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개국공신 조보(趙普)는 2대에 걸쳐 정무를 총괄하는 재상을 지냈다. 그는 본시 시골의 무지렁이인데다 젊은 시절 내내 전쟁터를 돌아다니느라 배운 것이 없었다. 나라를 세우고 관리가 된 후 읽은 책이라고는 ‘논어(論語)’밖에 없다고 한다.
2대에 걸쳐 정권을 잡다보니 정적들이 생기게 마련. 그를 두고 ‘고작 논어 한 권 읽은 무식한 사람이 재상직을 너무 오래 누린다’는 입소문이 돌았던 모양이다. 미심쩍어하는 임금에게 조보는 이렇게 말했다.
“정녕 제겐 논어 한 권밖에 없습니다. 하나 논어 반 권으로는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는 데 도움을 드렸고, 나머지 반 권으로는 폐하의 정치가 태평을 이루는 데 쓸 참입니다.”
-나대경의 ‘학림옥로(鶴林玉露)’ 중에서
이른바 ‘반부 논어’라는 고사가 등장하는 대목이다. 창업에 논어 반 권, 수성에 나머지 반 권이라니 제국을 건설하고 경영하는 데 논어 한 권만으로도 넉넉하다는 주장이다. 조선은 이성계의 무력과 정도전의 유교적 경영 프로그램이 힘을 합쳐 만들어진 나라다. 유교 프로그램의 핵심 텍스트가 논어이니 조선조 500년은 논어라는 레일 위를 달려간 열차에 비유할 만하다.
그러니 다산 정약용이 “공자가 자로와 염유 등에게 늘 정치적 업무로서 인품을 논하였고, 안연이 도를 물었을 때도 나라를 다스리는 것으로 대답하였으며 각자의 뜻을 말해보라고 할 때도 역시 정치를 행하는 것에서 대답을 구하였다. 이에 논어의 효용은 경세(經世)에 있음을 알 수 있다”라던 주장을 수긍할 수 있다. 또 정약용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일본의 유학자 이토 진사이가 논어를 두고 우주제일서(宇宙第一書), 즉 ‘세상에서 가장 으뜸가는 책’이라고 찬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천하와 국가도 경영하는 터에 기업경영이 대수이랴. 일본의 기업경영 철학을 제시하여 ‘동양의 피터 드러커’로 추앙받는 시부사와 에이치가 ‘논어와 주판’이라는 기업경영론 속에서 “상인의 재능도 논어를 통해 충분히 배양할 수 있다. 언뜻 도덕적인 책과 상인의 재능은 관계가 없는 듯 보이지만 그 ‘상인의 재능’도 원래 도덕을 뿌리로 두고 있게 마련이다”고 주장한 것이 이해가 된다. 또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이병철은 “나의 생각이나 생활이 논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만족한다”라고 술회했는데, 이 또한 대기업을 창업하고 성장시키는 데 논어가 의미 있는 기여를 했다고 내세울 증거가 된다.
논어의 그늘
한데 이병철의 언급을 따져 읽어보면 그동안 이 땅에 드리워졌던 ‘논어의 그늘’을 느낄 수 있다. “논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만족한다”는, 멈칫거리는 말투 속에 오늘날까지 연면한 ‘논어’라는 단어에 엉킨 어두운 이미지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40대 이상 중년층은 논어라고 하면 ‘부모에 대한 효도와 나라에 대한 충성’이라는 문투가 연상될 것이다. 당시 초중등학교 담벼락에는 어김없이 충효(忠孝)라는 큰 글자가 쓰여 있었고 아이들 일기장에조차 ‘충효일기장’이라고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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