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30일 노무현 대통령과 이부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청와대 오찬장에 들어서고 있다. 이 의장은 이날 천정배 대표와 함께 하는 자리를 노 대통령에게 건의했다는 후문이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9월9일 청와대에서 열린우리당 이부영(李富榮) 의장, 천정배(千正培) 원내대표와 저녁식사를 함께하면서 한 말이다. 신기남(辛基南) 전 의장이 부친의 ‘일제시대 헌병 복무’ 사실과 이를 둘러싼 거짓말 논란으로 갑자기 낙마한 후 ‘얼떨결’에 들어선 이부영 체제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였다. 이 의장 취임(8월19일) 이후 꼭 3주 만이었다.
당초 당 안팎에서는 이 의장이 당내 비주류로서 당의 대주주인 천·신·정(천정배, 신기남, 정동영)에 비판적 태도를 취해온 데다 노 대통령과도 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당의 갈등 증폭과 분열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적지 않았다. 이 의장이 지난 1월 전당대회 득표순에 따라 당연히 ‘당권 승계 1순위’였음에도 갖가지 ‘당권 대안 시나리오’가 난무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 의장측에서는 당의 ‘가장 영향력 있는 평당원’인 노 대통령의 이날 평가에 상당한 무게를 두는 모습이다. 한나라당 출신이자 원외로서의 한계 극복과 당내 입지 구축, 기존 당권파를 비롯한 당내 각 계파들과의 원만한 관계 형성 및 리더십 확보 등 만만찮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는 상태에서 노 대통령의 이 말 한마디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큰 힘이 되었음에 분명하다. 게다가 앞으로는 정부정책도 당이 중심이 되어 끌고 가고, 당정관계도 당이 책임을 지고 주도적으로 정국을 이끌어달라는 노 대통령의 거듭된 주문은 이 의장측을 고무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 의장의 한 측근이 “노무현 대통령의 그 발언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당이 돌아가는 상황을 여러 경로를 통해 파악하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그냥 감(感)으로 덕담을 던진 게 아니라 정확한 팩트(fact)를 이야기한 것이다”며 의미 부여를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실제로 이 의장은 의장 취임 후 한 달 동안 당 안정을 위해 동분서주해왔다. 당의 쌍두마차인 천정배 원내대표와는 거의 매일 만나거나 전화통화를 하면서 현안을 조율하고 있다. 이 의장의 당권 승계를 둘러싸고 천 대표가 부정적 태도를 취했다는 설(說)을 의식해서인지 두 사람이 더욱 돈독한 관계를 과시한다는 게 주변의 해석이다.
사석에서도 이 의장은 12살 아래인 천 대표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 사람 참 똑똑하더라. 치밀하고 빈틈이 없어 아주 믿음직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지난 9월9일의 ‘3인 만찬’도 이 의장이 중국 방문을 앞둔 8월30일 노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에서 “정기국회도 있고 하니 다음에는 천 대표와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했으면 좋겠다”고 건의해 이뤄졌다는 후문이다.
‘당권파’로 불리는 ‘천·신·정’과 이 의장의 관계도 일단은 원만한 편이란 게 당 안팎의 중평이다. 외부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이 의장 취임 이후 2~3차례 따로 만난 적도 있다고 한다. 고위당정정책조정회의나 당정협의 같은 공식 회의가 아니라 당 운영과 정국 현안을 의논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시스템이 별도로 마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열린우리당의 ‘대주주’와 ‘관리자’로서의 채널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부영 체제가 ‘예상과 달리’ 빠르게 안정돼가고 있는 밑바탕에는 당권파와의 이 같은 ‘밀월’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당내 세력이 없는 게 강점
이 의장이 당 안정을 위해 가시적인 성과를 낸 것은 기간당원 권한 강화를 뼈대로 한 당헌 개정안의 중앙위원회 통과였다.
당초에는 기간당원 자격완화 문제를 둘러싸고 당권파와 개혁당 출신 등 핵심당원 사이에 일대 격돌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됐다. 일부 기간당원이 당사에서 천막 농성을 벌이는 가운데 전국 각지의 기간당원 300여명이 올라와 당사에서 지도부를 성토하는 집회를 갖는 등 이 문제는 당내 뜨거운 감자였다. 당 운영 주도권은 물론 다음 선거에서의 공천권과 공직선거권, 차기 당권 등을 놓고 각 계파간 치열한 파워게임이 벌어졌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9월1일 중앙위원회는 별 무리 없이 기간당원의 권한을 강화한 당헌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의장의 중재로 별다른 잡음 없이 결론을 도출해 냈다는 평가다.
이 의장이 취임 직후부터 강조한 ‘노사정 대타협을 통한 경제살리기’도 용산고 후배인 이해찬(李海瓚) 국무총리와 당의 적극적인 뒷받침을 받아 노사정대타협위원회가 즉시 구성되고 당정이 협조하기로 하는 등 비교적 큰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다.
이를 두고 당내에서는 이 의장이 지나온 이력 자체가 개혁적인 측면도 있지만 당내 세력이 없기 때문에 여러 계파간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그만큼 이 의장의 중재가 잘 먹혀들 수 있었다고 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