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르사코프카 마을 입구
이 지역은 러시아 최대의 한인거주지였을 뿐만 아니라, 연해주의 곡창지대라 할 만큼 근면한 한인들에 의해 농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었던 곳이다. 또 한편으로 중국과의 국경지대 산골에 위치한 숱한 빈농마을들은 시베리아 내전기에 항일 무장독립군과 빨치산부대들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서울대 송기호 교수를 비롯한 발해사연구자들은 우수리스크를 발해 15부(府)의 하나인 솔빈부(率賓府)의 소재지로 추정하고 있다. 우수리스크와 추풍이라고 불리는 그 서쪽 일대에 핏줄처럼 흐르고 있는 수이푼강의 명칭이 바로 ‘솔빈(率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는 것. 여하튼 수이푼은 이 지역에 살았던 원주민들의 말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이후 몇몇 러시아 지도에 ‘수이펜헤(Suifen’khe)로 기재되었는데, ‘수분하(隋分河)의 중국식 전사(轉寫)를 반영한 것이다.
또 발해인을 비롯해 만주지역 민족들의 오랜 역사적 연고지이기도 한 우수리스크에는 발해 때 축조된 남성(南城)과 금나라 때 축조된 서성(西城) 등 두 개 성터가 있다. 이 곳은 청나라 때는 쌍성자(雙城子)라고 불리기도 했고, 송나라에서는 황제가 구금됐던 곳이라는 의미로 ‘송황령(宋皇嶺)’ ‘송왕령(宋王嶺)’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이후 러시아 역사에서 현재의 우수리스크는 1866년 러시아 아스트라한주(州)로부터 이주한 농민들이 수이푼강의 지류인 라코브카(Rechka Rakovka)강 하구의 강변에 니콜스코예마을(Derevnaia Nikol’skoe)을 형성한 때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니콜스코예는 1898년 4월 시(市)로 승격됨과 동시에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개칭됐다. 그리고 1935년 스탈린의 측근인 국방인민위원 보로실로프(Kliment Efimovich Voroshilov)의 이름을 따서 보로실로프로 개칭됐다. 이같은 명칭변경은 1929년 ‘동중철도사건’의 영웅 원동특립군사령관 부류헤르(Vasily Konstatinovich Blucher) 등의 러시아 원동지역 지도자들을 견제하기 위한 스탈린의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일본군의 만행 4월참변
스탈린 사후인 1957년 보로실로프는 다시 현재의 우수리스크로 이름이 바뀌었다. 우수리스크는 서북쪽으로 북만주를 가로질러 통하는 동중철도(東中鐵道)와 북쪽으로 하바로프스크로 연결되는 우수리철도가 만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우수리스크 시내로 들어선 조사단은 우선 한인협회(칼리니나 거리 35번지)를 찾았다. 협회건물의 간판이 흥미를 끌었다. 맨 위에는 러시아어로 ‘카레이스키이 돔(Koreiskii Dom),’ 그 아래에 식당이라는 뜻의 ‘Kafe’, 그리고 맨 아래에 한자로 ‘韓國食堂’이라 써놓고 있었다. 이 건물은 우수리스크지방 고려인들의 민족교육, 언론, 문화의 센타로 활용되고 있는데 우수리고려민족문화자치회와 고려학교, 동북아평화연대 우수리스크 사무소, 원동신문사, 라디오방송국이 들어서 있다.
조사단 일행은 추풍4사(秋風四社)로 불렸던, 우수리스크시 서쪽 일대 강유역에 위치했던 대표적인 4개의 한인마을인 코르사코프카(Korsakovka), 크로우노브카(Krounovka), 푸칠로브카(Putsilovka), 시넬리니코보(Sinel’nikovo)를 찾아 나섰다.
우수리스크에서 노니콜스크로 향하는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20분 정도 달리면 도로변에 4월참변 희생자 추모비가 나타난다. 이 추모비는 1920년 4월 일본군이 자행한 4월참변 당시 우수리스크 지역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인민군 병사 170명과 빨치산 70명 등 총240명의 희생자들을 위해 설립된 것으로 바로 그 전투현장에 세워져 있다. 4월참변이란 1920년 4월4일 밤부터 5일 새벽에 걸쳐 일본군이 연해주일대의 러시아 혁명세력과 한인들을 공격한 만행적 사건을 말한다.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라즈돌리노예, 스파스코에, 하바로프스크, 포세트, 스챤 등 연해주 각지에서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연합한 러시아 혁명정부의 공공기관과 러시아 혁명세력을 공격하는 한편, 한인들을 공격하고 대량체포, 방화, 파괴, 학살하는 등 만행을 자행했다.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습격해 한민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 50명을 무장해제하고 한인단체사무소와 가택을 수색해 60여 명을 검거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한민학교와 한인신보사 건물에 불을 질렀으며, 헌병분견대를 주둔시키고 자위대라는 헌병보조기구를 창설했다.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도 일본군은 한인 76명을 검거하고 4월7일 이들 가운데 한인사회 최고원로인 최재형을 비롯한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 저명한 한인지도자 4명을 총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