. 우리 역사 속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훌륭한 위인들도 미식가와는 거리가 멀었고 하나같이 ‘쓴 나물이 고기보다 맛있다’고 노래하곤 했다. 임금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는 다르다. 중국 역사상 명군으로 이름난 청(淸)나라 강희제(康熙帝)만 해도 미식가로 유명하다. 이름난 학자나 예술가, 정치가 중에도 식도락가가 즐비하다. 실제로 황제의 수라상이 얼마나 요란한지는, 청나라 말기 서태후에 대한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돼지 허벅지고기 50근, 돼지 한 마리, 양 한 마리, 닭과 오리 각 두 마리를 재료로 한 각종 요리와 과일은 기본이고 여기에 강소(江蘇)의 조유(糟油), 진강(鎭江)의 준치, 하남(河南)의 유차(油茶, 밀가루 소뼈 생강 땅콩 참깨 따위로 만든 죽), 절강(浙江)의 꿀대추, 옥천산(玉泉山)에서 길어온 물 등이 ‘유난을 부리지 않은’ 서태후의 한끼 밥상이었다.
계절에 따라 황제의 혀를 만족시키기 위한 노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예를 들면 부춘강(富春江)의 시어를 나르는 특급작전이 그것. 그물에 걸려든 시어를 산 채로 황제에게 올리기 위해서는 3000마리의 말과 수천 명의 사람이 동원된다. 황실과 강까지의 거리가 1300km나 됐기 때문에 1000마리를 나르면 겨우 네댓 마리가 살아남았고 그 중에서도 황제가 직접 먹게 되는 것은 한두 마리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 음식이 바로 청증시어(淸蒸?魚)다.
이렇듯 중국인에게 먹는다는 것은 황제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예로부터 의식동원(醫食同源)이고 음화식덕(飮和食德)이라고 생각했다. 의약과 먹는 것은 뿌리가 같고, 마시고 먹는 일은 덕이라는 뜻. 의식동원은 중국의 한약재 점포에서 인삼, 녹용 등의 각종 한약재와 상어 지느러미, 말린 전복, 해삼, 오징어 등의 건어물들을 함께 취급하고 있는 것만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인에게 마시고 먹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그리고 역사에 음식문화가 어떻게 자리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정치의 중심에 선 음식
‘서경(書經)’을 보면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기자(箕子)가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설명하는 말이 나온다.
“나라를 다스리는 여덟 가지 사항의 으뜸은 먹는 것이요, 둘째는 재물이다.”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은 이것을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왕은 백성으로 하늘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王以民爲天 民以食爲天).”
우리나라 역대 왕조는 잦은 기근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500년 정도는 유지해왔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북방 유목민의 침략이 없어도 굶주린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왕조는 멸망했다. 참을성 많기로 소문난 중국 사람도 굶주림만큼은 못 참았던 것. 지금의 공산당 정권이 들어설 때도 당시의 국민당 정권이 썩었기 때문에 스스로 무너졌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가진 자들의 것을 빼앗아 나눠준다는 공산당의 약속이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끌어들이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현재 중국 지도층의 첫째 관심사도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는 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수천만 명의 백성이 굶주리며 죽는 것을 목격한 진보파들은 사회주의의 한계를 깨달았고, 그 돌파구로 도입한 것이 바로 개혁과 개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