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호

고국 무대 선 세기의 발레리나 강수진

“춤추는 순간 난 ‘강철 나비’가 돼요”

  • 글: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입력2004-11-24 15: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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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레 택한 것 두 번 후회, 그러나 다음 생에도 발레 택할 것
    • 취미생활? 그건 연습 별로 안 하는 사람들이나 누리는 호사
    • 나뭇조각에 발 짓이겨져도 무대에선 통증 못 느껴
    • 정상의 자리에 선 동력은 유달리 센 고집
    • 은퇴 후엔 나를 필요로 하는 나라에서 코치로 활동할 생각
    고국 무대 선 세기의 발레리나 강수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 강수진(姜秀珍·37)이 2년 만에 고국 무대에 섰다. 존 크랑크가 안무한 러시아 문호 푸슈킨 원작의 ‘오네긴’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간판 레퍼토리. 이 작품에서 주인공 타티아나 역을 맡은 수진은 49㎏의 몸으로 종달새처럼 날아오르고, 나비처럼 파닥이고, 꽃잎처럼 흩날렸다.

    공연장인 세종문화회관에는 정원식 전 국무총리, 조완규 전 교육부 장관, 김영수 전 문화부 장관 등 발레를 애호하는 명사가 여럿 눈에 띄었다. 공연 시작 직전 로비에서 수진의 아버지 강재수(67)씨를 만났다. 잘생긴 멋쟁이 신사였다. 수진은 아버지를 빼닮았다.

    아름다운 백조가 호수에 그 자태를 드러내려면 두 발은 어둡고 차가운 물 밑에서 끊임없이 물갈퀴질을 해야 한다. 발레에서도 환상적인 춤동작이 만들어지기까지 토슈즈 안에선 두 발이 끔찍한 고문을 당한다.

    발레리나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일직선을 만들려면 토슈즈 안에 덧댄 나뭇조각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발레리나가 새처럼, 나비처럼 가볍게 날아올랐다가 사뿐히 내려앉는 동작을 하는 동안 두 발은 나뭇조각에 짓이겨진다. 수진은 20여년 발레를 했지만 지금도 공연이 끝나면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발에 심한 통증이 온다.

    수진의 발은 한센병 말기 환자의 발처럼 흉측하다. 뼈가 튀어나오고 발톱이 뭉개지고 살은 찢어지고 갈라졌다. 그러나 육체의 한계를 극복한 ‘위대한 발’이란 칭송을 듣는다.



    ‘오네긴’에서 첫사랑에 빠진 소녀의 몽환적인 뒷걸음질춤, 구애가 받아들여질까 초조해하는 소녀가 남자의 손에 이끌려 추는 꼭두각시춤 장면에서 관객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인터뷰를 준비하며 발레의 비밀을 알게 된 필자는 그녀의 발에 몰려올 통증을 생각하며 안쓰러움을 느꼈다. 연습벌레 수진이 신은 토슈즈는 무려 250켤레. 남들이 2, 3주 신는 토슈즈를 하루에 네 켤레나 갈아신은 적도 있다.

    ‘위대한 발’

    수진은 5박6일 동안 한국에 머물렀다. 리허설과 공연이 있는 날은 인터뷰를 할 수 없었다. 출국하는 날 새벽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겨우 그녀의 시간을 빼앗았다. 약속시간인 오전 7시보다 20분 가량 일찍 도착해 방으로 전화를 했더니 곧장 로비로 내려왔다. 로비 라운지는 오전 10시에 문을 여는데 수진을 알아본 호텔 직원이 불을 켜주고 차를 내왔다.

    -월요일(10월25일) 세종문화회관 공연장에서 수진씨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미남이시더군요. 수진씨 얼굴이 아버지 붕어빵이에요.

    “다들 그러세요. 어머니도 미인이세요.”

    -이틀 연속 공연해 발이 아프겠군요.

    “공연 막간에도 발이 몸의 무게를 못 견딜 때가 있어요. 공연 끝나면 걷기가 힘들어요.”

    -막간에 그렇게 힘들면 공연을 어떻게 합니까.

    “발레는 참 희한한 매직(마술)이에요. 토슈즈를 신고 무대에 서면 통증을 못 느끼는데 무용이 끝나면 발이 아파요. 연습할 때도 통증을 느껴요. 공연할 땐 집중하고 몰입하느라 아픈 걸 잊어버리죠. 분장실에 들어가서 기다릴 때, 혹은 막간의 휴식에는 통증이 와요.”

    -진통을 해야 할 텐데요.

    “아이스 팩(얼음주머니)을 항상 들고 다녀요. 집 냉장고에 아이스 팩이 몇 개씩 들어 있죠. 공연 끝나면 아이스 팩으로 찜질을 하지만 피부가 벗겨진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아픔을 참아야죠, 까짓 거…. 날씨가 더울 때는 피부가 소프트해져 몇 시간씩 토슈즈 신고 연습하면 살갗이 까져버리죠. 똑바로 서지 않고 옆으로 서게 되니까요.”

    같은 예술분야지만 지휘는 나이 칠십에도 할 수 있다. 고전무용을 비롯해 다른 분야도 수명이 길다. 하지만 발레는 무한의 고통을 요구하면서도 무대 위에서 빛을 발산하는 시간이 짧다.

    -발레리나가 마흔을 넘겨 무대에 서긴 어렵겠죠.

    “발레리나는 할 수 있어요. 발레리노(남자 무용수)가 힘들죠. 여자 무용수를 들고 춤을 추기 때문에 허리에 문제가 생기거든요.”

    고국 무대 선 세기의 발레리나 강수진

    출국 당일 새벽, 인터뷰 시간을 내준 강수진.

    -단명(短命)에다 고통스럽기까지 한 무용을 선택한 데 대해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아뇨, 진짜 행복해요. 다음 생에도 발레를 선택할 거예요. 일생에 딱 두 번 힘들어서 후회해본 적이 있긴 하죠.”

    수진은 초등학생 때 리틀엔젤스 단원으로 1년6개월 동안 미국·캐나다 순회공연을 다녀왔다. 수진에게 발레라는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준 사람은 어머니 구근모씨. 어머니의 권유로 선화예중 때 발레를 붙잡았다. 발레를 늦게 시작한 수진은 180도로 벌어지지 않는 다리를 ‘찢기’ 위해 잠들 때도 토슈즈를 신고 다리를 벌려 벽에 붙이고 잤다. 아침에 눈을 뜨면 혼자 힘으로 다리를 오므릴 수 없어 언니와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수진은 발레를 시작한 지 1년 반 만에 이화여대 주최로 열린 발레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후 유학생을 선발하러 온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 교장 마리카 베소브라소바의 눈에 띄었다.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는 왕비 그레이스 켈리가 세운 국제적인 발레 교육기관. 마리카 교장은 수진의 아버지에게 ‘10만명의 발레리나 중에 한 명 나올까말까한 천재’라고 추켜세우며 유학을 권유했다. 마리카의 예측은 정확했다. 지금도 수진은 자신을 발굴해 키워준 마리카 선생의 생일 때면 모나코로 날아간다.

    수진은 모나코 발레학교에서 한동안 적응하지 못해 가족사진을 들여다보며 울 때가 많았다. 한번은 밤새 트렁크를 싸 마리카 교장을 찾아갔다. 마리카 교장은 “어려운 고비를 만날 때마다 피한다면 어떻게 사람을 감동시키는 예술가가 될 수 있겠냐”며 수진을 설득해 주저앉혔다.

    발레 힘들어 한때 자살 충동

    두 번째 고비는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들어간 뒤 찾아왔다. 언어, 음식, 인간관계, 발레실력에서 벽을 느낀 데다 잦은 발목 부상으로 무기력 상태에 빠졌다. 입단한 지 1년이 지나도록 솔로는 고사하고 군무(群舞)에조차 변변히 끼이지 못했다. 식탐(食貪)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느라 몸무게도 10kg이나 불었다. 자주 울었다. 극장 옥상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나 수진은 다시 피나는 연습으로 실력을 향상시켰다. 마침내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 솔로 역을 맡았고 1993년 1월에는 주역 발레리나의 반열에 올랐다.

    “2년씩 지속된 두 번의 슬럼프 때는 정말 발레를 그만두고 싶었죠. 몸이 너무 아프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그런데 지금은 정말 행복해요. 저에게 재능을 주고 이 아름다운 예술을 계속할 수 있게 해준 신에게 감사드립니다.”

    -남자 무용수는 단명한다고 했는데 몇 살까지 할 수 있나요.

    “남자 무용수는 서른다섯을 넘기기 힘들어요. 저희 발레단에도 쉰 넘은 사람이 있지만 힘든 역은 안 하죠. 보통 남자 무용수가 그만두는 이유는 허리 때문이에요. 여자 무용수를 들고 춤을 춰야 하거든요. 허리 통증 때문에 그만둬요. 우리야 자신만 돌보면 되잖아요. 남자들이 들어주니까.”

    -여성 발레리나의 체중이 무거우면 남자 무용수에게 부담을 주겠군요.

    “자기를 위해서나 파트너를 위해서나 체중관리를 잘 해야죠. 물론 몸무게보다 코디네이션(조화)이 더 중요하지만. 남자 무용수들은 ‘몸이 가벼운 발레리나라도 코디네이션이 안 되면 힘들다’고 말해요. 남자 무용수와 여자 무용수가 호흡을 맞춰야 하거든요.”

    터키인 남자 무용수와 결혼

    수진은 2002년 독일에서 터키인 매니저 툰치 셔크만과 결혼식을 올렸다. 툰치는 같은 발레단의 남자 무용수였다. 둘의 관계는 동료에서 친구로, 친구에서 애인으로 발전해갔다.

    수진은 1995년경부터 툰치와 결혼하기 위해 부모의 허락을 받으려 했지만 아버지가 강력하게 반대했다. 딸을 외국인에게 줄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아버지 재수씨의 딸 사랑은 지극하다. 한국 기자들은 아버지를 통해 독일의 강수진과 접촉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선화예중에 다니던 딸의 귀가시간에 맞춰 야구방망이를 들고 집 앞 골목을 지켰다고 한다. 더벅머리 대학생들이 키 크고 얼굴 예쁜 여중생을 쫓아 집까지 따라오기 일쑤였다. 공연장 로비에서 만난 재수씨에게 “야구 방망이를 들고 지킨 딸을 터키인에게 도둑 맞아서 어쩝니까” 하고 물었다. 대답은 이랬다.

    “결혼에 반대해 딸이 슈투트가르트로 오라고 해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걔들이 결혼을 않고 기다렸어요. 나중엔 둘의 결혼을 이해했습니다. 딸을 평생 잘 돌봐줄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딸이 저 나이에 혼자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은 사위에게 만족합니다. 사위는 명석하고 훌륭한 음악가 집안 출신입니다.”

    -사랑하는 남자를 두고 부모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7년을 기다렸다니 효심이 대단하군요.

    “처음 결혼 승낙을 받으려고 했을 때 두 분 다 반대하셨어요. 부모님이 안 된다면 못 하는 거잖아요. 제가 툰치에게 ‘부모님 승낙 없이는 결혼 못 한다’니까 기다리자고 하더군요. 툰치가 착하고 이해심이 깊어요. 우리 문화와 부모자식 관계를 존중해줬어요. 아마 엄마 쪽보다도 아빠가 딸을 뺏긴다는 생각에 진짜 가슴 아팠을 거예요. 그것은 신랑감이 한국 국적이라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터키인이라고 하니 더 난리가 난 거죠.

    기다리는 동안 부모님이 툰치가 얼마나 착한 사람이고 얼마나 저를 사랑하는지 알게 됐죠. 터키인의 풍습과 문화가 우리와 비슷해요. 한 살만 더 많아도 깍듯이 어른 대접을 해주지요.”

    -동서양의 중간지대에 있어서 그럴까요?

    “터키에 가보면 마치 한국에 온 것 같아요.”

    청소 빨래는 내 몫, 요리는 남편 몫

    결혼식은 독일에서 간소하게 올렸다. 오전 9시에 친구와 증인을 불러 결혼식을 하고 바로 극장으로 돌아가 오전 10시 반부터 연습을 했다. 저녁에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열었다. 독일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실용적으로 결혼식을 치른다고 한다.

    -결혼 후 달라진 게 있다면….

    “제 마음이 안정됐어요. 결혼의 의미가 저한테는 컸거든요. 사람이 한번 결혼하면 죽을 때까지 한 사람하고 항상 같이 가야 되는 거잖아요. 저는 이 사람과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했죠. 부모님이 반대해 힘들다가 결혼을 하니 정신적으로 안정이 됐어요. 신랑이 뒤에서 서포팅을 잘 해줘요.”

    수진은 결혼한 지 2년이 지난 남편을 ‘신랑’이라고 불렀다. 신혼 기분을 이어가고 싶은 것일까.

    -49kg 체중을 유지하자면 다이어트에 꽤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아요.

    “연습량이 많으면 그만큼 체중이 줄어요. 저는 잘 먹어요. 그렇지 않으면 제 몸에 안 좋으니까. 먹는 것에 대해서는 신랑이 신경을 써줘요.”

    -어떤 음식을 좋아합니까.

    “어렸을 때부터 고기는 별로 안 먹었어요. 야채를 좋아해요. 스파게티는 여러 가지 소스를 바꿔가면서 즐기죠. 생선은 연어 송어, 다 잘 먹어요. 고기 안 먹는 대신 치즈는 많이 먹어요.”

    -남편이 주로 요리를 한다면서요? 가사는 어떻게 분담하고 있습니까.

    “신랑이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무용수를 하다 부상을 당해 그만뒀어요. 그는 허리와 무릎이 부은 상태에서 무용할 때가 많았죠. 그래서 침술과 지압을 배웠습니다. 제가 아프면 그런 걸 해줘요.

    그도 무용수였기 때문에 내가 말을 안 해도 얼마만큼 피곤한지 알아요. 제가 내일 공연해야 되는데 부상당해 괴로워하면 이해하고 위로해주지요.

    집안 일, 청소, 빨래, 다림질은 제 몫이에요. 음식은 신랑 일이구요. 저보다 음식을 더 잘하거든요. 요리는 신랑의 취미예요. 서양에서는 보통 남자들이 쿠킹을 더 잘해요.”

    필자가 “한국 남자만 요리를 못할 것”이라고 하자 수진이 “아마 그럴 거예요”라며 웃었다. 한국 남자들이 부엌일을 안 하는 건 한국인의 DNA로 체질화한 것 같다. 중국의 조선족 사회에서도 남자들은 부엌일이나 아이 돌보기를 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중국 한족(漢族)은 요리를 여자에게 맡기지 않는다. 요리를 너무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한국에서도 한 세대만 지나면 남성이 부엌에 들어가지 않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는 아마 바뀔 것이다.

    고국 무대 선 세기의 발레리나 강수진

    ‘위대한 발’이라 칭송받는 강수진의 발.

    “전세계적으로 일류 요리사는 모두 남자지요. 저희는 평소 부부싸움을 안 해요. 그런데 제가 음식 만드는 걸 도와주고 싶어 주방에 들어가면 부부싸움이 나요. 남편이 나가라고 소리를 지르거든요. 보통 집에서 몸을 푸는 워밍업을 하고 극장에 나갑니다. 그래서 6시 반에 일어나 청소하고 세탁기 돌리고 다림질을 해놓습니다.

    저희는 아침엔 밥을 먹지 않고 커피만 마셔요. 서로 바빠서 아침, 점심에는 못 볼 때가 많지요. 호텔에 묵을 때는 아침을 먹지만. 신랑이 아침밥 찾으면 제가 할 때도 있어요. 한국식이 아니기 때문에 쉬워요.

    한국요리는 제 몫이죠. 남편은 유럽식과 터키요리를 잘해요. 센스가 빨라서 제가 한국요리 하는 걸 눈여겨보았다가 다음 번에 유럽 음식을 할 때 소스를 한국식으로 만들기도 해요. 제가 먹기 좋게 만들어줘요.”

    아침은 커피 한잔으로 때운다. 점심도 샌드위치나 샐러드로 가볍게 먹고 공연할 때만 스파게티를 먹는다. 저녁은 반드시 집에서 툰치가 해준 요리를 먹는다.

    발레는 인내심 없으면 못해

    수진이 소녀시절에 찍은 사진은 지금보다 훨씬 귀엽다. 눈이 크고 콧날이 오뚝하다. 발레에는 연기, 춤과 함께 미모와 키도 중요하다.

    -수진씨는 눈이 참 커요. 어림짐작으로 내 눈의 두 배는 될 거 같은데요.

    “감사합니다. 부모님께 감사드려야죠. 부모님 믹스처(혼합물)로 제가 태어났으니까.”

    -혹시 쌍꺼풀 수술한 것 아닙니까.

    “그럴 필요가 없었어요. 우리 집안은 다 쌍꺼풀이 있어요. 할머니, 할아버지 대대로. 얼굴 어느 한 부분도 고치지 않았어요.”

    -세종문화회관 공연장에 여중생, 여고생 관객이 꽤 많더라고요. 발레를 하는 여학생들 같았어요. 후배들한테 도움말을 해주시죠.

    “발레는 자기와의 싸움이 중요합니다. 인내심이 없으면 못 해요. 금방금방, 빨리빨리 올라가려고 생각하면 벌써 자기한테 진 거예요. 발레뿐 아니라 살아가는 데도 인내심이 없으면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더 늦게 도착해요.

    학생들이 발레단에서 군무를 할 때 솔로 역 하는 사람을 보면서 ‘어, 나도 할 수 있는데’ 하고 생각하면 슬럼프에 빠지기 시작하죠. 테크닉이 있는데 자기에겐 왜 역을 안 주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어느 발레단이든지 오디션을 통해 학교에서 최고인 사람을 뽑거든요. 그래서 발레단에 들어오면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죠. 비교는 나쁜 거예요. 자기도 할 수 있는데 왜 그 역을 못 받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거기서 벌써 마이너스죠. 자기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어느 순간 좋은 결과가 옵니다.

    운도 따르죠.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있잖아요. 발레단마다 스타일이 다른데 무용수가 발레단과 안 맞으면 못해요. 자기하고 맞는 발레단에 들어가야 빨리 올라갈 수 있죠.”

    무용평론가 장광열씨가 이번 수진의 귀국 공연을 앞두고 ‘당신의 발에 입맞추고 싶습니다’(동아일보사 간행)를 펴냈다. ‘세기의 발레리나 강수진 라이프 스토리’란 부제를 달고 있다. 그는 수진이 출연한 국내외 공연을 50여차례 취재했다. 수진의 가족조차 그에게 수진에 관한 사항을 물어볼 정도라고 한다.

    -책 읽어봤습니까.

    “아직 읽지 못했어요. 이번에 와서 책을 받았어요. 그렇지만 내용은 대강 알아요. 책을 쓰면서 저와 여러 번 대화를 나눴거든요.”

    -한국어로 된 책을 읽습니까.

    “당연히 책은 한국어로 읽죠. 제가 말은 약간 서투른 데가 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한국어를 쓸 일이 없어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동생 혜진이에게 전화를 해 한국어를 연습하죠. 부모님과도 한국어로 통화합니다. 한국에 와서 2~3주 있다 보면 한국말 실력이 나아지더라고요. 잡지는 독일어, 영어, 불어로 된 것을 보지만 책은 한국어 책을 읽죠. 한국어로 읽어야 다가오는 느낌이 있어요.”

    고국 무대 선 세기의 발레리나 강수진

    2년 만에 고국 무대에서 선보인 ‘오네긴’의 한 장면.

    수진의 아버지가 베스트셀러 책과 영화 비디오테이프를 가끔 독일로 부쳐준다. 생각나는 영화 이름을 말해보라고 했더니 한참 더듬거리다 최민식 주연의 ‘취화선’을 댔다.

    “시간이 모자라서 비디오를 제대로 못 봐요. 비디오 보고 나면 다음날 피곤하거든요. 한국영화를 한번 틀어놓으면 잠을 안 자고 끝까지 봐야 하니까. 비디오 보다가 밤을 꼬박 새고 다음날 연습하려면 힘들어요.”

    집에서는 남편과 영어, 독일어를 번갈아 쓴다. 보통 때는 영어로 말하지만 신경질을 낼 땐 독어를 쓴다. 단원들과 연습할 때는 영어, 독어, 불어를 사용한다.

    “터키어도 배우려고 노력하지만 힘들어요. 간단한 터키어는 하죠. 제 터키말이 신랑의 한국말 수준과 비슷해요. 제가 여러 나라 말을 하지만 자신 있게 하는 말은 없어요. 그냥 표현할 수 있을 정도면 된다고 생각해요.”

    안무는 나와 안 맞아

    수진은 1967년생이다. 여자로서 출산할 수 있는 연령의 한계점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발레리나는 임신에 대한 중압감이 크다.

    -아이를 갖고 싶지 않습니까.

    “생각이 있지요.”

    -언제쯤.

    “그건 신랑하고 저만 알아요. 그때 가서 말씀드릴 게요. 발레단에서 저랑 두 명만 빼고 모든 발레리나가 아이를 두었어요. 아이가 둘인 무용수도 있죠. 아이 낳고 발레단에 다시 돌아오죠. 임신한 상태라고 해서 연습을 그만둘 필요는 없으니까. 아이 뱄다고 해서 딱 드러누워 움직이지 않으면 나중에 복귀하기 힘들어요.”

    -언젠가는 발레를 그만둬야 할 시기가 올 거 아니겠습니까. 발레리나를 그만두고 나면 뭘 할 건지, 인생 플랜을 짜놓았겠지요.

    “예전엔 그만두면 뭐 하나 하고 걱정을 했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발레를 예전보다 더 즐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처럼 모르고 그냥 하는 게 아니거든요. 똑같은 작품을 해도 더 깊이 알고 하니까. 사람이 알면 알수록 재미있잖아요.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재미있듯이. 언젠가는 그만두겠죠. 발레리나는 다른 예술분야보다 수명이 짧으니까. 그만두면 후배들에게 제가 배운 것을 전수해주고 싶어요.”

    -안무를 할 건가요?

    “저는 안무 탤런트가 없어요. 안무도 탤런트가 있어야 하는 거예요. 예술은 무작정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재능에 노력이 따라야죠. 학교 다닐 때 안무를 해봤어요. 시험을 보니까. 제 크리에이티비티(창조성)가 안무에서는 발휘되질 않아요. 몸으로 하는 건 훨씬 만족을 느끼는데, 안무는 저하고 잘 안 맞더라고요. 학생들 가르치는 코치를 하고 싶어요. 내가 했던 역을 다른 사람한테 가르쳐주는 것은 자신 있어요.”

    -한국에 돌아와 후진을 양성하는 코치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당연히 있죠. 한국에서 저를 필요로 하면 와서 가르쳐야죠. 어느 나라든지 저를 필요로 하는 나라에 가야죠. 꼭 한 군데 정한 것은 아니니까.”

    수진은 1999년 4월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이라고 일컫는 ‘브노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ce)’ 최고 여성 무용가상을 받았다. 수진이 이 상을 받았을 때 슈투트가르트는 축제 분위기로 들떴다. 러시아 모스크바에 본부를 둔 국제무용협회에서 정상급 발레단의 무용수들을 대상으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주는 상이다. 이 상을 받고 난 후에는 개런티가 뛰어올랐다.

    -수입은 얼마나 됩니까.

    “그건 누구한테든지 공개 안 해요. 이해해주세요.”

    -돈을 어떻게 관리합니까. 용돈은 얼마나 쓰나요?

    “독일에서는 돈 쓸 시간이 없어요. 집에서 극장까지 신호등에 안 걸리고 빨리 걸으면 3분 걸려요. 독일에 있을 때 저는 항상 청바지에 티셔츠, 그리고 재킷을 걸치죠. 신발은 아픈 발 때문에 항상 운동화를 신어요. 그래서 옷을 살 필요가 없죠. 답답하면 가끔 신랑이 옷을 사가지고 와요. 좋은 옷은 다 신랑이 사준 거예요. 먹는 데 돈을 많이 쓰죠. 음식엔 돈을 아끼지 않아요. 제일 맛있는 것만 먹고 다녀요. 그거 아니면 돈 쓸 데가 없지요.”

    -버는 건 많고 쓰는 건 조금이니 곧 부자가 되겠네요.

    “아니죠. 마르크화가 유로화로 바뀌면서 다들 힘들어해요. 물가가 두 배 가까이 올랐어요. 많이 벌지는 않지만 저는 행복해요. 나중에 돈이 더 모이면 편안하게 살아야죠.”

    독일 슈투트가르트는 고풍스런 건물이 많고 도시 외곽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인구는 57만명. 슈투트가르트 극장 앞에 분수가 솟아오르는 작은 호수가 있다. 수진은 이 아름다운 도시의 문화진흥 공익광고 모델이다. 슈투트가르트 거리를 누비는 15번 전차 한가운데에 수진이 춤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꽃가게에서는 ‘수진 강’이라는 이름의 난(蘭)을 판다.

    수진은 이 도시에서만 19년째 산다. 15세에 한국을 떠나 절반 이상의 생애를 그곳에서 보낸 셈이다. 수진이 사는 독일풍 아파트 창문을 통해 슈투트가르트 도시 전경이 들어온다.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시민들이 대개 그녀를 알아본다. 사람들은 그녀와 마주치면 ‘하이’ 하며 웃고 지나간다. 꼬마 아이들은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도 한다.

    “You’re crazy!”

    세계적인 연주자에게 “당신은 연주를 안 할 땐 뭘 합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 연주자는 “연주를 안 할 땐 연습을 한다”고 대답했다. 연습벌레라는 수진은 연습을 안 할 때 무엇을 할까.

    “취미생활 하기가 힘들어요. 일주일에 딱 한 번 시간이 나면 사우나에 가요. 사우나에서 땀 빼는 게 좋아요. 휴일에도 연습을 하죠. 밥 먹는 것과 비슷해요. 그걸 안 하면 그날은 이상하죠. 열이 40℃까지 올라 침대에서 못 일어날 때를 빼놓고는 이제껏 한 번도 연습을 거른 적이 없어요.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제가 연습하는 걸 보면서 신랑은 ‘You’re crazy!’라고 해요.

    학교 다닐 때는 밤 12시에 위층으로 올라가서 체조를 했어요. 극장에서 하는 연습만으로는 부족해요. 남자 무용수들은 피트니스를 해요. 발레 동작만으로 근육을 보호할 수가 없거든요. 근육운동을 해야죠. 허리 근육과 무릎, 발의 근육을 강화해줘야 하니까. 취미로 꽃꽂이를 한다든가, 수를 놓는다든가 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많은 사람들이에요. 연습 별로 안 하는 사람들이죠. 사이사이에 시간 있으면 저는 자요. 잠이 보약이거든요. 잘 자고 잘 먹고 연습하다 보면 24시간이 다 가버려요.”

    브노아 드 라 당스 상을 받았던 그해 말 수진은 정강이뼈가 금갔다는 의사의 판정을 받았다. 수년 전부터 왼쪽 다리에 통증을 느꼈으나 치료를 미루고 연습과 공연을 계속해 결국 상태가 악화된 것이다.

    “연습을 너무 독하게 해서 그런 일이 생긴 거죠. 아파서 걸을 수가 없더라고요. 서너 명의 의사한테 번갈아 찾아갔어요. 5년 전에 금가기 시작한 건데 뼈 위에 있는 보호막이 심하게 곪았대요. 처음 부상당했을 때 휴식을 취해야 할지 고민스러워 의사들에게 물어봐도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어요. 헬스 크림을 바르면 나을 거라고 해서 계속 바르기만 했죠. 그러다 금이 조금씩 커지고 마지막에 뼈가 부러진 채로 무용을 했어요.

    ‘지젤’의 프리마 발레리나를 맡아 공연을 앞두고 연습을 해야 하는데 도저히 걷지를 못하겠더라고요. 마지막에는 고통이 너무 심해 잠을 못 잤어요. 연습을 못 할 정도로 아팠어요. 그래서 다시 의사한테 갔더니 지금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무용을 더 이상 못 할 거라고 해요. 그래서 그때 ‘지젤’ 공연을 포기하고 1년 넘게 쉬었죠.”

    뼈 부러진 채 공연도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와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각 한 차례씩 2년 동안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고 했는데 그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입니까.

    “모나코 때는 마리카 교장이 저를 붙들어 주셨어요. 그분이 저를 안 붙잡아주셨다면 벌써 무용을 그만뒀을 겁니다. 열다섯 살 때라 부모님도 보고 싶고 한국의 모든 것이 그리웠어요. 보통 학생들처럼 고등학교 수학여행도 가고 싶었고…. 여진 언니가 저보다 두 살 위거든요. 여진 언니가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가고 대학교 때 졸업여행 가는 게 그렇게 부러웠어요. 사실 대학생활도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게 그렇게 부럽더라고요.”

    비슷한 이야기를 골프선수 박세리한테서도 들은 적이 있다. 프로에 일찍 입문해 성공하는 바람에 캠퍼스 생활을 못 해본 것이 못내 아쉽다는 것이었다. 박세리나 강수진처럼 어느 분야에서 최고가 된 사람들은 정상의 기쁨을 누리는 대신 자잘한 낭만이나 즐거움은 포기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세상은 그런 면에서 공평하다.

    “마리카 교장이 자신이 도와줄 테니 가지 말고 더 있으라고 붙잡았어요. 그래도 만날 울면서 엄마 아빠한테 전화해서 한국에 가고 싶다고 했어요. 엄마 아빠가 ‘언제든지 올 수 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도와주시니 조금 더 해보라’고 하셨죠. 그때 한국의 발레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발레를 계속하고 싶으면 모나코에 조금 더 있어보라는 거였죠.

    모나코 생활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어요. 잘 먹지를 못했어요. 유럽 음식이 제 입에 안 맞더라고요. 그리고 말을 못 하잖아요. 영어, 불어도 못 하고…. 영어, 불어는 아이들하고 기숙사에서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늘었어요. 발레에도 점점 재미를 붙이게 됐죠. 제가 고집이 세서 한번 한다고 하면 해야 돼요. 그때부터 혼자서 달밤에 체조를 하기 시작했죠. 그 고집 때문에 제가 살았어요. 고집이 없었다면 그냥 포기했겠죠. 지금도 똑같아요. 원래 성격이 그래요.”

    수학·졸업여행 가고 싶었다

    모나코에서 잠을 줄여가며 갈고 닦은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이뤘다. 수진은 18세 때인 1985년 청소년들이 기량을 겨루는 장(場)으로 국제적 명성을 자랑하는 스위스 로잔 국제발레 콩쿠르에서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1위에 입상했다. 수진은 모나코 발레학교를 졸업한뒤 엄격한 오디션을 거쳐 240년 전통을 자랑하는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들어갔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도 자살 충동이 일 정도로 슬럼프에 빠졌다고 했는데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저는 어려서 학교 다닐 때부터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게 아니라 저 자신과 경쟁했어요. 발레단에서 군무를 출 때도 주역 발레리나에게 경쟁의식을 갖지 않았어요. 사람마다 스타일과 표현이 다르잖아요. 똑같은 역을 해도 저 자신의 발전을 위해 한 번 더 연습하는 거지요. 군무를 오래 하면서도 빨리 솔로(獨舞)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안 했어요. 저는 군무를 오래 해 오히려 도움을 받았어요. 군무를 안 했다면 지금 주역의 자리까지 못 올라왔을 거예요. 군무는 자신을 표현하기 힘들지만 가장 만족스러운 행복감을 줍니다.

    제가 처음 줄리엣 역을 맡은 것도 군무를 하다 눈에 띄었기 때문이죠. 저는 군무에서도 제일 뒤에서 했죠. 당시 감독 하이델씨가 제일 뒤에서 춤추는 저를 발탁해 줄리엣을 시켰어요.

    요즘 학생들은 처음부터 빨리 솔로 하고 빨리 주역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거 안 좋아요. 먼저 자기와의 경쟁을 해야죠. 발전에는 끝이 없죠. 공부도 끝이 없잖아요. 시간이 모자라는데 다른 사람 의식하느라 시간을 뺏기면 안 되죠.”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수진을 ‘강철 나비’라고 부른다. 나비의 부드러움과 강철의 강인함을 함께 갖췄다는 것이다.

    수진과 50분 가량 인터뷰를 했을 때 남편 툰치가 호텔 라운지로 들어왔다. 수진이 그를 보며 “제 남편이 오네요”라며 그에게 ‘하이’라고 인사를 했다.

    툰치는 ‘T S Fine Arts’라는 공연 매니지먼트 회사를 운영한다. 장광열씨에 따르면 툰치의 팔뚝에는 ‘수진’이라는 한글 문신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수진과 잠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아내의 이름을 새겼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런 남자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부부싸움은 자주 합니까.

    “싸운 기억이 없어요. 심각하게 토론을 하고 조금 화가 난 적이 있긴 하지요. 그러면 남편이 먼저 ‘Let’s forget it’이라고 말하죠. 우리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토론의 끝에 가서는 서로를 이해하게 되죠.”

    -남편이 어떻게 청혼했어요?

    “무대는 햇볕이 쨍쨍 내리쬐던 여름날의 터키 해변이었어요. 툰치가 ‘나와 삶을 영원히 함께하겠냐’고 묻더군요.”

    -다른 발레단을 찾지 않고 슈투트가르트에 19년째 붙박이로 있는데요.

    “그곳에서 제 발판을 만들었잖아요. 처음 군무 할 때 사실 다른 데로 가고 싶었어요. 학교 때 최고였던 무용수일수록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자기가 왜 이렇게 기다려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게 마련이지요. 그때 저는 네덜란드 이리 킬리언한테 가고 싶었어요. 그 사람의 무브먼트를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갈 필요가 없었던 게 안무가들이 저희 발레단으로 와서 같이 작업을 해요. 그리고 제가 다른 발레단에 게스트로 갈 수 있죠. 슈투트가르트에 소속돼 있으면서도 다 할 수 있으니까요. 저희 발레단은 클래식만 하는 게 아니라 클래식, 모던, 네오클래식 등을 다 합니다. 저한테 가장 맞는 발레단이에요.”

    -초등학생 수준의 질문입니다만 슈투트가르트는 세계에서 몇 번째 가는 발레단입니까.

    “스타일이 달라서 순위를 매길 순 없어요. 저희가 이번에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갈라공연(발레작품의 명장면을 모아놓은 것)을 했어요. 볼쇼이극장은 세계 최고의 무대입니다. 러시아는 클래식을 위주로 하고 모던은 별로 안 하죠. 영국의 로열발레도 클래식을 위주로 해요. 그런데 슈투트가르트의 메인 포인트는 클래식, 모던, 네오클래식을 다하는 거죠. 저희 발레단에 들어오려면 다 할 줄 알아야 해요. 러시아 볼쇼이, 영국 로열발레, 뉴욕시티… 각기 스타일이 다르잖아요. 아메리칸 시어터 스타일이 다르고…. 스타일이 달라 순위를 매기기 어렵지만 세계에서 5위 안에 드는 발레단이죠.”

    고국 무대 선 세기의 발레리나 강수진

    남편 툰치와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담은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강수진.

    -한국 발레의 수준에 대해 솔직하게 점수를 줘보세요.

    “제가 떠나던 20년 전과는 180도 달라졌어요. 미래에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죠. 그리고 요즘엔 모든 것이 아시아로 돌아와요. 지금은 한국 붐이 일고 있어요. 한국뿐 아니라 일본 중국 등 아시아 전체가 빨리 성장하고 있어요. 옛날 한국의 무용수들은 몸 콤플렉스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런 게 없어졌어요. 지금 후배들을 보면 키가 크고 예쁘죠. 어떻게 그렇게 예쁘게 태어났는지 신기할 정도예요. 예전에는 다리가 짧고 얼굴이 커서 발레무용수로서는 콤플렉스가 있었죠. 테크닉으로는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아요.

    물론 발레 예술이 테크닉만으로 되는 건 아니에요. 테크닉은 베이스(기본)고 성격, 개성, 표현력, 카리스마가 조화돼야 좋은 무용수로 뻗어나갈 수 있어요. 군무 무용수와 발레리나가 거기서 갈라지죠. 그러니까 카리스마가 없으면 아무리 무용을 잘해도 그냥 군무나 해야 하는 거죠. 표현을 못하면 아무리 테크닉이 좋아도 인정받지 못해요. 미술분야도 테크닉만 좋은 화가들은 위로 못 올라가잖아요. 뭔가가 다르기 때문에 평가받는 거죠. 객석에서 심판하는 거죠.”

    수진의 세 자매는 나란히 예술의 길을 걷고 있다. 언니 여진은 서울대 음대와 네덜란드 왕립음악원을 졸업하고 부천시향 하프 연주자로 활동하다 지금은 미국에 살고 있다. 동생 혜진은 서울대 음대를 졸업해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음대에서 연주학 석사학위를, 프랑크푸르트 국립음대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들에게는 외할아버지의 예술혼이 흐르고 있다. ‘한국의 로트레크’라 불리는 구본웅 화백이 외할아버지.

    -형제(3녀1남)가 자주 만나나요.

    “저희들 우애가 좋죠. 이렇게 많이 낳아 주셔서 지금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게 너무 좋아요. 부모님께 감사드려야죠. 형제 없이 딱 한 명만 있으면 얼마나 쓸쓸하겠어요. 어릴 때보다 지금 성장해서 연락을 더 자주 합니다. 저희 자매는 모두 예술을 했으니까. 그리고 막내 대준이는 건축과를 나왔거든요. 예술 하는 누나들 틈에 끼여 사느라 만날 ‘띵땅 띵땅’하는 소리 듣기를 싫어했죠. 그런데 지금은 예술에 대해 많이 알아요.

    여진 언니는 하와이에 살아요. 남동생은 한국에 살죠. 멀리 살아도 항상 가깝게 친구처럼 지내죠. 동생 혜진이는 독일 사람과 결혼해 프랑크푸르트에 살아요. 거의 매일 전화를 합니다. 가끔 놀러와서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하지요. 여진 언니와는 전화를 시작하면 두 시간씩 하죠.”

    남자들에게 전화는 사실과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 도구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다른 사람과 유대(紐帶)하는 수단이다. 바버라 피스와 앨런 피스가 ‘남자는 왜 이야기를 듣지 않고, 여자는 지도를 못 볼까’라는 책에서 한 이야기다. 여자친구와 2주의 휴가를 함께 보낸 여성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두 시간 동안 수다를 떠는 사례가 그 책에 나온다. 뇌의 해부 사진을 보면 여성은 언어에 관여하는 뇌의 부위가 남성보다 훨씬 크다. 수진에게도 수다는 어쩔 수 없는 본능인 모양이다.

    -시댁도 예술을 하는 집안이라지요.

    “시부모님께서 오페라 성악가셨어요. 시아버님은 1980년대 초에 돌아가셨습니다. 시어머님은 오페라 성악가로 대학원 교수를 하다 은퇴했죠. 시아버님은 오페라 가수로 터키에서는 파바로티처럼 유명했던 분이랍니다. 시동생은 비올라와 첼로를 하고, 트럼펫을 하는 조카도 있습니다. 발레를 한 삼촌이 신랑을 가르쳤고요. 다 예술가죠.”

    발레 다음으로 좋아하는 건 음악

    -어릴 때 꿈은 뭐였습니까.

    “스튜어디스.”

    1960, 70년대 해외여행이 어려웠던 시절 스튜어디스는 선망의 직업이었다. 집안에서 누가 외국에 나가면 온 친척이 김포공항에 나가 배웅을 했다. 수진은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로 유학을 갈 때 비행기를 처음 타봤다. 스튜어디스가 되지 않고 발레리나가 됐지만 비행기를 실컷 타고 해외여행 다니는 꿈은 이룬 셈이다.

    -한국에는 언제 다시 올 건가요.

    “다음번에 셰익스피어 원작 ‘말괄량이 길들이기’로 저의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싶어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어요. 저를 보고 드라마틱 발레리나라고 하는데 제겐 다른 면도 있거든요.”

    -인생을 살아가는 좌우명이나 철학이 있다면?

    “오늘 최선을 다해 살라는 거죠. 매순간 최선을 다하면 후회할 수가 없어요. 잘하든 못하든. 그러니까 과거 일은 벌써 지나간 일이고 내일은 아직 안 온 것입니다. 계획을 세워야 하지만 오늘 열심히 안 살고 내일 것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안 돼요. 지금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항상 결과가 좋아요.”

    -언론 인터뷰에서 춤추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말을 자주 하던데요. 춤추는 시간 외에 행복한 시간이 있다면….

    “작은 데서 행복감을 맛보죠. 예를 들면 신랑과 집 근처 공원에 강아지를 데리고 나가서 걸을 때. 우리 강아지가 예뻐요. 슈투트가르트에는 숲이 많아요. 산책할 때 숲에서 마시는 공기도 행복 그 자체죠. 좋은 사람들을 만났을 때 행복하고요. 좋은 얘기할 때 행복하고요. 마음을 늘 편하게 가지려 하지요. 모든 걸 불행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어요. 아무리 좋은 걸 줘도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찡그리고 만족을 못 느끼는 사람은 불행한 거죠. 이 세상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어요.”

    수진은 발레 다음으로 음악을 좋아한다. 클래식 재즈 팝, 가리지 않는다. 최근에는 노라 존스(Nora Jones)의 노래를 즐겨 듣는다. 재즈 가수로 2003년 그래미상 최고 신인상을 받았다. 미국의 흑인가수 냇킹 콜(Nat King Cole)도 좋아한다.

    -발레와 음악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아, 떨어질 수 없죠. 저희 발레단에 피아니스트가 5명 있어요. 발레단이 크고 연습량이 많으니까. 피아니스트들도 힘든 작업을 하죠. 모든 작품을 다 배워야 해요. 음악을 못 듣는 발레 무용수는 성장에 한계가 있어요.

    음악성이 있어야 특별한 발레리나가 될 수 있어요. 음악성이 있는 사람은 발레하기가 쉬워요. 발레는 음악에 맞춰 하기 때문에 음악을 못 듣는 사람은 힘들어요. 호흡이 안 맞으니까. 음악성이 없고 그냥 도레미파만 아는 파트너를 만나면 춤이 잘 안 되죠. 발레도 파트너와 호흡을 맞추는 마술이거든요. 그게 안 맞으면 힘들어요.”

    어느 무대든 최선 다한다

    -이번에 ‘오네긴’ 공연 하면서 특별한 소감이 있습니까.

    “고국 무대에 자주 서지 못하는 저를 기다리는 팬들의 마음을 제가 아니까 책임감이 크죠. 당연히 다른 나라에서 하는 공연보다는 감회가 깊죠. 하지만 저한테 중요한 건 어느 나라든지, 어느 무대든지, 조그만 무대든지 큰 무대든지, 항상 최선을 다하는 제 마음입니다. 한국공연이든지, 아니면 어느 시골에서의 조그만 공연이든지, 저한테는 늘 똑 같아요.”

    1시간15분 동안 인터뷰를 하고 약속대로 오전 8시에 끝냈다. 세기의 발레리나 강수진의 심층을 들여다보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다. 수진은 한국어가 조금 서툴렀지만 질문 하나하나에 성의 있게 답변하려고 노력했다. 부족한 부분은 장광열씨의 책과 동아일보 출판기획팀 홍현경 기자가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수진과 주고받은 팩스 인터뷰 내용을 빌렸다.

    ‘신동아’ 인터뷰가 끝나자 KBS TV 카메라와 주간지 여성지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수진은 사진기자들의 요구에 일일이 포즈를 취해주었다. 툰치가 공항 갈 시간이 됐다고 재촉해도 “딱 5분만”이라며 늦게 온 사진기자들에게도 촬영 기회를 주었다.

    가수 엘튼 존은 지난 9월 대만에서 포토라인을 무너뜨린 사진기자들을 향해 ‘더러운 돼지들’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신(神)은 왜 인간성이 못된 자에게 노래 잘하는 재능을 준 걸까.

    강수진에게서는 단순한 인기관리가 아니라 자신의 발레를 사랑하는 팬들에 대한 성의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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