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산사에서 바라본 일출.
비록 강원도 일대의 화전민들은 1973년을 기점으로 대부분 사라졌지만, 척박한 땅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이어온 민초들의 잔향은 여전하다. 산이 끝나고 마을이 시작되는 지점마다 옥수수와 감자밭이 보인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구황작물이라 불렀으나, 화전민들에게는 하루하루 먹고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식량이었다.
산에서 잘 자라는 작물은 제한돼 있다. 토양이 척박하고 일조량이 모자란 탓이다. 이런 현상은 겨울이 긴 북쪽으로 갈수록 더욱 심해진다. 때문에 화전민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백두대간을 타고 조금씩 북상하다가 어느 지점에선가 걸음을 멈추고 촌락을 형성했다. 옛 문헌에 따르면 현재의 오대산국립공원 부근이 한 차례 숨을 골랐던 곳이다. 강원도 강릉시와 홍천군 그리고 평창군에 둘러싸인 298.5㎢의 오대산. 그곳은 한때 화전민들의 생명을 지켜준 젖줄이었으나, 요즘은 연간 100만에 달하는 탐방객이 찾아드는 국민관광지로 변모했다.
단풍에 미친 가을나그네

서울에서 강원도로 흘러가는 차량이 줄을 이었다. 단풍이 절정을 이루려면 아직도 2주쯤 더 기다려야 하지만, 설악산 깊은 산골은 벌써부터 불을 뿜고 있었다. 발 빠른 산꾼들은 이런 그림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들은 등산객들로 뒤덮인 단풍관광보다도 클라이맥스를 기다리는 미완의 풍경에서 더 큰 감동을 맛본다.
그러고 보면 산을 타는 것과 연인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닮은 구석이 있다. 얼마 전 오대산 노인봉에서 만난 어떤 나그네는 단풍의 전조를 따라 남하한 지 벌써 보름째라고 했다. 그는 1년 동안의 휴가를 한데 몰아서 가을에만 산을 찾는 단풍마니아다. 남들이 단풍을 기다릴 때 그는 산속을 달리고, 남들이 단풍을 찾아 몰려올 때 그의 산행은 막을 내린다. “설악산 공룡능선에 단풍이 들면 가을나그네가 움직입니다.” 그가 오대산을 떠나 두타산으로 향하면서 던진 말이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평창군 진부면에 내렸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시가지 상점마다 일찌감치 불을 꺼 초겨울 분위기다. 요기를 할 만한 곳을 찾았으나 마땅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걷다가 막 문을 닫으려는 식당 아주머니를 채근해 다음날 산행에 가져갈 김밥을 주문했다. 순식간에 김밥 네 줄을 말아준 아주머니는 “이런 날씨에도 산에 가느냐. 일기예보를 보니까 내일은 얼음이 언다는데…”라며 길손의 안전을 걱정했다. 10월 초에 얼음이라. 역시 남한에서 겨울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동네답다.
진부에서 택시를 타고 10여분 달리면 오대산 월정사 갈림길이 나오는데 백두대간 종주자들은 여기서 오른쪽 방향, 즉 진고개 쪽으로 들어가서 동대산으로 붙는다.
월정사는 자장율사가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 비로봉 밑에 적멸보궁을 짓고 2년 뒤에 창건한 고찰로, 역시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상원사와 더불어 오대산 자락을 대표하는 불교유산이다. 흔히 오대산에 들어선 사람들은 월정사 초입의 전나무 숲길에서 한 차례 마음을 씻고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이어지는 호젓한 오솔길에서 새로운 마음을 담는다고 한다. 특히 8km나 이어지는 월정사~상원사 코스는 경사가 거의 없어 부담없이 걸을 수 있는 산책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