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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 취재

‘현대판 茶母’들의 맹렬 활약기

조폭 잡는 주부 형사, 시체 들쑤시는 처녀 형사

  • 글: 강지남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layra@donga.com

‘현대판 茶母’들의 맹렬 활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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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연(28) 순경도 서울 노원경찰서 형사당직반의 막내이자 유일한 여형사다. 지난해 3월 경찰에 입문해 파출소에 근무하다가 ‘조르고 졸라’ 형사반으로 발령을 받았다.

“사람 얼굴에 글씨 쓰여 있는 건 처음 봤어요. 형사반에 갔더니 남자 선배들 얼굴에 글씨가 쓰여 있더라니까요. ‘너·여·기·왜·왔·니’라고. 에라, 나도 모르겠다 하면서 당직반에서 버틴 지 6개월 째예요. 아직 나가라는 말 들은 적 없으니까 제가 잘 하고 있는 거 맞죠?”

박순경은 형사반에 발령받자 ‘인생에 날개를 단 기분’이었다고 한다. 대학시절, 넉넉지 않은 형편 탓에 주유소 종업원, 식당 설거지, 중국집 배달, 학습지 교사, 백화점 점원 등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그때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배운 것들이 경찰 업무를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런저런 시비 끝에 경찰서까지 오게 된 사람들을 다독거릴 때가 그렇다. 취객에게 정강이를 걷어차인 적도 있고, 박순경 앞에서 다짜고짜 바지를 확 내려버린 술꾼도 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박순경의 ‘밤손님’ 다루는 노하우는 노회하기 그지없다.

“가령 막무가내로 욕설을 퍼붓는 아저씨들에겐 일단 더 심한 욕설로 맞받아칩니다. 막내 누이 같은 여경한테서 그런 욕설을 들으면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순간적으로 당황하게 되죠. 그때부터 살살 달래는 거예요. 사람 본성이란 게 그리 나쁘지 않거든요. 그렇게 하면 이내 고분고분해집니다.”

서울 중랑경찰서 강력2반 김성순(33) 경장은 대학교 2학년 때 교정에 굴러다니는 신문을 펴들었다가 여경들로 구성된 수사대 발대식 사진을 보고 ‘바로 이거다’ 싶어서 그날부터 여경모집 공고만 눈 빠지게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정기적으로 여경을 모집하진 않았기에 졸업하고 1년이 지나서야 모집공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렵사리 꿈에 그리던 경찰이 됐지만, 여기대에 빈 자리가 나지 않아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야 했다. 교통계와 경비대 등에 근무하면서도 틈만 나면 “여기대 들어가고 싶어 경찰이 됐다”는 말을 퍼뜨렸다. 기회는 경찰 입문 2년이 지난 1997년 여름에 찾아왔다.

김경장은 서울경찰청 여기대 소속 형사가 되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간, 아동 성폭행, 가정폭력, 갈취, 공갈 등 대여성범죄를 수사했다. 여형사 4명이 영화관 앞에서 강간범을 검거하던 순간은 지금 떠올려도 아찔하다. 키가 180cm가 넘는 ‘덩치’인 범인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여자들이 형사임을 눈치채자 격렬하게 반항했다. 4명이 사방에서 달려들어 팔 다리를 붙잡고 곤봉을 휘두르며 20여 분 동안 격투를 벌인 끝에 겨우 제압할 수 있었다.

“경찰이라고 여러 번 외쳤는데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전혀 도와주지 않더라고요. 아, 우리의 시민의식이 이 정도구나 싶어서 실망도 컸습니다.”

김경장은 강력4반 박상준 반장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일선 경찰서 강력반에서 수사 능력을 키우고 싶다는 자신의 바람을, 평소 ‘여경도 강력반에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해온 박반장이 흔쾌히 들어준 것. 지난해 7월 강력반으로 옮긴 김경장은 지난 3월 국민대 법학과(야간)에 입학했다. “형사도 법을 알아야 한다”는 박반장의 배려 덕분이다.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수업을 듣고 다시 경찰서로 돌아와 새벽 업무를 보는 팍팍한 생활이지만, 김경장은 “오랜만에 하는 공부가 너무 재미있다”며 강한 의욕을 내비쳤다.

“시체 위에 누워볼까요?”

여경이 형사·수사과에 발령받기가 쉬운 일이 아닌 만큼 ‘나는 여자가 아니라 경찰이다’ ‘남자들과 똑같이 일할 수 있다’는 인식을 확고하게 심어줘야 기회가 온다. 때문에 평소 자신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남다른 의지를 드러내야 한다.

충북 충주경찰서 중부지구대에 근무하는 박은경 순경도 어떻게든 형사과에 발령받기 위해 ‘눈도장 찍기 작업’을 적극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7월 경찰이 된 박순경은 ‘작업’의 일환으로 교통지도계 내근직에서 파출소 외근직으로 자진해서 부서를 옮겼다. 파출소에서 순찰을 돌면서 외근 경험을 쌓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초동수사에 끼여들어 형사과 선배들에게 눈도장 찍을 기회가 많을 것이란 계산에서다.

“충북 제천경찰서에 근무할 때는 형사계로 발령을 내달라며 석달 동안 형사계장을 쫓아다녔어요. 그러니까 ‘너 시체 손가락을 절단할 수 있겠니?’ ‘형사라면 시체 옆에서도 밥을 먹을 수 있어야 한다’고 겁을 주시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시체 위에 누워볼까요?’라고.”

한번은 형사계장이 변사사건 현장으로 박순경을 불렀다. 한 여성이 기차에 깔려 사지가 절단된 철도사고였다.

“저를 테스트하는 걸로 믿고 부지런히 사고현장을 둘러보며 뼛조각, 안구, 내장 등을 찾아다드렸어요. 이번에는 뽑아주겠지 하고 기대했는데, 그래도 ‘형사계에 여경은 필요없다’고 하시더군요.”

박순경은 근무처를 옮기자마자 형사과장과 인사를 나누면서 “꼭 형사가 되고 싶다”고 자기 홍보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말만 앞세워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요즘은 수사업무에 필요한 지식을 쌓고 있는 중이다. 검문받는 사람의 지문을 눈으로만 보고 전산망에 뜬 지문과 재빨리 대조·확인하는 훈련도 하고 있고, 범인 검거 사례나 수사기법에 관한 책도 열심히 읽는다. 그는 “음주운전이 적발된 순간 도망치는 운전자를 쫓아가 잡는 일이며, 자신의 몸을 더듬는 취객 상대하는 일도 쉽지는 않지만, 내근 업무보다는 훨씬 재미있고 보람도 크다”고 할 만큼 타고난 ‘바깥 체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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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지남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lay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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