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10월15일 부산아시아경기대회 기간 중 부산 다대항에 정박했던 북한의 만경봉호가 시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출항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의 북송저지 노력은 지극히 제한적인 것들뿐이다. 이승만 정부는 재일동포 북송을 승인한 일본 정부에 항의하고, 서울에서 50만명이 반대데모를 벌였다. 일본에서는 재일 민단 소속 청년들이 철로에 몸을 내던져 니가타항으로 향하는 열차를 가로막기도 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북송을 막을 수 있는 방도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교가 수립돼 있지 않던 한국과 일본은 적국(敵國)처럼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일제식민지를 겪은 한국은 말할 것도 없었고 일본도 ‘이승만 라인’으로 불리던 이 대통령의 동해 수역 보호 활동과 이에 따른 일본어선의 나포로 한국에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한국 정부가 재일동포들의 북송을 막기 위해 목숨을 내건 공작원들을 일본에 밀파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북송저지대 대원이었던 조승배(趙承培·76)씨는 당시 내무부 치안국의 경찰간부로부터 직접 호출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술 한잔 마시자는 연락을 받고 나갔더니 ‘조국을 위해 한번 더 일해보지 않겠나’라고 말하더군요.”
치안국 경찰간부의 호출
조씨는 6·25전쟁 때 재일동포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한 경험이 있다.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재학 중이던 18세 때 최연소 학도병이 됐던 조씨는 조국 전장을 누비며 공산주의자들의 불의함을 몸으로 체득한 이였다. 그런 이유로 그는 주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북송저지대원의 길을 선택했다.
조씨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59년 9월초 서울 북한산 초입에 있는 우이동의 신원사(현 普光寺) 근방으로 불려갔다. 이때 국가의 부름을 받고 모인 대원들은 조씨처럼 재일동포학도의용군 출신 41명과 경찰간부시험 합격자 24명, 예비역 장교 1명 등 모두 66명이었다.
공작원 교육은 3개 소대로 분리돼 이뤄졌다. 암호 해독 방법과 신분세탁법, 비밀연락, 특수파괴, 침투위장 등 특수공작 교육을 받았다.
“각자의 임무는 혼자만 알 뿐 동료에게도 보안을 지켰습니다. 일본 사정을 잘 아는 저에게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대원들에게 지령을 전달하는 연락망인 레뽀(レ一ポ)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럼 훗날 일본에서 라디오를 통해 지령을 내리는 ‘마쓰시타 데라코’상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조씨의 설명이다.
“그땐 북한산도 민둥산이나 다름없었습니다. 6·25 직후 사람들이 땔감으로 나무를 다 베어갔으니…, 그런데 우리가 훈련받던 곳에는 수백년 수령의 아름드리 소나무(마쓰-松)가 많았고 그 근방에 신원사(데라-寺)가 있었습니다. 우리 대원들은 소나무 숲에 있는 절 아래(松下寺)에서 훈련받았던 셈이죠. 지령을 내리는 사람이 여성이니까 마쓰시타 데라코(松下寺子)였고 곧 대한민국 치안본부를 지칭하는 암호였던 겁니다.”
재일동포를 주축으로 한 북송저지대는 일본 사정도 잘 알고 현지 언어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기에 북송저지 활동을 펼치기에는 적임자들이었다. 대원들은 2개월가량 훈련을 받고서 곧장 작전지인 일본으로 투입됐다. 첫 북송선이 니가타항을 출항하는 12월14일을 약 1개월 앞둔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