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뿐 아니다. 동아시아인의 정신세계를 수백 년 이상 지배해온 유교의 교조 공자와 맹자도 그 가르침에서 음식타령을 빠뜨리지 않았다. 맹자는 일찍이 “맛있는 음식과 예쁜 여자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했고 공자는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은 없으나 참맛을 아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공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논어’의 향당편(鄕黨篇)에서 음식을 바르게 만들어 먹는 요령에 대해 자상한 가르침을 남기기도 했다.
“쉰밥이나 상한 생선은 먹지 말라. 색깔이나 냄새가 나쁜 것은 먹지 말라. 익지 않거나 제철이 아닌 것은 먹지 말라. 반듯하게 자른 것이 아니면 먹지 말라. 간이 맞지 않은 음식은 먹지 말라. 식욕이 당기는 대로 고기를 먹지 말라. 몸가짐이 흐트러질 정도로 술을 마시지 말라. 제사에 쓴 고기는 사흘을 넘기지말라. 먹을 때 말하지 말라.”
또 중국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음식을 만드는 조리사가 상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왕실의 주방장은 지위가 매우 높았다. 재상(宰相)이라는 글자의 재(宰)는 집안을 뜻하는 갓머리 밑에 요리용 칼을 뜻하는 신(辛)자가 어우러져 만들어졌다. 고대 국가에서 제사는 중요한 국가적 행사였고 이를 주재하는 주방장은 곧 국가의 총리급 인물이었던 것. 하(夏)의 6대 임금인 소강(少康)이 한때 왕실의 주방장이기도 했다. 이처럼 고대 중국은 역사의 출발점에서부터 정치와 음식문화가 깊숙이 관계되어 있었다.
음식 사치로 나라 기울어
전한(前漢) 때의 환관(桓寬)이 지은 ‘염철론(鹽鐵論)’이라는 책에는 은(殷)의 기자(箕子)가 세상을 걱정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주왕(紂王)이 상아로 젓가락을 만든 것을 보고 기자는 “상아로 젓가락을 만들어 사용하려면 그릇은 옥그릇을 써야 할 것이고, 그릇이 옥이면 아무 음식이나 담아 먹을 수가 없어 진귀한 요리를 만들어 먹을 것이다. 이렇게 사치스런 생활을 하다 보면 나라를 망치지 않겠는가?”고 말하며 은나라의 어두운 장래를 예언했다. 음식 사치가 지나친 것을 보고 이미 나라가 기울 것임을 알았던 것.
진(晋)나라 무제(武帝) 때에도 나라를 망칠 정도의 사치스런 음식 문화가 있었다. 하루는 무제가 사위인 양수(羊琇)의 집에 초대받았다. 통째로 삶은 돼지가 나왔는데 그 맛이 각별해서 비법을 물어보니 인간의 젖을 먹여 키운 것이라고 대답했다. 현재 일본에서는 맥주를 먹이고 마사지를 하며 키우는 소가 있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이미 1700년 전에 한 수 위의 사육법이 있었던 것이다.
진(晋)나라 혜제(惠帝) 때 기근이 매우 심한 적이 있었다. 굶어 죽는 백성들이 많다고 신하들이 말하자 혜제는 “백성들은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고기죽을 끓여 먹으면 될 텐데”라고 한탄했다. 백성들의 고달픈 삶에 대한 이해가 이 정도니 나라가 온전히 지탱하란 어려운 일이다.
역사적으로 위진남북조시대라 일컬는 이 시기는 중국 역사상 매우 암울했던 시대로, 어진 이(竹林七賢)들이 대나무 숲에서 술을 마시며 세상을 걱정했던 때다.
또 종종 밥상에서 받는 차별이 나라를 망치기도 했다. 중산국(中山國) 왕은 연회를 베풀면서 양으로 국을 끓였는데 양이 모자라 사마자기(司馬子期)에게 국을 주지 않았다.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한 그는 위나라의 힘을 빌려 중산국을 쳤다. 중산국 왕은 그제야 “양고기국 한 사발 때문에 나라를 망쳤구나” 하고 탄식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또 전국시대에 송(宋)의 장군 화원(華元)은 전쟁에 나가기 전날 밤 양을 잡아 군사들을 배불리 먹였는데 자기가 타는 전차를 모는 부하를 깜박 잊고 부르질 않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부하는 다음날 전투가 시작되자 화원을 태우고 곧바로 적진으로 돌진했고 화원은 포로가 되고 말았다. 화원 장군의 옛일을 기억하고 있는 중국인들은 지금도 기사들의 식사를 챙겨주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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