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능 입증 안 된 C₄I 체계 구입하려 한 한국, 이를 말리려 개입
- 96년 강릉에 좌초한 북한 잠수함 항로 백대령에게 알려준 후 FBI에 체포
- 백대령에게 단 한 푼의 돈도 받지 않았다
- 변호사 선임 잘못해 형량 가중
- 플리 바긴(Plea Bargain) 악용하는 미국의 검사들
- 나를 외면한 김영삼 대통령과 주미 한국대사
- 미국 시민이지만 한국을 사랑했다
저는 1995년부터 주한 미국대사관에 근무하는 백동일 대령을 알고 지냈습니다. 그후 한미 해군 고위 장교들 간의 만남이 있을 때마다 한미 장교들은 화기애애하게 대담했습니다. 한미 고위 장교들 간에 기밀로 취급될 수 있는 것이 오고가기도 했습니다. 미국 장교들은 저와 백동일 대령을 감시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미국측에서 더 적극적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기밀 취급자도 출입하지 못하는 상황실에 한국 장교를 들어 갈 수 있게 해주었고, 그 안에서 브리핑을 받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시 미묘한 한미관계 때문인지 1996년 강릉에 좌초한 북한 상어급 잠수함의 사고 전(前) 항해경로를 백대령에게 전화로 알려준 후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미국 해군은 한국 해군에 C₄I와 관계된 컴퓨터 시스템을 팔려고 매우 노력했습니다. 저는 C₄I와 관계된 컴퓨터 시스템을 개발한 팀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그것이 어떠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때 한국 해군이 이 시스템을 구매했다면 지금쯤은 먼지만 쌓여 있는 고물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시스템의 계약 부서는 계약을 위한 모든 서류를 준비해놓고 한국에서 온 방문 팀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팀의 한 분을 사무실 밖으로 불러내어 “이번에 계약하지 말고 한국에 돌아가서 시간을 갖고 논의한 후 한국에 맞는 요구 성능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나서 구매하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미국 시민이라 미국에 충성해야 하지만, 이 시스템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그날은 계약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한국은 제가 교도소에 들어간 지 한참이 지난 후 이 시스템을 구입했다고 들었는데, 현재 제대로 가동되고 있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저는 한국이 미국 시스템이 아니라 한국에 맞는 독자적인 C₄I 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해왔습니다. 동맹국이 제공하는 정보 중에는 한국에 필요 없는 것도 있을 수 있으며, 동맹국 사이에도 정치적 혹은 기술적 이유로 시스템을 일체화시키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에 이러한 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는 인재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던 중에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담당했던 시스템은 C₄I이 아니라 해상을 통한 마약류 등의 밀수입과 불법 체류자의 밀입국을 차단하며 해상에서 사고가 일어났을 때 이를 발견해 조속히 구조(Search and Rescue)하는 일을 지원하는 시스템입니다. 이 시스템은 미국 연안을 중심으로 개발된 것이지만 인재가 있다면 한국 실정에 맞게 독자 개발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 이러한 시스템을 독자 개발한다면 동맹국인 한국과 미국이 극동 지역의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미국에 충성하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한미 관계를 더욱 증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가진 제가 미국 해군의 눈 밖에 난 것 같습니다.
은퇴할 시기가 다가온 저는 부모님과 가까운 곳에서 근무하기 위해 태평양사령부 쪽으로 파견해줄 것을 희망했습니다. 그러던 중 태평양사령부가 있는 하와이 호놀룰루에 제게 맞는 자리가 있어서 신청했는데, 미 해군성 정보국장은 신청서를 기각했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FBI의 감시대상이라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정보국 인사과에서도 정보국장의 지시라고만 할 뿐, 왜 기각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왜 미국 군사기밀을 백대령에게 주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쁜 일정 때문에 백대령을 만나기도 어려웠지만 각자의 신분 때문에 직접 만나는 것을 삼갔습니다. 저는 제 데스크톱 컴퓨터에 비밀로 분류된 채 올라오는 한반도 정세를 검색(retrieve)해서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이 알아야 할 정보들이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나가고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미국이 한반도에 관한 정보를 동맹국인 한국에 제공하지 않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미국이 그것을 감춘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술적 결함 때문이었다면 시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판단해봐도 그 정도의 정보는 감출 필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정보가 왜 한국으로 가지 않는지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컴퓨터의 비밀 지정 프로그램(Routing Indicator Software)이 잘못됐다고 판단한 저는 비밀등급(classified level)과 각 문서를 제작한 사람의 이름과 조직명(provider’s name and organization)을 삭제한 다음 프린트해서 우편으로 백대령에게 보냈습니다.
이러한 정보의 대강(大綱)은 미국의 국내 신문이나 영국의 ‘제인스 리포트(Jane’s Report, 군사 관련 세계적인 전문지)’의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더러는 그러한 도메인에 올라와 있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백대령이 회고록(‘신동아’ 2003년 5월호에 실린 백동일씨의 육성 수기)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저는 제가 보낸 자료 중 한국 해군 작전에 유익한 것이 많이 있기를 바랐습니다.
제가 제공한 정보는 미국 해군 정보국의 시스템에서 비밀(classified)로 분류된 것들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군사기밀을 유출한 셈이 되었고, 검사는 저를 군사기밀 수집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기밀 수집은 스파이 행동입니다. 그러나 저는 기밀을 수집한 것이 아니라, 제 책상 위에 올려진 정보를 유출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저를 과대 평가해 체포했던 것입니다(검사와 변호사는 이에 대해 설명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미국 안보에 전혀 손해를 입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재판 때 미국 정부가 법정에 꼭 제출해야 하는 피해 추정보고서(Damage Assessment Report)를 제출할 수 없었습니다. 저도 당시에 그것이 법정에 꼭 제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 정도는 변호사가 알고 있었어야 하는데, 변호사들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건을 확대시켜놓은 후 그들은 체면을 살리기 위해 제 사건과 아무 관계 없는 것을 제시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기소장을 작성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기밀 분류 전문가는 ‘로버트김이 한국 해군에게 준 정보는 예민한 것(material)도, 기밀도 아니다’라고 신문에 기고한 바 있습니다.
검사의 위협과 흥정
미국에서 형사사건은 법정기간 내에 기소 여부가 결정되고 기소가 이뤄지면 법원은 법원의 스케줄에 따라 판결 날짜를 잡아 선고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법정 기간을 훨씬 넘긴 5개월 만에 기소되었습니다.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검사가 과대 홍보한 기소내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검사는 제게 제 생명을 위협할 만한 죄목으로 기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그 기소장을 가지고 배심원 재판을 하면 저는 영락없이 무기징역을 받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배심원의 결정이 법이나 판사보다 더 위에 있습니다. O. J. 심슨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배심원이 유죄라고 하면 유죄가 되고, 무죄라고 하면 무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배심원이 되는 줄 아십니까. 워싱턴DC에는 공무원이 많아 ‘애국자’인 이들이 배심원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배심원이 되면 저는 무기수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가 하지 않은 일까지 기소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더니 검사는 “배심원 재판을 하지 않을 테니, 좀 낮은 형을 부과하면 받겠느냐”면서 12년형을 제의했습니다. 저는 “내 나이에 12년형은 무기징역과 마찬가지”라며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간첩죄보다 가벼운 군사기밀 유출죄로 할 테다. 이것도 받지 않으면 처음으로 돌아가 배심원을 배석시켜 재판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후 검사가 작성해온 기소장에는 기밀유출이 아니라 기밀수집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검사는 미국이 지금까지 저를 믿고 최고 높은 비밀취급 인가를 내주었는데 그 신용을 남용했기 때문에 형량을 두 단계(30개월) 올렸다며, 이것이 인정될지 여부는 판사가 판단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판사가 기소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 자기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해서 저는 유죄를 인정했습니다.
저는 한국 교포 목사로부터 변호사를 소개받았습니다. 한국 목사가 소개해준 변호사는 앨 고어 부통령의 사촌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한국에 계시는 아버지께서도 모씨로부터 소개를 받았다며 “고어 부통령의 사촌이니 그를 변호사로 써라”고 했습니다.
2000년 8월 앨런우드 교도소로 면회온 아버지 김상영 옹과 어깨동무를 한 로버트김.
그런데 다음날 한국인 목사가 “두 변호사와 함께 한국에 가서 높은 사람들을 만나야겠다”며 한국에서의 일정표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즈음 판사는 “시간이 없으니 변호사를 바꾸는 것은 더 이상 용납하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목사는 두 변호사를 한국으로 데려가 제 아버지와 동생을 만나 변호사 비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게 준 한국 일정표는 다 거짓이었습니다. 단지 저에게서 한국에 갈 수 있도록 허가받기 위해 꾸민 연극이었습니다. 그들이 갖고 온 한국 방문 일정표에는 미국 의회의 표식(emblem)이 있었고, 일정에는 청와대 방문, 김종필 총리 방문, 김우중 회장 방문, 구자경 회장 방문과 함께 경희대에서 ‘인권을 위한 일을 했다’며 표창장을 받는다고 기록돼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높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어 있어서 저는 미국 의회의 허가를 얻어 공식 방문하는 줄 알고 “잘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수감자로서는 변호사가 곁에 없다는 것이 매우 예민한 문제였지만 공무인 줄 알고 수락한 것입니다. 그들은 한국에 가서 ‘부통령의 사촌이 변호인으로 나섰다’고 해 향응을 받고 변호사 계약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돌아온 고어 부통령의 사촌이라는 변호사는 메르세데스 벤츠 자동차를 새로 뽑았습니다.
그런데 한국 방문 전까지 “끝까지 좋은 결과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한 사람들이 한국에 다녀온 뒤 거의 만나볼 수 없을 정도로 냉랭해졌습니다. 변호사로부터는 항상 ‘다른 사건 변호 때문에 법정에 나갔다’란 메시지만 받았습니다. 어쩌다 구치소에 왔을 때 “왜 전화를 걸어주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구치소의 전화가 불통이었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다른 수감자들은 자신의 변호사와 전화통화를 하는데 말입니다.
당시는 제가 유죄임을 인정(guilty plea)한 후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제가 저지른 일의 증거를 다시 보게 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물적 증거는 모두 기밀로 분류돼 있어 변호사는 기밀취급 인가(security clearance)가 없으면 그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젊은 변호사는 그 증거들을 혼자 보고 와서는(정말 봤는지도 궁금합니다) 제게 “유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이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도 더 이상 저를 위해 시간을 소비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기밀취급 인가를 기각당한 고어 사촌이라는 변호사는 기밀을 보고 온 젊은 변호사 덕분에 제가 여러 정보기관으로부터 신문을 받을 때 변호인 자격으로 앉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었기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젊은 변호사를 보내라고 했더니 “그는 다른 일로 바쁘다”고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신문 기간이 다 지나가버렸습니다.
판사는 “미국 정부가 당신을 신임해 고급정보 취급허가를 내주었는데 당신은 그것을 남용했다”며 제게 신용 남용죄(Abuse of Trust)를 인정했습니다. 판사는 검사가 긴가민가하며 추가로 기소한 내용마저 수용해 형량을 두 단계 올려버렸습니다.
미국 형법에는 매 단계마다 최저형과 최고형이 있습니다. 저는 초범이라 최저형이 선고되기 때문에 제 형량은 87개월이 됩니다. 그런데 제 사건을 맡은 판사가 하필 시민권 선서를 주관하는 판사였습니다. 그는 제게 “1974년 시민권 선서를 할 때 한 말이 기억나느냐”고 묻고는 “그 선서는 당신이 태어난 나라에 해왔던 충성을 그 날로 끊고 새로이 택한 미국에 충성하는 서약”이라면서 “당신은 그것을 파기했다. 따라서 이를 묵과하면 다음에 미국 시민권을 받는 사람도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으므로 시민권 선서가 진실해지기 위해 당신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며 최고형인 108개월(9년)형을 선고했습니다.
제게 적용된 법률은 18USC Section 793(Gathering, Transmitting or Losing Defense Information : 군사기밀의 수집, 유출 및 누설죄)으로 법정 최고형은 10년입니다. 최고급 비밀을 수집한 경우에는 10년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2급 비밀을 수집했고, 초범이므로 97개월형을 선고받습니다. 게다가 유죄를 인정했기 때문에 3단계가 내려간 70개월형을 선고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비밀자료를 수집(Gathering)한 것이 아니라 단지 유출(Transmitting National Defense Information)한 것이기 때문에 더 낮은 형을 받아야 합니다. 최고급 비밀을 유출했으면 87개월형, 그 외의 것은 51개월형을 선고받는데, 유죄를 인정하면 다시 3단계가 내려가 37개월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시 이런 법 운용을 몰랐고 변호사도 잘 모르는 사람이어서, 검사가 죄목을 바꾸었는데도 저는 유죄를 인정해버렸습니다. 한번 유죄를 인정한 후에는 바꿀 수가 없다는데 말입니다. 검사는 아마 속으로 웃었을 것입니다. 저는 변호사의 면회를 거의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함께 앉아서 이러한 항목을 하나씩 읽어가며 상의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 후 5년간 몇 번 상소를 시도하려 했으나 제가 유죄를 인정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변호사가 아주 잘못한 것도 아니었고, 판사가 내린 시민권 선서 파기에 대한 형벌은 판사의 재량 사항인지라 9년형이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3시간 면회 위해 9시간 운전
워싱턴DC에 있는 우리 집에서 앨런우드 교도소까지는 자동차로 3시간 반 내지 4시간이 걸립니다. 쉬지 않고 운전할 때 그렇습니다. 거리로는 한국의 휴전선(155마일)보다 긴 190마일입니다. 미국에서는 통상 가족이 사는 곳으로부터 500마일 이내에 있는 교도소로 보내게 돼 있습니다. 판사는 저를 더 가까운 곳으로 보내라고 명령하였으나 저에게 맞는 형무소가 없었습니다.
‘워싱턴DC에서 2~3시간 떨어진 교도소로 로버트김을 보낸 것은 아내가 자주 면회 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죄수는 집에서 될 수 있는 한 먼 곳으로 보낸다. 뉴욕 마피아는 캘리포니아 감옥으로, 캘리포니아 마피아는 뉴욕 감옥으로 보낸다’는 금강산님의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뉴욕의 마피아들은 모두 펜실베이니아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저는 지난 6년 동안 앨런우드에서 캘리포니아 마피아를 한 명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환갑이 넘은 백발 노인인 제 아내가 앨런우드 교도소로 저를 면회 오려면 아침 일찍 떠나야만 오전 10시30분경 도착할 수 있습니다. 수속을 마치고 면회실에 들어오면 11시가 됩니다. 면회소는 오후 3시에 닫는데 면회 온 사람이 혼잡을 겪지 않고 돌아가려면 오후 2시쯤 헤어져야 합니다. 아내는 불과 3시간을 면회하기 위해 8시간 내지 9시간을 운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금강산님은 또 ‘한 교도소에 2년 정도 수감되면 다른 교도소로 보내는 것이 상례인데, 한 교도소에서 9년을 있게 하는 것은 특별한 배려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수감자가 골칫덩이가 아니면 그냥 한 곳에서 머무르게 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저보다 오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더러 봅니다. 또 남은 형량이 18개월 이하면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다른 데로 이송하지 않고 그대로 있게 합니다.
금강산님은 ‘앨런우드 교도소는 철조망 울타리가 없는, 미국에서 최고 좋은 교도소다. 집에서도 가깝고 한국의 중소 도시에 있는 호텔 같은 최고급 교도소에서 9년간 있게 한 것은 큰 배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호텔 같은 곳이 아닙니다. 10피트 높이의 철조망이 이중으로 둘러쳐져 있는 데다가 철조망 아래위의 면도날 철망(razor blade wire)은 사람의 접근을 막고 있습니다. 또 전자감지장치(electronic detector)가 설치되어 있어 철조망을 만질 수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순찰차가 24시간 순회하는데 약 15분마다 한바퀴씩 도는 것 같습니다. 수감자가 건물 바깥에 있을 때는 이 순찰차 외에 다른 차가 와서 총알을 장전한 총과 비디오 카메라로 수감자들을 감시합니다.
이곳은 카펫이 깔린 호텔이 아닙니다. 매우 차가운 비닐 타일이 깔려 있는 곳입니다. 매트리스는 두께가 3인치 정도인데 오래된 것들이라 다 뭉개져 있습니다. 막사는 4개 동인데 각 동의 정원은 256명이나 336명입니다. 수감자의 70% 이상은 불법 입국 혐의 등으로 미국 밖으로 추방될 사람들인데 이들은 자기 나라 말로 떠들어대기 때문에 매우 시끄럽습니다. 창문이 있긴 하지만 밖으로 열리진 않습니다. 창문과 문은 이중의 굽은 유리(flex glass)로 되어 있는데, 10cm 간격으로 2인치 굵기의 파이프가 박혀 있어 사람의 머리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밤에는 야간 경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환한 보안등이 방을 비춥니다. 때문에 머리를 벽 쪽에 파묻고 자야 합니다. 교도관들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이 환한 불빛을 가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너무 예민한 탓인지 화재경보기가 종종 울리는데 그때는 강한 불빛까지 번쩍여 매우 신경에 거슬립니다. 어떤 날에는 취침중에 소방훈련(fire drill)을 한다면서 막사 밖으로 나가게 합니다.
아침 6시부터 저녁 8시 반까지 매시간 10분 동안 문을 열어두는데 다른 건물로 가야 하는 사람들은 이때 이동해야 합니다. 이 시간을 놓치면 영창에 가게 되는데, 영창에 가면 최소한 한 달은 살아야 합니다.
막사 안의 점호는 밤 12시, 새벽 3시, 새벽 5시, 오후 4시 반 그리고 밤 9시에 합니다. 이곳은 안개가 자주 끼는데 안개 낀 날 아침에는 점호를 한번 더 하게 됩니다. 점호시간에는 말을 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야 하고, 오후 4시 반과 주말 아침 10시 점호 때는 반드시 서 있어야 합니다. 새벽 점호 때는 교도관들의 무거운 군화 소리와 철그럭거리는 열쇠 뭉치(key chain) 소리 때문에 매우 신경이 거슬립니다.
이곳은 용서가 없는 곳입니다. 잘못했으면 영창에 들어가야 합니다. 교도관들은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개인 사물함(locker)을 뒤집니다. 수감자가 갖지 말아야 하는 것이 나오면 다 거두어갑니다. 심지어는 식당에서 쓰던 수저와 포크도 가져갑니다. 식당에서 나올 때는 주머니를 뒤집니다. 면회를 마치면 옷을 홀딱 벗기고 구멍이란 구멍은 다 조사합니다.
(작성일 2003년 8월 20일)
파산선고, 세금 환급금 몰수
알프스님은 제가 사회보장연금 혜택을 받게 되고, 세 아이들로부터 매월 300달러의 보조를 받을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또 제가 개인 은퇴연금을 갖고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1966년 유학생으로 미국에 와서 그냥 주저앉았습니다. 1970년부터 NASA(미국 항공우주국)에서 계약 담당자(Contractor)로 일했으나 월급이 적어 FICA(사회보장세금)을 많이 내지 못했습니다. 미국에서 사회보장연금 혜택을 받으려면 10년 이상 FICA를 내고 일정한 나이(qualifying age)에 도달해야 합니다. 1940년생인 저는 65세가 되어야 연금을 신청할 자격이 생깁니다.
그런데 저는 1974년에 미국시민권을 받았고 1978년부터는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FICA를 내지 않고 공무원 연금을 붓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회에 나가 3년 이상 일하면서 FICA를 낸다면 사회보장연금을 받을 수 있겠지요.
저는 두 딸과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이제 곧 가정을 이룰 아이들에게 매달 100달러씩 보내라고 강요할 순 없습니다. 저는 빠듯한 월급 탓에 개인연금을 부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체포되기 전에는 신용도가 좋아서 생활하는 데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적게 벌어 적게 썼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교도소에 들어온 후부터는 수입이 없어져 파산선고를 해야 했습니다. 그후로는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없게 되었고 신용카드는 물론이고 자동차나 집도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파산선고를 한 때가 1998년입니다. 7년 후인 2005년 한번 신용카드 개설을 신청해보겠습니다. 그러나 전과자이기 때문에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파산선고를 할 때 파산할 수 없는 항목이 하나 있습니다. 교육비로 빌린 것(Dept of Education)이 그것입니다. 이 돈을 갚지 못하고 있었는데 2년 전 미국 교육부는 최후 통첩을 보내왔습니다. 그 후 아내는 정부에서 받을 수 있는 세금 환급금(Fax Refund)을 몰수당했습니다. 저는 집도 없고 자동차도 없습니다. 약간의 재산은 아내의 생활비와 변호사 비용으로 다 써버렸습니다. 현재 아내가 사는 작은 연립주택은 우리 아들이 사준 것입니다.
저는 출소한 후 제 능력으로 일해서 먹고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출소해 제가 직장을 가질 때까지 환갑을 넘은 아내는 후원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내는 교회의 허드렛일을 하며 번 돈으로 영치금을 넣어주기도 했지만, 지금은 건강이 나빠져 일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일을 제대로 못하는 집사람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 동안 한국 후원회 회장이 매월 보내주는 얼마간의 돈이 제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2003년 7월27일 로버트김 후원회에서 감사의 인사를 하는 부인 장명희 여사
저에게 과도한 형벌을 준 검사도 이런 검사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는 재판이 끝난 후 항소하지 못하게 해놓고 제 사건이 종결되자 사직해버렸습니다. 저는 앨런우드 교도소 안에 있는 법률도서관에서 혼자 연구한 결과 다른 방법으로 항소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하지만 후임 검사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제가 항소할 때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이를 가로막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은 이기고 또 이겼습니다만, 이러한 검사들 때문에 미국은 수감자 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가가 되었고, 교도소는 정원 초과로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수감자 수는 10년 전 수감자의 두 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제가 유죄를 받은 것은 제가 저지른 잘못 때문만은 아닙니다. 저는 미국정부와 의견이 달랐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제가 백대령에게 우편으로 보낸 자료들은 비밀등급 지정(Routing Indicator)이 제대로 되어 있었다면 자동적으로 한국에 갈 정보였습니다. 저는 비밀등급 지정이 잘못됐으니 시정하자는 제의를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제가 백대령에게 보낸 자료는 모두 한반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한국의 동맹국인데 왜 미국이 한반도에 관한 정보를 한국에 감추어야 합니까?
교도소에 있는 동안 서울 용산의 미군 정보실에 한국 장교가 함께 일하게 되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제가 체포될 당시에 한국 장교가 미군정보실에 함께 일했더라면, 제가 왜 백대령에게 이런 정보를 따로 주었겠습니까. 제가 체포된 다음에야 미국은 자신들이 잘못해왔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 같습니다. 저를 너무 죄인 취급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스파이 아니다”
저는 스파이가 아닙니다. 저는 한국으로부터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저를 두고 애국자니 영웅이니 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저 한국의 앞날을 걱정했을 뿐입니다.
중국계 리웬호 박사가 미국의 원자탄 기술을 중국에 빼돌렸다는 혐의로 체포됐을 때, 미국에 사는 중국 교포들은 그를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말 그대로 ‘요란’이었습니다. 중국 정부도 공식적으로 미국을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허위라는 것이 드러나자 담당 검사는 파직되었습니다. 리웬호 박사는 담당 판사로부터 사과를 받고 석방되었습니다.
저와 똑같은 형법 조항(18USC793)으로 기소되었던 중국계 피터 리(Peter Lee)는 10개월형을 받고 출감했습니다. FBI의 협조자로 활동하다 몇 달 전 체포된 중국계 카타리나 륭(Katarina Leung)의 경우에는 도주의 위험이 있는데도 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제 경우에도 한국 교포들이 중국 교포들처럼 ‘요란’하게 항의해주었더라면 석방되었거나 아주 가벼운 형량을 받았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대통령부터 워싱턴DC의 한인회장까지 모두 금강산님이나 알프스님 같은 이론으로 무장해 저를 비난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100% 환영받지 못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에서 냉철한 머리보다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앞으로 노력할 것입니다. 잘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사람, 주기보다 받기만 하는 사람,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 겸손하지 못한 사람, 그리고 미래를 내다볼 줄 모르는 사람…. 이러한 사람들이 한국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한국에는 아직도 진정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후원회 자금은 여러 사람들이 부어준 사랑의 결실이기 때문에 이것이 교육에 쓰이면 더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따뜻한 가슴을 가진 인재가 많이 배출되길 바랍니다. 두서 없는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 인용하겠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언 3:5)”
(작성일 2003년 8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