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정위가 칼을 간다. 그러나 칼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공정위와 재계의 대립이 전면전 양상을 띠고 있다.
- 공정위는 여전히 기업을 단속과 지도의 대상으로 보고, 기업은 공정위의 ‘존재 의미’를 의심한다.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는 향후 한국 경제가 어떤 노선을 걷느냐에 달렸다.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앞줄 왼쪽)이 손길승 전경련 회장(앞줄 오른쪽) 및 대기업 총수들과 모임을 갖고 있다(6월12일 전경련회관).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양측의 팽팽한 긴장이 회의장을 짓눌렀다. 공정위가 지난 8월 발표한 공정거래법 개정안 때문이다. 핵심 내용은 계좌추적권(금융거래정보 요구권) 연장과 출자총액 제한제도 개편.
‘체질개선’ vs ‘시장자율’
재계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발표되자마자 이례적으로 정부에 대한 ‘총력투쟁’을 선포한 터였다. 내년 2월 만료되는 공정위 계좌추적권의 시한 연장조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기업의 투자를 가로막는 출자총액 제한제도도 반드시 완화해야 한다는 요구도 곁들여졌다.
하지만 강위원장은 “상대방이 정직해야 대화가 되는 법”이라며 재계의 도덕성을 문제 삼았다. 한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자세였다. 결국 이날 회동에서도 양측은 견해차를 좁히지 못한 채 앙금만 남겼다.
강위원장은 “계좌추적권이 연장되지 않으면 부당 내부거래 혐의가 적발된 기업들을 검찰에 고발하겠다”고 위협했다. 박용성(朴容晟) 대한상의 회장은 “지갑을 열어보겠다는데 좋아할 사람은 없다”며 계좌추적권 연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같은 견해차는 결국 기업에 대한 철학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공정위는 기업을 단속과 지도의 대상으로 본다. 그래서 “계좌를 추적해서라도 부당 내부거래를 적발하고 기업의 소유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제2의 외환위기를 막을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재계는 ‘시장자율’을 내세운다. 소유구조가 나빠 수익성을 위협하면 기업이 알아서 고치는 것이지, 정부가 왜 간섭하느냐는 항변이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기업들의 체질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돈 버는 데 지장이 있으면 누가 뭐라기 전에 기업이 먼저 제 살을 깎아낸다. 부당 내부거래 조사도 외국에선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한국만의 규제”라며 반박한다.
양측의 논리를 어느 한 쪽이 맞고 다른 쪽은 그르다는 이분법으로 평가하긴 어렵다. 어차피 선택의 문제다. 하지만 재계의 논리가 시장원리라는 불가역성에 근거한다면 공정위의 논리는 정부 규제 완화라는 대세에서 한 발짝 비켜서 있는 게 현실이다. 이 때문에 공정위는 지금과 같은 규제를 3년만 해보고(시장개혁 3개년 계획) 그 이후에 다시 생각해보자는 단서를 달고 있다.
그럼에도 재계는 더 이상 공정위의 칼날을 묵묵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기업이 바뀐 만큼 공정위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공정위는 기업의 논리대로 구시대의 산물이자 그 자체가 역설적으로 개혁의 대상일까. 아니면 시장경제의 공정한 룰을 지켜주는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일까. 공정위를 둘러싼 논란은 한국 경제에 대한 진단, 그리고 그 방향에 대한 고민의 축소판이 되고 있다.
신군부가 만든 재벌 견제 기구
공정위는 1981년 4월3일 옛 경제기획원의 내부 기구로 탄생했다. 1960년대 초부터 산업간 불균형이 확대되고 독과점 시장구조가 심화되면서 공정거래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됐지만, 시장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번번이 무산됐다.
하지만 1979년 2차 오일쇼크가 몰고 온 불황은 공정거래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력한 여론을 형성했다. 유가 상승으로 물가가 급등함에 따라 물가관리에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시장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게 표면적인 논리였지만, 실제로는 정부 주도형 경제에서 민간 자율의 경제 질서로 나아가야 한다는 시장의 요구를 정부가 수용한 것이었다.
특히 1979년 10·26사태 이후 실권을 잡은 신군부가 정치·사회뿐 아니라 경제 분야에서도 개혁의 바람을 일으키겠다고 나선 것이 공정거래법을 제정한 직접적인 배경이었다. 법안 작성자는 훗날 공정거래위원장과 경제부총리를 지낸 전윤철(田允喆) 당시 공정거래정책관실 총괄과장. 전과장은 이미 ‘공룡’으로 성장한 대기업들을 견제하고 물가도 잡겠다는 차원에서 무소불위의 초헌법적 권력기관이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법안 초안을 브리핑했고, 이어 전두환(全斗煥) 당시 대통령이 이를 재가했다.
그때도 전경련의 모 상무가 경제기획원에서 ‘난동’을 부리는 등 대기업들의 전방위 반격이 있었으나, 전두환 정권의 밀어붙이기식 결단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후 1984년 하도급법이 제정됐고 1986년 공정거래법 1차 개정을 통해 대기업을 견제할 수 있는 경제력 집중 억제시책의 기본 틀이 형성됐다. 지주회사 금지, 상호출자 금지, 출자총액제한제도, 금융보험사의 의결권 제한 제도가 주요 내용이었다.
1994년 경제기획원이 해체되면서 공정위는 중앙행정기관으로 독립한 뒤 1996년 장관급 기관으로 격상됐다. 그 이듬해에는 경제규제 개혁의 총괄기능을 재정경제원으로부터 이관받아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됐다.
공정위의 역할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 가운데 하나로 1993년의 약사회 고발사건을 들 수 있다. 그해 9월24일 약사회는 약사들의 한약 조제권을 제한하는 내용의 약사법 개정에 반대해 전국의 약국을 무기한 폐문(閉門)키로 했다.
이에 대해 공정위는 공정거래법 19조의 ‘판매를 제한하는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 약사회에 법위반 사실을 중앙일간지에 공표토록 했다. 또 약사회 회장직무대리와 사무총장 등을 검찰에 무더기로 고발했다.
이 사건은 약사들의 파업을 ‘공정한 경쟁’이라는 자본주의의 기본 이념을 들어 금지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약사회의 폐문 결정이 경쟁을 제한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약국의 한약 조제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점에서 공정위가 무리하게 법을 집행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개혁이냐, 간섭이냐
약사회 사례에서 보듯 시장에 대한 공정위의 개입은 거의 무제한적이다. 경쟁을 제한하는 요건이 사례별로 정해지지 않은 만큼 ‘걸면 걸리게’ 돼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정권의 이해에 따라 공정위가 나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 공정위가 신문시장에 대한 일제 조사를 실시하고 신문고시를 개정한 것도 이 맥락에서 풀이하는 견해가 많다. 정부가 ‘언론과의 전쟁’을 선포하자 공정위가 ‘신문시장 경쟁질서 정립’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공정거래법을 들이밀었기 때문.
경쟁촉진 이외에 공정위가 주요 업무로 삼는 분야는 독과점 해소, 소비자 보호, 하도급 질서 감시·감독 등이다. 이 가운데 독과점 해소는 사전적 의미 이외에 대기업 총수를 정점으로 하는 한국 대기업의 지배·소유구조를 바꾸는 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외환위기 때 겪었듯 한국 대기업은 한 계열사가 망가지면 그룹 전체가 도산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계열사끼리 상호출자를 통해 가공(架空) 자본을 만들어 총수의 지배력을 높여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공정위의 지배·소유구조 개선작업은 나름의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한국형 대기업인 재벌의 경쟁력이 재평가되고 있는 데다, 기업의 체질도 개선된 만큼 공정위의 개혁 요구가 시대상황에 맞지 않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강철규 위원장은 8월2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CEO포럼에서 “한국 경제는 1990년대 이후 개발연대에 효과적으로 작동했던 요소투입형 성장이 한계에 달해 잠재성장률이 하락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구조개혁의 지속적 추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경제 살리기의 출발선이 기업개혁에 있다는 논지다.
그는 또 “구조개혁을 잘 수행하면 총요소 생산성 증가에 힘입어 2012년까지 연 5% 이상의 잠재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잠재성장률이 5%를 밑돌고 성장의 올바른 방향을 찾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강위원장도 한국 대기업의 재무구조와 경영풍토가 개선됐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기업집단의 소유·지배구조가 본질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라는 데 무게를 싣는다. 그룹 총수가 4% 안팎의 지분으로 계열사 간의 거미줄식 출자를 통해 기업집단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기업 자율에 맡긴다는 것은 결국 ‘시장실패’로 이어져 경제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암적 요인이 된다고 본다.
반면 재계는 ‘현실론’을 주장한다. 공정위가 타깃으로 삼고 있는 삼성의 논리를 들어보자.
“공정위는 심지어 삼성전자를 그룹에서 계열분리하거나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라고까지 요구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삼성전자는 현 시스템에서 더 잘 작동하고 있다. 1970년대에 그룹 차원의 대규모 지원이 없었다면 어떻게 오늘날의 삼성전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또한 매년 수십억원의 수익을 내는 캐시 카우(cash cow)를 굳이 버리라는 이유가 뭔가. 삼성전자 때문에 그룹 전체가 위험하다면 분리시키는 게 맞지만, 지금 상태로도 잘 굴러가고 있지 않은가. 삼성전자를 지주회사의 자회사로 두라는 것도 현실을 외면한 발상이다. 총수 일가가 삼성전자를 지주회사의 자회사로 두려면 15조원이 필요하다. 누가 그 정도의 거액을 동원할 수 있겠는가.”
1981년 5월7일 당시 경제기획원 건물에서 공정거래위원회 현판식이 열리고 있다.
공정위의 민·관 합동 태스크포스에 참여하고 있는 인하대 김진방 교수(경제학)는 “기업의 소유구조를 바꾸라는 것은 기업 자체의 체질을 강화하는 것으로, 결국 국가 경제의 틀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유구조 개편이 기업에 대한 간섭이라기보다는 총수 개인을 제어하기 위한 수단인 만큼 이 둘을 혼동하지 말아달라는 당부다.
반면 홍익대 김종석 교수(경제학)는 “공정위가 국세청이나 검찰처럼 사정기관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못박았다. 기업 자율을 강조한 발언이다. 경제 위축이 기업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정부의 과도한 규제와 간섭 때문이라는 시각이 깔려 있다.
불붙은 계좌추적권 논란
공정위와 재계의 갈등은 계좌추적권을 둘러싸고 본격적으로 점화됐다. 공정위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에서 내년 2월로 만료되는 계좌추적권의 시한을 5년 더 연장하기로 했다.
근거는 이렇다. 공정위가 1998년부터 3년간 실시한 조사에서 대기업들은 무려 29조4000억원에 이르는 부당 내부거래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그 가운데 87%가 금융기관을 통한 우회·교차지원을 통해 이뤄졌다. 공정위에는 강제조사권이 없다. 선진국의 공정거래 당국은 압수·수색권까지 부여받는다. 따라서 부당 내부거래를 조사하려면 계좌추적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계는 한시적 계좌추적권을 일방적으로 연장하려는 시도는 기업 옥죄기에 다름 아니라며 반발한다. 전경련 김석중 상무는 “계좌추적은 금융실명제의 취지에 맞지 않을 뿐더러 기업의 영업 비밀을 죄다 보여달라는 요구”라며 “정 필요하면 금융감독원 등에 요청하면 될 일이지 왜 굳이 계좌추적권을 보유하겠다는 것이냐”고 비판했다.
계좌추적권에 대해서는 정부 부처 안에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공정위의 계좌추적권은 폐지를 전제로 논의돼야 할 사안인데도 이를 더 연장하겠다는 것은 부처 이기주의로 볼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이같은 반발 때문에 공정위는 계좌추적권을 상설화하려다 5년 연장으로 후퇴했다. 여기에 국회 다수당인 한나라당도 계좌추적권 연장에 반대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올해 정기국회에서 원안대로 통과될 지는 극히 불투명하다.
한편 정부와 민주당은 9월9일 당·정 협의회를 갖고 공정위의 계좌추적권을 만료시한인 2004년 2월에서 2007년 2월까지 3년간 연장하기로 했다.
계좌추적권을 둘러싼 갈등은 미묘한 입장 차이를 담고 있다. 우선 공정위는 계좌추적권이 기업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권한이기 때문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형편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부당 내부거래 조사는 사전 예고 없이 기업을 덮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전격적인 ‘포획’이었던 만큼 기업들이 걸려들 소지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사전 예고제로 전환됐다. 연초에 조사 일정을 발표하는 만큼 기업들이 자신들의 치부를 가릴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다. 그러니 공정위로선 금융 정보를 청구할 권리라도 없으면 혐의사실을 파악하기 어렵다.
공정위가 추진하고 있는 사법경찰권 확보와 전속고발권 유지를 위해서도 계좌추적권 연장 방안이 외부의 힘에 의해 밀려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있다. 공정위가 사법경찰권과 전속고발권, 계좌추적권을 모두 갖게 되면 조사 대상 선정부터 조사 기간, 조사 방법, 처벌 등 모든 제재수단을 손에 쥐게 된다.
기업들로서는 이 기회에 공정위의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심산이다. 계열사 지원, 총수에게 이익 몰아주기 등 기업의 부당 내부거래는 지금도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다. 걸림돌은 오직 공정위뿐이다. 최근 경기 위축으로 기업 살리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이번에 걸림돌을 완전히 뽑아내겠다는 복안이다.
같은 정부 부처이면서도 재경부는 공정위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못마땅해 한다. 한때 산하기관이던 공정위가 독립기관이자, 대통령과 ‘코드’가 가장 잘 맞는 부처로 성장함에 따라 재경부의 업무영역을 침해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재경부가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에 대해 언급하거나 ‘기업 투자 촉진책’ 등을 내놓았을 때는 공정위가 무리한 경기 부양과 기업 편들기라며 견제하기도 했다. 재경부 간부가 참석하는 민·관 합동 태스크포스에서는 “재경부 때문에 시장개혁이 안 된다”느니 “공정위가 현실을 몰라도 한참 모른다”느니 하는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계좌추적권과 함께 올 연말을 뜨겁게 달굴 또 하나의 현안은 출자총액 제한제도. 공정위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기준을 도입할 것을 예고했다. 이 방안은 10월이면 확정된다.
핵심은 출자총액 제한에서 제외되는 19개 예외규정을 손질하는 것과 출자총액 제한에서 졸업할 수 있는 규정을 바꾸는 것. 일단 공정위는 예외규정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를 축소한다는 방침이다. 공정위 조사에 따르면 자산 2조원 이상 대기업들의 지분 구조에서 51%가 원칙적으로 출자총액 제한에 위배되지만 예외규정을 통해 빠져나갔다.
재계는 출자총액 제한 때문에 신산업 투자를 못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강철규 위원장은 “그런 사례가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더니 한 달이 넘도록 한 건도 접수되지 않았다”며 “기업들은 정직해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출자총액 제한 졸업제도는 정부 원칙의 일관성과 특정 기업을 겨냥한 ‘표적 규제’라는 점에서 벌써부터 논란이 일고 있다. 현행 졸업제도에는 그룹 부채비율이 100% 이하로 떨어지면 자유로운 출자가 가능하도록 돼 있다. 여기에 가장 근접한 그룹이 삼성이다. 삼성의 부채비율은 현재 103%.
공정위는 재계 1위의 삼성이 출자총액 제한에서 졸업하면 다른 기업에 대한 ‘폭식성 본능’이 되살아날 것으로 본다. 이 때문에 서둘러 졸업제도 자체를 바꾸겠다는 것. 공정위는 총수가 가진 지분과 의결권의 차이를 비교해 그 격차가 크면 출자총액 제한에서 졸업시키고, 그렇지 않으면 계속 규제권 안에 두는 방안 등을 거론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부채비율로 대표되는 기업의 재무 건전성과 상관없이 총수가 지분을 추가로 확보하거나 의결권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이상 해당 기업은 공정위의 단속 아래 놓이게 된다.
이같은 논란은 결국 기업의 주인이 누구냐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다양한 기업지배구조 학설이 있지만, 영미식 기업에 통용되는 것은 ‘잔여청구권’ 이론이다.
기업과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은 주주와 경영자, 채권자, 종업원 등이다. 이 가운데 주주는 기업이 망하면 가장 큰 손해를 입는다. 부도 기업에 대한 권리 청구 순위에서 채권자나 경영자, 종업원에게 밀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주가 가장 큰 리스크를 안고 있는 만큼 가장 현명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으며, 이에 따라 그들에게 권한을 더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미식 주주자본주의의 핵심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총수가 4% 안팎의 지분으로 전체 그룹에 대해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맞지 않다. 공정위도 이 점에 근거해 소유구조를 바꾸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재계는 기업을 설립하고 경영하는 동안 총수가 부담했던 리스크를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총수가 자신의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 무한책임을 지면서까지 기업을 성장시킨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적 상황의 특수성을 감안하라는 주문도 만만찮다. 개발연대를 거치며 그룹 차원에서 위험분산과 전략적 투자, 총수의 의사결정에 따른 신산업 육성 등이 이뤄진 것을 고려하면 기업의 주인은 총수라는 것이다.
영미식 보편성을 인정할 것인지, 한국적 특수성을 받아들일 것인지는 외환위기를 거친 한국 경제에 남겨진 또 하나의 숙제다. 그 결정에 따라 공정위가 어디로 가야할지가 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