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역의원 용퇴론은 거대야당 한나라당의 8개월 뒤 운명을 좌우할 실험이다.
- 소장파와 보수중진의 대립, 당 지도부에 대한 재선그룹의 반발, 소장파와 재선그룹의 갈등 등 다양한 충돌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움직임들이 세대교체 실험의 진행 추이와 성패 여부를 결정할 가능성이 크다. 최병렬 대표의 소장파 배후 조종설, 당지도부-소장파-재선그룹 막판 연대설, 한나라당 인적청산 실패설의 내막을 알아봤다.
9월4일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가 인적청상론을 주장해 파문을 일으킨 소장파 원희룡 의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조해진 한나라당 부대변인(서울대 법대·이회창 후보 보좌역 출신)은 김의원 지역구인 경남 밀양·창녕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내년 총선에 출마하려고 한다. 올해 들어 지역구 행사장에서 김의원은 조부대변인과 자주 만났다. 껄끄러울 수 있는 사이인데 김의원은 “선거라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 열심히 해라”고 조부대변인을 따뜻하게 격려했다. “김의원이 정말 마음 비우고 출마를 안 하려나 보다”는 말이 나왔다.
그런 김용갑 의원이 최근 말을 바꿨다. 대구유니버시아드 개막식이 열린 2003년 8월21일 김의원은 천안 한나라당 연수원에서 지구당원 1000명과 함께 당원연수회를 열었다. 이례적인 단합모임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2003년 총선 재출마를 강력하게 시사했다. 의외였다. 추석 연휴 때 조해진 부대변인이 김용갑 의원에게 인사를 갔다. 김의원은 “양보 없이 모든 것을 걸고 깨끗하게 경쟁하자”고 말했다. 마음이 달라졌음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다.
戰意 불태우는 김용갑
한나라당 탈당파 의원 5명이 대선 직후인 2003년 초 ‘대선 패배 5적, 10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여기에 김용갑 의원 이름이 포함됐다. “당이 지나치게 수구보수로 비치게 해 대선에서 졌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김의원이 여기에 자극받았다는 얘기가 있다. 이때부터 “쫓겨나듯 퇴진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이럴 바엔 명예회복 차원에서라도 재출마해야겠다”고 김의원이 생각을 고쳐 먹게 됐다는 것이다.
김의원이 출마의사를 밝힌 2003년 8월21일 직후부터 공교롭게 한나라당 개혁 성향 초선의원들이 ‘60대 이상 퇴진론’, ‘영남 물갈이론’, ‘5·6공 출신 퇴진론’을 거세게 제기하며 파문을 일으켰다. 이들 의원들은 퇴진 대상자로 김용갑 의원을 실명으로 지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개혁성향으로, 정보를 취합하는 자리에 있는 원희룡 기획위원장이 김의원의 8월21일 발언을 보고받았을 개연성이 없지는 않다. 분명한 것은 2003년 8월말~9월초 소장파측이 세대교체 파문을 동시다발적으로 일으킨 것은 당내 보수파 의원들의 움직임에 대한 역반응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다.
다음은 한나라당 한 의원의 말이다. “중진들 중 상당수는 스스로 용퇴하는 듯했다. 그래서 명예롭게 물러날 기회를 주자는 얘기도 많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선 김용갑 의원처럼 ‘유턴’해서 내년 총선에 다시 출마하려는 움직임이 뚜렷이 나타났다. 소장파들은 이런 사태변화를 미리 감지했으며, 세대교체론 띄우기는 이런 중진들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김용갑 의원의 반격은 만만치 않았다. 잘못된 사실관계를 토대로 김의원에게 ‘청산대상’이라고 직격탄을 날린 심재철 의원은 김의원에게 사과해야 했다. 밀양·창녕 지구당원들은 성명서에서 심의원의 의원직 사퇴와 탈당을 요구했다. 역시 직격탄이었다. 김용갑 의원은 연초부터 계속 개혁파의 표적이 되어 화살을 맞아오다 이제 ‘재출마 선언’을 하며 소장파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잘 단합되고 일사불란한 김의원의 조직에 소장파들은 놀랐다. 김의원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보수중진 밀어내기가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소장파들은 절감하고 있다.
정치신인 씨가 마른 TK
여론은 한나라당의 세대교체를 강하게 원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동아일보’ 등 각 일간지 여론조사에서 ‘5·6공 출신 퇴진’, ‘60세 이상 퇴진’은 60% 내외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사실 ‘60세 이상 퇴진’은 이성적이지 못한 주장이다. 그런데도 이런 주장에 많이 사람들이 동조했다는 사실은 음미해보아야 할 대목이다. 유권자들이 상당수의 한나라당 현역의원들에게 ‘맹목적 염증’을 느끼는 단계까지 왔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론이 원하는 대로 한나라당이 바뀔지는 의문이다. 평소 여론을 잘 수용하는 정당이었다면 이런 극단적인 여론 자체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장파 의원들과 이들에 동조하는 여론이 원하는 ‘정답’은 거의 나와 있다. 5·6공 때 정권요직에 있었던 경력, 고령, 영남출신의 다선, 수구에 가까운 지나친 보수 성향, 비리연루의혹, 수차례의 비례대표 경력 등 5가지 조건을 많이 충족시키는 순으로 우선적으로 물러나라는 것이다. 이 중 비리연루의혹은 가장 적극적으로 해석되는 퇴출 기준이고, 나이는 그 반대가 된다. 당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전체 한나라당 의원의 30.2%에 해당되는 45명의 의원들이 5가지 기준 중 두 가지 이상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단, 비리연루의혹이 있는 의원 두 사람은 다른 조건에는 해당되지 않았지만 포함됐음). 이 관계자는 “이들 중 최소 15~20명은 반드시 교체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국감이 시작되면 일시 소강상태를 맞겠지만 앞으로 연판장도 돌고 살생부도 돌 것”이라고 말했다.
당내 움직임과 관련, 지금 한나라당에선 두 가지 음습한 설이 나돌고 있다. 한나라당의 ‘세대교체 실패설’이 바로 첫 번째 설이다. 지난 8월말 한나라당 중진의원 10여 명이 여의도 한 중식당에서 저녁회식을 했다. “당내 세대교체 바람에 맞서기 위한 조직적 응전을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냐”는 얘기가 돌았다. 이들의 입장을 듣기 위해 일부 기자들이 식당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의원들은 의미 있는 얘기들은 하지 않고 밥만 먹었다고 한다.
한나라당 보수 중진의원들의 특징 중 하나는 ‘기자들과 TV카메라 앞에서의 침묵’이다. 소장파가 중진 퇴진론의 군불을 때는 것을 보면서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모르는 척한다.
그러나 ‘언론을 상대하는 일’을 제외한 나머지 역량에선 소장파를 압도한다는 것이 보수 중진들의 자신감이다. 60세 이상 고령, 5·6공 출신은 영남권 중에서도 특히 대구·경북에서 비율이 크게 높다. 대구 국회의원들의 경우 11 명중 9명이 60세 이상이다. 경북도 16명 중 10명이 60세 이상이다. 민정당, 5·6공 관료출신도 타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퇴진론’의 표적이 될 만하다. 그러나 TK는 ‘무풍지대’다.
경북의 A의원. 고령에 다선, 민정계다. 경선 때 강재섭 후보를 밀어 최병렬대표와도 친하지 않다. 그러나 공천 받지 못할 걱정은 하지 않는다. 도전자가 없기 때문이다. 경북의 B의원은 비리에 연루된 혐의를 받았다. 공천에 절대 불리한 조건이다. 그래도 걱정하지 않는다. B의원에게도 아직 경쟁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경북의 현역의원 16명 중 물갈이가 되는 의원은 수뢰혐의가 확정된 김찬우 의원 한 명뿐일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지난 3년 간 ‘개혁’성향을 보이지 않은 C의원. 최근 개혁성향 재선의원 모임인 ‘국민우선연대’에 열심히 참여한다.
배후설 시초는 7월 최대표 발언
대구 의원들도 대부분 사정이 비슷하다. ‘막강한 조직력’을 앞세워 철옹성을 구축해놓고 있다. 대구·경북 출신 전문가그룹이나 명망가는 많다. 그런데 왜 이들은 한나라당을 외면하는 것일까. 한나라당의 ‘국회의원 후보 공천 틀’이 신인에게 공정하게 작용하리라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경북 한 의원의 측근은 “어떤 공천 방식을 적용하더라도 대구·경북 현역 의원들은 막강한 조직력을 동원해 유리한 입지를 차지할 것이다. 이들을 낙천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TK 의원들과 전국 각지 민정계 출신 의원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사건이 최근 있었다. 한나라당 대표 경선이 바로 그것이다. 경선에서 3등을 한 대구 출신 강재섭 의원 측근의 말. “대구·경북 의원들이 같은 지역 출신인 강후보 대신 앞다퉈 최병렬 대표를 돕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그걸 보고도 못 막아서 안타까웠다.”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지난 6월 한나라당 경선 막바지 무렵, 서청원 후보의 한 측근은 서후보에게 “제발 전화 한 통 좀 하시라”고 통사정을 했다. 이 측근에 따르면 서후보는 최병렬 후보와 예측불허의 혼전을 겪고 있음에도 대구·경북 의원들에게 “도와달라”는 전화를 끝내 걸지 않았다. 서후보는 “대구·경북은 우리 당 깃대만 꽂으면 국회의원 되는 곳 아니냐”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이 서후보의 고집이었다. 상당수 대구·경북 의원들은 이러한 서후보를 ‘전폭적으로 외면’했고, 이는 최대표 당선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한 고위 당직자는 이렇게 말한다. “서후보는 대구·경북 의원들에게 빚진 게 전혀 없다. 서후보가 대표가 됐다면 그들이 편하게 국회의원이 또 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대표는 대구·경북 등 영남 의원들, 민정계 출신 중진들에게 경선 막판에 빚을 졌다. 최대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들 의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소장파는 대선후보 경선, 대표 경선 등 중요한 순간마다 늘 사분오열했다. 소장파 추진력에 대해 의심하는 눈길도 많다. 이런 점이 영남권 인물교체를 어렵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한나라당에선 세대교체론과 관련, ‘최병렬 대표의 소장파 배후조종설’도 나온다. 서청원 대표도 비슷한 견해를 ‘우먼타임스’ 인터뷰에서 밝혔다. “경선 전 최대표가 소장파 의원들과 개별 접촉해 ‘나를 밀면 당 개혁, 세대교체 문제 등에서 소장파의 입지를 최대한 배려하겠다’고 약속해 지지를 이끌어냈다”는 것이 배후조종설의 요지다.
소장파가 잠잠하던 때였던 7월2일 최대표는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부패하고 부도덕한 사람, 반민주적인 사람, 나이 많은 형님, 기회주의적 세력이 우리와 동거해왔다. 우리가 이들에게 피난처를 마련해주는 우를 범했다”고 말한 것이다. 흥미 있는 대목은 이날 최대표가 열거한 퇴진 대상은 두 달 뒤 소장파가 제시한 4가지 퇴진조건(비리혐의 연루자, 5·6공 정권 협력자, 고령자, 영남의 다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우연일까. 현재 세대교체론을 설파하는 소장파들 상당수는 최대표에 의해 주요 당직에 임명된 경우가 많다. 최대표는 2000년 총선 공천 때 중진 낙천을 주도한 윤여준 의원을 총선기획 담당 여의도연구소장으로 9월3일 발탁했다. 최대표와 윤의원은 김영삼 정부 때 청와대 정무수석, 정무비서관으로 손발을 맞춘 경험이 있다.
한나라당 인적청산에 찬성하는 여론이 50%를 넘고 있다. 최대표 등 한나라당 의원들이 당특위 개최에 앞서 약식회의를 하고 있다.
문제는 최대표가 스스로 “힘 없는 대표”라고 말했듯 최대표의 파워가 실제로 막강하지 않다는 점. 예를 들어 최대표는 공천권 행사의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될 ‘운영위원회’의 과반수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한나라당에서 현역교체가 실제로 이뤄지기 위해선 먼저 소장파가 앞장서 세대교체 여론을 띄운 뒤, 당 지도부가 이러한 여론을 등에 없고 공천 때 물갈이를 시도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실제로 이대로 가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최대표가 60대 물갈이론에 대해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말하긴 했다. 그러나 현재의 최대표 입장에선 그렇게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지 않느냐는 시각도 있다.
홍사덕 원내총무. 총무가 되자마자 보수의원들로부터 ‘사쿠라’라는 공격을 받았다. 그때 심정을 홍총무는 이렇게 말했다. “‘사쿠라 총무’라는 말을 신문들이 톱 제목으로 올렸다. 정말 이건 너무 한다 싶더라. 그러나 항의 한번 안 하고 꾹꾹 참았다.”
원희룡 의원이 ‘60대 이상 퇴진론’을 꺼냈다가 역풍에 부딪혔을 때다. 홍총무는 ‘무대응’이라는 자신의 언론관에 기초해 원의원에게 조언을 했다. “정치인이 그렇게 얘기를 안 했더라도 언론에서 그렇게 얘기했다고 쓰면 그게 사실이 되는 것이다. 그런 언론 매커니즘을 인정하고 다음 대응을 하는 것이 더 낫다.” 세대교체론에 대해 최대표와 홍총무 등 당지도부는 선의를 갖고 있다.
‘최대표의 소장파 배후설’은 당 지도부에 타격을 입히는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주목대상이다. 재선그룹 홍준표 의원은 “한나라당 당선이 쉬운 서울 강남지역 의원들도 지역구를 내놔야 한다”는 ‘강남 물갈이론’을 주장했다. 여기에는 지역구가 강남인 최대표를 겨냥하는 의도도 담겨 있다. 영남 중진의원들은 내심 통쾌해했다. 홍의원의 주장은 일과성이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다음은 한나라당 고위 당직자 D씨의 말이다. “영남 중진들이 공천에서 탈락할 경우 이들의 반발은 매우 거셀 것이다. 과거 ‘이회창’이라는 절대권력이 있을 때도 반발이 대단했는데 최대표 체제에선 두말할 나위가 없다. 공천탈락한 현역의원들은 최대표(고령, 5·6공 출신)와 홍총무(비례대표) 또한 공천탈락 대상에 해당된다며 동반 퇴진을 요구할 수도 있다. 결국 한나라당에서 세대교체가 제대로 되려면 한번은 끝장을 볼 수밖에 없는데 그러다 보면 최대표나 홍총무가 불상사를 입게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강남 물갈이론은 이때를 염두에 둔 사전 포석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D씨는 물갈이 과정에서 당 지도부가 다치지 않는 길이 있다고 말한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투쟁을 강화시키는 것이 D씨가 말하는 해법이다. 당내 중도성향 의원들과 전통적 한나라당 지지층이 당 지도부를 지지하게 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내부 지지를 얻을 경우 12월 정기국회 뒤 공천탈락층의 공격에 대한 방어력이 커지게 된다는 것이다.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건의안 표결 하루 전 홍사덕 총무는 기자와 만나는 1시간30분 동안 6개비의 담배를 피웠다. 여권이 표결을 방해하거나 노무현 대통령이 해임건의를 받지 않으면 노대통령 하야운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결연한 말도 했다. 청와대의 아는 사람을 상대로 막후에서 설득을 했다고 한다. 그는 해임건의안 통과에 ‘올 인’ 한 듯했다. 통과가 안 되면 사퇴라도 할 태세였다. 보수성향 언론들까지 “명분이 약하다”고 해임건의안에 비판적이었지만, 홍총무는 눈도 깜짝 안 했다.
장관 해임안 통과 이후 최대표와 홍총무에 대한 당내 비판은 급격히 감소했다. D씨가 말한 대로 노무현 정부에 대한 강공전략은 당 지도부가 사는 길이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한나라당 세대교체와 연결이 되는 일일까. 한나라당 이강두 정책위의장은 “노무현 대통령을 타깃으로 해 공격을 집중시키는 국감전략을 세웠다”고 말했다. 당 지도부는 외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회창이라는 절대 카리스마가 없어진 상태에서 세대교체론이라는 ‘내전’ 상황이 사실상 개막된 한나라당 내에는 다양한 전선(戰線)이 형성되고 있다. 개혁성향 소장파 대 보수중진, 당 지도부 대 보수중진, 개혁성향 소장파 대 개혁성향 재선그룹, 당 지도부 대 개혁성향 재선그룹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재선그룹과 개혁성향 소장파, 당 지도부와의 대립모습이 주목을 끈다. 재선그룹의 김문수 의원과 대화를 나눴다. 그는 개혁성향 소장파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소장파가 제기한 5·6공 출신자 퇴진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대중선동주의입니다. 노무현 정권에서 포퓰리즘이 풍미하니 우리 당도 이를 답습하고 있습니다. 5·6공은 청산대상도 아니며 그 시대 공과가 분명 있습니다. 내가 제시하는 한국사회의 비전은 ‘국력 성장’과 ‘민주화’가 동반된 의미의 ‘선진화’입니다. ‘민주화’만 내세워선 안됩니다. 나는 그때 노동운동하고 투옥됐지만 5·6공 청산하자는 말 안 합니다. 5·6공 출신자면 모두 퇴진하라는 것도 문화혁명식 사고방식입니다. 소장파 주장대로라면 최대표가 먼저 퇴진해야 됩니다.”
-소장파의 5·6공 퇴진론에 동의하지 않는 것인가요.
“수구꼴통 퇴진하라는 얘기는 공산당식 표현입니다. 이런 막무가내 분위기 때문에 지금 이 나라가 이렇게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겁니다.”
-당 지도부가 당을 잘 이끌고 있다고 보십니까.
“홍사덕 총무는 제1당이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최대표 출범 이후 공천심사위원, 당직임명 때 변화의 모습이 없었습니다. 당 쇄신의 에너지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재선그룹-소장파 연대 가능성
흥미 있는 대목은 향후 세대교체 논의 과정에서 재선그룹과 소장파-당 지도부가 계속 대립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연대를 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한나라당 세대교체론의 전개과정에서 큰 변수가 될 수 있다. 김문수 의원은 5·6공 출신자 퇴진론은 반대하지만 영남권에서의 대폭적 물갈이는 찬성했다. 소장파와는 방법론에서 다르지만 결론은 한 곳으로 수렴되는 셈이다.
그는 “의원의 퇴출기준은 과거경력이 아닌 의정활동에 대한 객관적 검증과 도덕성이 되어야 한다. 부적합한 의원은 퇴출되어야 한다. 지역 유권자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라도 해서 현역의원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60% 이상이면 낙천시키는 방법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선그룹 모임인 국민우선연대 상당수 의원들도 김의원과 비슷한 생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나라당 한 의원은 물갈이론에 대한 재선그룹의 입장에 대해 이런 말도 한다. “현재의 개혁적 재선의원들이 내년 총선에서 살아돌아오면 3선의 중진의원이 된다. 한나라당의 실질적 주축이 되는 것이다. 그들 중 대통령 후보가 나올 수도 있다. 재선의원들이 극우성향의 다선 중진의원들의 물갈이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
한나라당은 최근 6개 사고지구당 조직책을 선정했다. 10월 초부터 일부 지구당에서 지구당위원장 경선이 열린다. 당원 1000명, 일반 국민 1000명이 대의원으로 참여하는 방식이다. 내년 초 국회의원 후보 경선의 사전 실험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경선이 열리기 3주 전부터 경선 부작용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온다. 인천 남을 후보 3명은 최근 모여, “대의원 동원 방식의 경선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의견을 모았다.
다음은 인천 남을에 출마한 한 경선 후보의 말이다. “경선에 참여할 일반 국민을 후보들이 모집해와야 한다. 1000명을 초과하면 추첨으로 대의원을 최종 선정한다. 민의를 반영한 경선 결과가 나오겠는가. 특정 기간 내에 사람을 많이 데려온 후보가 당선될 확률이 많은 방식이다. 문제가 많다.”
이렇게 문제 많은 경선을 왜 할까. 당 일각에선 명분 쌓기라는 얘기가 있다. 무엇을 하기 위해 명분을 쌓는다는 것일까. 당 지도부는 경선을 통한 상향식 공천만으론 현역의원 물갈이가 매우 어렵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상당수 현역의원들은 경선에 따른 상향식 공천으로 한나라당 후보를 선정하도록 한 당헌당규를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이번 6개 지구당위원장 경선이 진행되면 상향식 공천의 문제점이 상당부분 드러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경선을 보완하는 새로운 공천방식을 도입할 명분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오세훈 의원이 이끄는 청년위원회는 상향식 공천 이외에 ‘여론조사’ 및 ‘인터넷투표’도 함께 도입하는 안을 추진중이다. 이와 관련 경남 밀양·창원 출마를 준비중인 조해진 부대변인은 “여론조사의 경우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느냐고 단순히 묻는 질문방식이 아니라 각 후보의 학력, 경력, 특이사항을 얘기한 뒤 지지자를 묻는 질문방식을 택해 인지도가 높은 현역의원 프리미엄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더 관심을 끄는 대목은 향후 구성될 공천심사위 권한이다. 공천심사위는 지구당별로 복수의 경선 후보를 확정하게 되는 곳이다. 당의 한 관계자는 “문제가 있다고 보여지는 현역의원의 경우 아예 공천심사위 심사단계에서 탈락시켜 경선에도 나서지 못하도록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실현될 경우 당을 뒤집어놓을 수 있는 일이다.
현재의 한나라당에선 누구라도 상향식 공천의 틀을 쉽게 바꿀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런 가운데 6개 지구당에서 문제 많은 상향식 경선이 그대로 강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6개 지구당 조직책 선정결과, 51명의 신청자 중 40대 이하가 65%를 차지했다. 30대도 4명이나 되어 세대교체론과 관련, 주목을 받았다. 이들 중 서울 금천지구당 위원장 경선후보가 된 강민구씨는 아가동산사건을 수사한 현직 검사(수원지검 안산지청) 출신이다. 인천 남을 지구당 위원장 경선후보인 윤상현 한양대 겸임교수(서울대 경제과·미 조지워싱턴대 정치학 박사)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위다. 다음은 윤씨와의 대화.
-왜 자신을 한나라당 세대교체의 적임자로 생각하나요.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 의회 조사국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정치·외교분야 식견을 넓혔습니다. 젊고 유능한 전문가집단에 의해 정치권 세대교체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인인 전두환 전 대통령이 비자금 수수, 광주민주화운동 책임론으로 인해 이미지가 좋지 않습니다. 전 전 대통령 가문의 일원이 정치 입문하는 것에 대해 국민들이 좋은 이미지로 볼까요.
“노무현 대통령의 장인이 공산주의자였지만 대선 때 국민들은 이를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장인이 전 전 대통령이라는 사실 때문에 나를 문제삼지는 말아주십시오. 내가 장인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면 장인의 고향인 경남 합천에서 출마했을 것입니다. 나는 혼자 힘으로 서려고 하는 것이고 이 뜻을 장인에게도 전했습니다.”
2003년 9월 들어 대다수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 지지율은 민주당을 앞섰다.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안 통과이후 당 지도부는 안정을 찾는 분위기다. 그러나 충청권 여론조사에서 신당이 선두를 달리고 있고, 영남에서 한나라당 현역의원에 대한 반감은 50%를 넘고 있다. 한나라당 입장에선 긍정적 신호와 부정적 신호가 동시에 나오는 기로에 서 있는 셈이다.
제대로 된 인적청산, 물갈이가 특효약이지만 그것이 잘 될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게 한나라당의 고민이다. 국감 일정을 이유로 소장파가 ‘인적쇄신론’ 속도 조절 쪽으로 가닥을 잡으면서 중진 의원들은 한숨을 돌렸다. 소장파는 인적청산에 관한 여론을 띄우는 소득을 올렸다고 만족하지만 추석연휴를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은 이미 그 여론을 기억 못하고 있다. 중진인 이상득 의원은 당장 “소장파도 잘못, 중진도 잘못”이라는 양비론을 폈다. 이의원은 물갈이 대상을 비민주인사, 비리연루자, 얌체 의원으로 정했다. 물갈이론의 각이 금세 밋밋해졌다.
소장파측에 따르면 퇴출대상 의원은 대략 20~45명선. ‘경선 이외 인터넷투표, 설명형 여론조사 방식 도입 등 공천 방식 변경, 공천심사위에 개혁적 당내외 인사 대거 참여, 경선 이전 공천심사위 차원에서 현역 걸러내기, 재선그룹-소장파-당 지도부의 연대, 물갈이 여론조성, 충격요법(연판장 돌리기)’ 시나리오가 가동될 수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간은 우리편” 느긋한 영남보수
그러나 문제는 예산안 통과 등 중진의원들의 표 협력이 절대 필요한 정기국회가 오는 12월까지 이어진다는 것. 세대교체를 위해선 한 번의 파국이 불가피한 듯 보이지만 세대교체론자들 입장에선 ‘D-데이’를 잡기가 갑갑할 수 있다. 12월이 되면 이미 총선은 4개월 앞으로 다가오고 상향식 공천을 위한 경선은 불과 2개월 남겨두게 된다. 소장파가 원하는 대로 경선 틀을 새로 만들거나 시나리오를 가동할 여유가 없을 수도 있다. 시간은 소장파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나라당 한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최병렬 대표의 소장파 배후조종설’ 진위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배후조종보다 더한 것을 해서라도 당을 바꿔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쉽게 바뀔 것 같았으면 왜 지금껏 안 변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