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문제는 일본과 한국, 대만과 같이 경제발전에 성공한 나라뿐만 아니라 실패한 나라들에서도 국가의 개입이 있었다는 점이다.
경제성장에 실패한 인도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물론이고,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 역시 경제체제에 깊숙이 개입했음에도 동아시아 국가들과 같은 성과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경제발전에 성공하려면 국가의 ‘현명한’ 지도자가 ‘현명한’ 전략을 세우고 국민과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지도력이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박정희는 싱가포르의 리콴유, 일본의 기시와 함께 ‘현명한’ 지도력을 발휘한 ‘개발국가’의 지도자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의 경제개발이 과연 과학적인 모델을 통해 진행된 것이냐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모든 국가 정책을 경제개발에 집중한 효율성 측면에서는 박정희의 국가 운영모델에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하다. 반면 직관과 ‘배짱’으로 밀어붙인 방식은 어느 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는 모델이 아니라 특수한 형태의 모델이며, 박정희 시대의 경제구조는 현재 한국이 안고 있는 갖가지 경제적인 문제를 배태한 출발점이 됐다.
박정희의 개인적 경력과 관련된 논쟁은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문제보다는 그의 좌익활동 경험에서 시작됐다. 논란은 먼저 미 행정부에서 불거졌다. 미 행정부는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쿠데타 주모자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논쟁의 핵심은 박정희의 공산주의자 활동 경력이 향후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있었다.
미 행정부는 장면 정부의 무능력함에 비해 강력한 리더십을 보이고 있는 군사정부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좌익경력에 대해서는 계속 경계했다. 특히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은 비밀리에 박정희와 함께 김종필의 좌익경력을 조사했다.
그 결과, 각주까지 달린 장문의 보고서가 작성됐는데, 여기에는 이들의 해방 직후 좌익경력뿐만 아니라 6·25 전쟁 당시 가족들의 부역(附逆)의혹이 거론되는 등 두 사람의 개인행적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내용이 담겨 있었다. 일부에서는 군사정부가 궁극적으로 북한에 정권을 넘겨줄 것이라는 극단적인 분석까지 제시했다.
강력한 반공정책으로 좌익혐의 세탁
1963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박정희의 공산주의 활동경력과 관련해 본격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일명 색깔논쟁은 북한이 황태성을 특사로 파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촉발됐다. 황태성은 경상북도의 유명한 공산주의자이자 박정희의 친형 박상희의 친구였다. 물론 박정희와도 친분이 있었다. 그러나 반공을 제1의 국시(國是)로 내세우며 쿠데타를 일으켰던 박정희는 황태성의 면담제의를 거부하고 그를 체포했다. 야당이 황태성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감옥에서 그를 만났던 사람을 통해서였다.
박정희의 좌익경력은 대선 과정에서 핵심 쟁점으로 부각됐다. 반공을 국시로 한 것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명분일 뿐 실제로는 공산주의자라는 것이 박정희에 대한 야당 공세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박정희의 좌익경력은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공헌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조봉암의 좌익경력이 그가 1956년 대선에서 200만표를 얻는 데 도움을 준 것과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좌익경력 또한 1950년대 이후 나세르의 이집트와 같은 중립국 동맹을 희구하던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인 포인트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쿠데타 직후 발간한 저서에서 자신이 구상하는 한국사회의 개혁 방향과 관련해 일본의 메이지유신(維新)과 나세르의 이집트혁명을 하나의 좌표로 제시했다. 이에 동조했던 일부 지식인들이 민주공화당과 군사정부의 정책 결정자 또는 자문위원으로 정치에 참여했던 것이다. 이들은 1960년대 후반 박정희 체제와 그 정책에 회의를 품고 공화당에서 이탈했지만, 박정희가 모델로 삼았다고 언급한 ‘메이지유신’은 어떠한 논쟁도 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조선노동당과 관련된 박정희의 좌익경력은 1963년 대통령선거 이후에는 이슈가 되지 않았다. 박정희가 강력한 반공정책을 편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군사정부 시절 진보적 인사들에 대한 탄압, 1964년 6·3 사태를 전후해 발생한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과 1967년 6·8 부정선거 직후의 동백림 사건, 3선개헌을 앞둔 1968년의 통일혁명당 사건과 1971년 대통령선거를 전후한 시점에 발생한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1974년 유신반대 시위를 잠재운 민청학련 사건과 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 등 수많은 공안사건은 그가 공산주의자일 가능성에 대한 논쟁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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