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현 위기에서 벗어나 경제회생의 길로 접어들기 위해서는 성장전략의 수정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체제개혁 또는 체제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 북한의 경제위기는, 성장전략이라는 표면적 원인 배후에 존재하는 경제체제라는 심층적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7월1일부터 실시되고 있는 북한의 경제개혁 조치는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박순성 교수는 ‘7·1 조치’를 일시적인 경제정책의 수정이라기보다는 시장경제로의 체제전환이라는 역사적 과정의 출발점으로 파악한다. 7·1 조치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가격과 임금의 현실화(가격 인상 및 상대가격 체계의 조정)인데, 이는 북한당국이 ‘관료적 조정기구’의 붕괴와 암시장의 만연이라는 상황에 대처해 경제운영을 정상화하기 위해 취한 조치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를 ‘계획경제의 정상화’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의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실제로는 경제의 시장화·화폐화의 출발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박교수의 진단이다. 북한당국이 가격체계를 조정할 때 의거한 원칙인 수급법칙, 생산원가, 국제가격은 사실상 시장원리의 인정에 불과하다. 이처럼 비록 부분적이긴 하지만 시장원리를 도입하지 않고서는 경제를 정상화할 수 없다는 인식에 도달했다는 것은 북한 역시 시장경제로의 체제전환이라는 보편적인 역사 과정에서 예외가 될 수 없으리라는 전망을 가능케 한다.
이 대목에서 박교수는 남북경협의 역할이 지대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체제전환의 기본은 물론 내부체제 개혁이지만 그 과정에서 대외경제 관계의 개선이 매우 큰 촉진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남한이야말로 북한에게 가장 중요한 대외적 파트너가 될 잠재력을 갖고 있다. 남북한의 지리적 인접성, 언어적·문화적 동질성, 산업구조상의 보완가능성 등을 고려할 때 남북경협은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매우 큰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줄 잠재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
‘한반도 통일의 정치경제학’ 서술
그러나 남북경협이 바람직하다는 추상적 일반론에만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우리가 가진 시간과 자원은 희소하기 때문에 남북경협을 어떤 방식으로 진행해야 최선의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지 보다 철저히 고민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박교수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유일한 정부간 협의체를 구성하고 있는 두만강지역개발계획이 갖는 의미를 결코 경시해서는 안 된다”(260쪽)고 말하고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북한의 두만강 유역이 갖는 의미는 크지 않다.
이용가능한 자원과 노력은 개성공단처럼 남북관계의 발전 잠재력이 훨씬 더 큰 곳에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 또 지난 수년간 유라시아 횡단철도가 남북 및 동북아 경제협력의 중심사업으로 흔히 거론돼왔으나 이것 역시 현실성이 부족한 이야기다. 북한경제의 재건과 남북경협의 발전에 훨씬 더 시급한 과제가 많기 때문이다. 유라시아 횡단철도는 그런 과제들이 어느 정도 수행되고 난 후에나 고려해볼 만한 장기적 사업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포인트는 남북경협은 북한의 체제개혁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체제개혁과 연관되지 않은 남북경협은 성공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남북관계 발전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북한의 경제체제가 좀더 시장지향적인 방향으로 개혁돼야만 자본주의적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남한의 기업들이 수익성 있는 대북사업을 전개할 수 있다. 또 남한 기업의 기술과 경영기법이 북한으로 전파되면서 북한의 체제개혁을 촉진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물론 북한의 개혁·개방, 남북경협의 발전, 이를 통한 평화통일 기반의 조성은 박교수가 강조하고 있는 대로 동북아, 나아가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새로운 국제질서의 형성을 통해서만 실현가능할 것이다. 이 책의 3부가 단순히 민족 정체성의 재발견이 아니라 동아시아 공동체와 인류 공동체까지 아우르는 포괄적 시각을 요구하는 ‘한반도 통일의 정치경제학’을 서술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한반도의 장래에 대해 언론보도 수준의 단편적·피상적 정보를 뛰어넘어 근본적인 전망을 얻고자 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이 책은 당분간 필독서로서의 자리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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