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호

신작 ‘소년을 위로해줘’ 펴낸 은희경

“인생은 ‘내 안의 혁명’ 발견해 각자 살아나가는 것”

  • 이남희│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irun@donga.com

    입력2011-01-19 18:0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중견작가로서의 무게를 벗어나 가볍게 쓰다
    • “메이저와 마이너 경계 나누지 말자”
    • 거친 불량학생의 내면 몰라 주인공 캐릭터 바꿔
    • 틀을 깨뜨리는 ‘은희경식 자녀교육법’
    • “너인 채로 괜찮아. 우린 각자 다 소중하니까”
    • 나조차 동의하지 않은 규율 가르친 게 어른으로서의 반성
    신작 ‘소년을 위로해줘’ 펴낸 은희경
    인터뷰 장소로 향하며 생각했다. 두 뺨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이 소설가 은희경(52)의 서늘한 문체와 닮았다고. 냉소와 위악, 세상과 ‘거리두기’로 각인된 그의 작품들을 떠올린다. 행여 그 날카로움에 베이진 않을까. 첫 만남을 앞두고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킨다.

    “차가 많이 밀리네요.”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로 은희경이 들어선다. 인사를 건네는 그의 목소리가 나긋하다. 때론 사근사근 애교가 넘친다. 견고한 마음의 방어벽이 스르르 무너지는 순간이다. 진한 오렌지빛 니트 상의에 회색 미니스커트, 컬러풀한 스타킹…. 그의 옷차림은 30대 초반인 기자보다 발랄하다. 마치 트렌디하고 감각적인 그의 글처럼. “문학동네 시상식에서 축사를 맡아 특별히 예쁘게 입었답니다.” 그는 생기발랄한 소녀처럼 말했다.

    은희경을 만난 건 성탄절을 앞둔 지난해 12월23일. e메일과 트위터로 인터뷰를 요청한 지 약 한 달 만에 성사된 만남이다. 지난해 11월 장편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를 펴낸 그는 신작 출간 후 빠듯한 해외 일정을 소화했다. 멕시코 과달라하라 도서전과 일본에서 열린 ‘2010 한중일 동아시아 문학포럼’에 잇달아 참가한 것이다.

    ▼ 멕시코와 일본 방문은 재미있으셨나요? 한 일간지에 기고한 멕시코 방문기를 재밌게 봤습니다.



    “멕시코에서 고등학생들과의 만남이 가장 좋았죠. 100명 넘는 소년, 소녀들과 포옹도 하고! 200명 넘는 학생들이 강당에서 시끄럽게 떠들다가도, 얘기가 시작되면 각자 ‘쉿!’ 하며 자기들끼리 분위기를 자정하는 게 인상 깊었어요 그걸 보면서 ‘그대로 놓아두면, 아이들이 스스로 방향을 찾아가는데 어른들이 사회통념으로 아이들을 너무 경직시키는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일본에서도 중학교에 갔는데, 멕시코와는 분위기가 달랐어요. 일본 학생들이 줄 맞춰 딱 앉아 있는 걸 보면서 동양권의 학교 교육에 강박이 있구나 싶더라고요. 하지만, 그들과 얘기해보니 역시 아이다움이 나오더라고요.(웃음)”

    ▼ ‘새의 선물’은 스페인어로 번역돼 멕시코에서 소개됐죠? 현지 독자 반응은 어땠나요?

    “멕시코 학생들이 질문하는 게 (한국 독자들과) 거의 비슷해요. ‘소설 속 주인공이 선생님 자신인가요?’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할 때 어떻게 하세요?’ 등의 질문들…. 결국 개별을 통해 보편에 이르는 거구나 생각했죠. 사실 제 소설이 외국에서 잘 읽힐 거라는 기대는 별로 안 해요. 번역의 문제도 있고, 출판의 문제도 있고. 개인의 능력으로 프런티어처럼 나서는 분들도 있는데, 그런 분들이 성공하면 한국 작가들의 위상이 더 높아지겠죠. 저는 아직 그렇게 사회 활동을 할 역량이 안 돼요. 외국 독자가 제 책을 많이 읽길 바라는 건 다음 문제죠. 일단 알리면, 언젠가 열매를 딸 시기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 ‘한중일 동아시아문학포럼’은 어떠셨나요?

    “이 포럼은 세 나라에서 돌아가며 개최돼요. 2009년 1회가 한국에서, 이번 2회가 일본에서 열렸죠. 작가들에게 공부도 많이 시키고, 다른 나라 작가들과 만나 얘기할 수 있어 좋아요. 사담도 많이 나눴는데, ‘일식’의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는 부인이 굉장히 유명한 모델이잖아요. ‘부인이 모델이라서 좋겠다’고 하니까 ‘화장 지우면 못 알아본다’고 농담을 하더군요. 시마다 마사히코는 10년 전 일본 행사 때 처음 알게 됐는데, 자주 마주치니까 친근감이 생겨 이번 행사 때 얘기를 많이 나눴어요. 중국 작가들은 일단 체제가 다르니까 얘기 나눌 때 조심스러운 게 있어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른 작가들은 저런 식으로 일하는구나’를 보고 느낄 수 있었죠.”

    대중과 평단의 사랑

    신작 ‘소년을 위로해줘’ 펴낸 은희경

    은희경은 신작 ‘소년을 위로해줘’를 통해 누구나 간직한 소년의 감수성을 말한다.

    은희경은 평단과 대중의 사랑을 동시에 거머쥔 작가다. 1995년 서른다섯 살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그 해 첫 장편 ‘새의 선물’을 발표하며 단숨에 한국 문단의 스타로 떠올랐다. 그의 작품 중 가장 많이 팔린 ‘새의 선물’은 지금까지 75쇄를 찍었다.

    그는 1997년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로 동서문학상을, 1998년 단편소설 ‘아내의 상자’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1998년), ‘마이너리그’(2001년)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랐다. 2005년 출간한 장편소설 ‘비밀과 거짓말’은 “한국 사회의 근대화 과정이 안고 있는 모순과 갈등, 성취의 실상을 두 세대에 걸친 한 가족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중견 작가로서 정점에 선 그가 5년 만에 들고 나온 장편소설이 바로 ‘소년을 위로해줘’다.

    ‘소년을 위로해줘’는 힙합 음악에 빠진 열일곱 살 소년 연우의 얘기다. 그는 이혼 후 ‘옷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엄마와 단둘이 산다. 철없어 보이는 엄마를 “신민아씨”라고 부르는 두 사람의 모자 관계는 보통 가정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엄마에게는 문화평론가이자 여덟 살 어린 애인 재욱이 있다. 연우가 힙합에 매료된 것은 동급생 태수가 들려준 힙합 그룹 ‘G-그리핀’의 노래를 우연히 접하면서부터. 미국에서 온 귀국 부적응자 태수와의 우정, 신비로운 소녀 채영과의 사랑을 통해 연우는 성장한다.

    전작 ‘비밀과 거짓말’에서 묵직한 서사를 보여준 그가 소수 젊은이의 전유물인 힙합을 다룬 점은 신선한 파격으로 다가왔다. “50대 작가가 힙합과 10대 얘기를 다룬 이유가 궁금했다”는 반응에 그는 일침을 가했다. “누가 썼느냐는 선입관 없이 이 소설을 읽어줬으면 좋겠다”면서.

    “소설 독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죠. 먼저 주인공과 작가를 동일시하는 ‘작가 동일시 독법’이 있는데, 작가와 주인공이 완벽히 일치하는 건 아니잖아요. ‘이게 현실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야’ 하고 생각하는 독법도 별로 좋지 않다고 봐요. 사실 ‘쓴 사람이 누구냐’는 평론가가 관심을 가질 문제지, 독자는 그냥 작품으로 읽어줬으면 좋겠어요. 요즘은 ‘소년을 위로해줘’라는 제목이 적절했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해석의 여지를) 너무 제한하잖아요. 이 소설은 단순히 열일곱 살 소년의 얘기가 아니에요. ‘새의 선물’이 단순히 열두 살 소녀의 얘기가 아니 듯.”

    “우리는 낯선 우주의 떠돌이 소년”

    은희경은 ‘작가의 말’에서 “우리 모두가 낯선 우주의 고독한 떠돌이 소년”이라고 썼다. 나이와 성별을 떠나 누구나 간직한 소년의 감수성을 건드리는 것이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시스템에 얽매이지 않는” 아웃사이더다. 또한 이 소설이 주목하는 것은 힙합의 혁명성과 마이너리티 삶의 가치다. 문득, 1958년생 개띠 친구 네 명의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다룬 그의 전작 ‘마이너리그’가 여기에 겹쳐진다. 한국 문단의 주류인 은희경은 왜 ‘마이너 세계’에 천착하는가.

    “사람들이 ‘마이너 세계에 관심 있으십니까’라고 물어보면 저는 말이 통해야 하니까 그렇다고 답하죠. 하지만 속으로 ‘나는 메이저, 마이너라고 경계를 나누는데 반발하는 소설을 썼어’ 하고 생각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메이저와 마이너를 가르지 말자. 그냥 너는 너, 나는 나’라는 거죠.”

    ▼ 신작 출간 기자회견에서 ‘작가로서 가진 메이저 세계가 불편했고, 그 반성 때문에 미국에서 완전 소수자로 살았다’는 말씀도 하셨던데요.

    “제가 미국에 간 2002년이 소설집 ‘상속’을 냈을 즈음인데, 당시 작가로서 경직되는 걸 느꼈어요. 작가로서 기득권을 갖게 되면서 사고의 방향이 너무 안이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게 무서워지더라고요. 그래서 미국(시애틀 워싱턴주립대학)에서 비지팅 스칼라(방문 연구원) 제안이 왔을 때 쉽게 결정했어요. 미국에서 주류가 아닌 인생, 불안하고 초라한 인생을 살아보는 것도 작가한테는 훈련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 그래서일까요. ‘소년을 위로해줘’는 전작에 비해 힘을 빼고 가벼워진 느낌이 듭니다.

    “제 아들이 듣던 힙합가수 키비의 노래 ‘소년을 위로해줘’에서 소설의 모티프를 얻었어요. 음악을 들으면서 ‘제가 작가로서나 가정에서나 경직된 어른이었다’는 생각이 통렬하게 왔어요. 중견작가라는 틀에서 벗어나 좀 가볍게 쓰고 싶었어요. 중견작가로서의 무게를 통과하면 뭐가 나오는지 보자 하는 마음도 있었죠.”

    언제부턴가 거울을 쳐다보는 습관이 생겼지 / 표정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지을 수 있어 / 하지만 내 주위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편하지 않아 / 그들이 내게 강요하는 것은 오로지 남자스러움 말야. (래퍼 키비의 노래 ‘소년을 위로해줘’ 중)

    중성적으로 키운 딸

    주인공 연우는 소심하다. “무난한 것, 중간, 눈에 안 띄는 게 좋다”고 말한다. “싸우는 게 싫다”며 어린애들에게도 맞고 들어온다. 그의 전작 ‘마이너리그’의 주인공 형준 역시 첫사랑 상대에게 고백도 못하는 소심한 사색가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맥이 닿아 있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공감을 표시했다.

    “사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작가 자신이 들어가게 마련이에요. 연우의 마음속에도 제가 굉장히 많아요. 특히 못해본 풋사랑을 하는 내가. 사실 처음에는 태수 같은 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거친 불량 학생의 내면을 잘 모르겠는 거예요. 그때 키비의 노래를 듣고 이런 주인공이면 만들 수 있겠다 싶어 얘기가 달라졌죠.”

    주인공의 엄마 ‘신민아씨’는 전통적인 어머니상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다. 그녀는 ‘마이너의 길’을 택한 이유에 대해 “모범생, 건전한 주부 이런 틀이 싫어서일 수도”라고 말한다. 사랑스러운 여배우 신민아를 떠올리게 하는 그 이름부터 비범하지 않은가.

    “신민아씨 캐릭터를 떠올리며, 엄마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골랐어요. ‘옷 칼럼니스트’라는 직업은 제가 옷에 관심이 많아서 설정한 거고요. 사실 제가 신민아씨와 비슷한 부분이 많아요. 숫자에 약한 것도 그렇고. 신민아씨처럼 두 아이를 대했어요. 소설 속에서처럼 일찍부터 아이들을 호프집에 데리고 갔죠. 뭔가 틀을 깨보고 싶었어요. 예를 들어, 제 딸은 어린 시절부터 중성적으로 키웠어요. 레이스 옷이나 인형도 안 사줬죠. 제 자신이 너무 여성스럽게 길러졌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남성용과 여성용으로 가르는 걸 하지 않았더니, 딸이 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에 힘들어하더라고요. 그게 이번 소설 속 채영의 모습이에요. 나만의 방식을 현실과 조율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제 식대로 교육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어요.”

    ‘소년을 위로해줘’는 그의 아들과 딸에게 바치는 선물 같은 작품이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그의 자녀들은 이 소설의 ‘최초 독자’이자 ‘최고 조언자’였다.

    “연우 캐릭터는 상당 부분 아들에게서 왔어요. 아들은 작품 속 아이들의 말투나 미국 유학생의 말투에서 어색한 것이 없는지 교열해줬죠. 신민아씨가 아들에게 해주는 말은 제가 딸하고 메신저로 나눈 이야기에서 거의 따왔어요.”

    ‘소년을 위로해줘’에서 신민아씨의 인생강좌는 위트와 통찰이 넘친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돌파하는 현명한 방법을, 사람들에게 상처 받지 않는 방법을 그로부터 배웠다. 예를 들면 이런 문구에서 말이다.

    “신민아의 법칙 중 그런 것도 있었지. 방정식이 안 풀리면 책을 덮고 밥을 먹어라. 무조건 끙끙대기보다는 새로운 기분으로 문제에 매달릴 수 있도록 체력을 보충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본다. 연우야 잘 들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해서 일이 저절로 잘 풀리는 건 아니야. 스스로 일을 잘 풀어가게 되는 거지. 그리고 말야, 서로 사이가 좋아서 가족이 행복한 게 아니라, 각기 제 인생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가족이 사이가 좋아지는 법이야. 그러니까 내가 내 행복을 찾고 있는 건 너를 위한 일이기도 해. 알겠지?”(213~214쪽)

    “왜 모든 걸 틀 속에 가뒀을까”

    은희경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은 시대를 예리하게 꿰뚫는 ‘현재성’이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1998년)는 “애인은 적어도 세 명은 되어야 안심”이라는 30대 여성 주인공의 선언으로 당시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단편소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2007)에는 아름답게 보이고 싶으나 그럴 수 없었던 한 뚱뚱하고 고독한 남자가 등장한다. 제38회 동인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이 작품은 “현대의 의식과 욕망을 다룸으로써 대중의 보편적 관심을 얻는 데 성공했다”(오정희)는 평을 들었다. ‘소년을 위로해줘’ 역시 힙합이라는 트렌디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현재의 가장 뜨거운 이슈를 포착하는 그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저라는 사람은 현재에 관심이 많아요.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끼고, 안 해본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어요. 힙합은 제가 거부했던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강력하게 어필했어요. 헤드폰을 끼고 음악 듣고 있으면, 꼭 다른 사람들을 거부하는 것 같잖아요. 그런데 제가 막상 헤드폰을 쓰고 음악을 들어보니 거기에 몰두하게 되는 거예요. 왜 모든 것을 틀 속에 가뒀을까. 왜 상투적으로 생각했을까. 그러지 않으려는 노력이 소설 속에 많이 반영돼요. 나조차 문제니까 같이 고민하자는 취지에서 (새로운 것들을) 쓰게 됐어요. 제 소설이 ‘독자를 가르치는 것 같다’고 느끼는 분들도 계신 것 같은데, 저는 항상 제가 모르는 걸 알아보려고 쓰는 거예요. 그래서 현재의 것이 담기는지도 모르겠어요. 그걸 사람들이 ‘트렌디하다’고 봐주시는 것 같아요.”

    2005년 ‘비밀과 거짓말’을 기점으로 “은희경이 달라졌다”는 세간의 평이 나왔다. 1990년대 작품들이 삐딱한 시선과 서슬 퍼런 조소로 세상에 저항했다면, 최근작에서 작가의 시선은 넉넉하고 둥글어졌다. 그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인가, 아니면 의도한 것인가.

    “자연스러운 의도겠죠.(웃음) 작가가 변해가면서 생각도 바뀌는 것이고, 그게 작품이 돼 나타나겠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새의 선물’ 때와 생각이 바뀌진 않았어요. ‘새의 선물’의 세계는 ‘다들 이게 옳다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 그 이면을 보면 아닐 지도 몰라’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죠. 하지만 ‘소년을 위로해줘’에서는 그에 대한 대답을 하고자 했어요. 현재 찾아낸 대답은 ‘각자 다 괜찮아’라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살아야 되냐’고 묻는다면, ‘너인 채로 괜찮아. 우린 다 각자 소중해’라는 거죠.”

    ▼ 세월을 품어 시선이 보다 유연해지고, 따뜻해진 것 같습니다.

    “‘따뜻하다, 냉소적이다’라는 말은 가치 개념이 들어 있어 그다지 정확하지 않아요. 그냥 그렇게 느끼는 거죠. 사실 ‘소년을 위로해줘’의 결론도 따뜻하지는 않아요. 모두 각자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거니까. ‘내 안의 혁명’을 발견해서 내가 나를 위로해야 한다는 것이니까. 굉장히 차가운 결론인 거죠.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도 마찬가지예요. 누군가와 함께 춤을 추는 게 아니라, 결론은 혼자 추는 춤이니까요. 단어나 형식이 그렇게 보일 뿐이지 저의 기본적인 생각은 ‘누구를 의지하고 위로하고 화해하고 따뜻하게 살아가자’가 아니에요. ‘너는 너일 수밖에 없어. 너는 혼자야’에 가깝죠.”

    위악과 냉소의 외피(外皮)를 벗었지만, 은희경의 본질적인 정서는 ‘쿨함’이다. 단어 선택은 까다롭고, 맺고 끊음은 분명하다. 기자의 감상에 맞장구를 치고, 때론 조목조목 반박하는 그는 ‘밀고 당기기’의 묘미를 느끼게 했다. 마치 ‘연애하고 싶은 여자’의 전형이랄까.

    작품과 일상 사이의 분열

    작품 얘기를 잠시 접고,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물었다. 은희경은 1959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내 삶이 시작부터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기에 열두 살 이후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는 ‘새의 선물’ 속 열두 살 소녀 진희와 닮아 있지 않을까. 그는 “사실은 따돌림 받는 아이였다”고 고백했다.

    “고창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어요. 겉으로는 온순하고 모범적인 아이였지만, 실은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어요. 좀 밥맛없는 애였어요. 현실을 잘 모르고 어수룩하면서, 어른들 맘에 드는 그런 아이일 뿐이었어요. 그래서인지 제 소설의 중요한 출발점은 따돌림 받는 사람들의 심정이에요. 제 소설 속에 따돌림 받는 애들이 많이 나오는데, 처음엔 잘 몰랐어요. 어느 날 제 책을 보면서 깨달았죠. 그때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서 계속 그 얘기를 쓰는구나 하고요. 소설을 쓰다 보면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알게 되는 것 같아요.”

    그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하지만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온 집안 식구가 이사를 하게 된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건 변해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저는 평탄하게 살아와서 큰 상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쓴 소설을 보면 하나도 안 잊고 있는 거예요.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서 가족이 트럭에 짐을 싣고 집을 떠났는데, 그 당시에는 덤덤하게 받아들이려고 애썼어요. 그게 제 나름의 생존 방식이었어요. 아이들의 세계라는 것이 본능적으로 자기를 지키려는 놀라운 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소설에 그런 얘기를 쓰는 걸 보면 제 삶의 기복이 나타나는 듯해요.”

    전주여고 재학 시절에는 질문 하나 던지지 않는 조용한 학생이었다. 그는 위축된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그나마 문예반 활동이 그의 숨통을 트이게 해주었다. 은희경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기자는 2006년 ‘여성동아’ 근무 시절, 한 시사주간지 기자로 일하던 작가의 남편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2002년부터 3년간 두 자녀를 미국 공립학교에서 교육시킨 경험담을 듣기 위해서였다. 언론계 선배이기도 한 그를 인터뷰하면서 느낀 건 ‘소설가 은희경도 보통의 엄마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에 대해 “미국에서 생활하던 2년간은 보통의 엄마로 살았다. 이전에는 그렇게 못해준 것이 맘에 걸린다”고 반박했다. 그래도 도발적이고 전복적인 여성상을 그려온 작가에 대한 판타지가 깨어지는 걸 느낀다.

    “(웃음) 그런 분열이 있다니까요. 작품하고 저의 일상하고는. 그래서 작품은 더 강렬하게 가요. 제 생각과는 다르지만, 현실에서는 이미 세팅된 인생이잖아요. 서른다섯에 작가가 됐으니. 가정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동의하지 않지만, 이 인생에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럴수록 작품을 쓸 때는 ‘이데올로기 싫어. 이 틀을 벗어나고 싶어’라는 마음이 더 나오는 것 같아요.”

    기자가 악역인 이유

    기자 남편을 둔 은희경의 작품 속에는 숱한 기자 캐릭터가 등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하나같이 악역이라는 사실이다. ‘마지막 춤을 나와 함께’를 보자. 시사주간지 기자 종태는 유부남이지만 여주인공 진희와 은밀한 사랑을 나눈다. 한 여성지 기자는 술자리에서 들은 진희의 사생활 얘기를 잡지에 기고해 그를 곤경에 빠뜨린다. ‘마이너리그’ 속 스포츠신문 기자 김부식은 정치적 계산이 빠른 데다 비열하기까지 하다. 그가 혹시 기자에게 악감정이 많은 건 아닐까.

    “제 작품 속 기자는 악역이 많은데, 이것은 일종의 외조예요. 악역을 만들어야 하는데, 다른 직업을 쓰면 주변 사람들이 상처 받거든요. 그게 자기 얘기라고 여기니까요. 대학교수가 ‘애인이 셋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소설을 쓰니, 친구들이 ‘자기를 그런 식으로 만들면 어떡하느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무조건 악역은 기자예요. 다들 ‘자기 남편 얘기 쓴 거겠지’ 하고 생각하니까요.”

    ▼ 부부가 ‘뜻이 잘 맞는 동지’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맞아요. 소설가의 남편으로는 거의 모든 걸 갖췄어요. 코멘트를 잘 해주는 부분도 있지만, 특히 저를 혼자 둘 수 있다는 게 정말 어려운 거거든요.”

    ▼ 몇 년 전 인터뷰에서 “결혼 후 모든 게 바뀌었다”고 말씀하셨던데요. 결혼은 작품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결혼은 진정한 독립이었어요. 모든 걸 책임져야 하니까요. ‘결혼은 두 사람이 만나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는 것’이란 상투적인 말을 믿었는데, 결혼해보니 꼭 그렇지는 않더라고요. 조금 더 독립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그런 인식이 작품에도 투영됐죠. 오늘 재밌는 광경을 하나 목격했어요. 파스타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옆 테이블에 앉은 한 여성이 꼬마 여자아이에게 ‘너, 부모와 남자는 절대 믿지 마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보던 다른 여성은 ‘좋은 교육이야’ 하고 동의했고요.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사실 통쾌했어요. 그런데 저는 이런 말을 잘 안 하려고 해요.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제가 그렇게 말하면 ‘무슨 사연이 있나보다’ 생각하니까요. 그런 상투적인 일들이 아닌데, 설명하기 너무 힘드니까 그 부분에 대해 아예 말을 안 해버리는 거죠.”

    수많은 통념이 남기는 상처

    ‘규율과 통념’에 대한 반발은 단순히 가정이나 결혼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은희경은 20대 시절 약 1년간 국어 교사로 근무했다. 그는 한 신문에 기고한 에세이에서 “실패한 교사시절, 나를 억압하던 분위기가 떠올라 학교라는 장소에 들어서는 순간 위축된다”고 밝혔다. ‘인기 교사’였을 듯한 그가 자신의 교사 생활을 실패로 규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제가 아이들에게 모범이 돼야 한다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저도 어리고, (생각도) 정립이 안 돼 있는 상황이었죠. 제 생각과 다른 규율을 강요해야 한다는 게 이중적이라고 느껴졌어요. 그래서 오히려 더 열심히 규율을 강조한 감이 있어요. 고답적인 선생님이었죠. 결국 교사 생활은 끝내 떠올리고 싶지 않은 옛날이 돼버렸어요. 소설을 쓸 때도 생각했는데, 제가 어른으로서 했던 나쁜 짓은 나조차 동의하지 않았던 규율을 아이들에게 가르친 거예요. 그게 어른으로서의 반성이에요.”

    신작 ‘소년을 위로해줘’ 펴낸 은희경

    은희경은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데 수많은 통념이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고 답했다.

    ▼ 나조차 동의하지 않는 규율이 구체적으로 뭔가요?

    “존경할 수 없는 사람을 존경해야 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해야 하고, 내가 되고 싶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의문을 품으면 안 되는 절대 규칙들. 언젠가 ‘스승의 날’ 칼럼에서 ‘과거에는 배낭을 메고 다니면 맞았는데 지금 학생들은 괜찮다’는 얘기를 봤어요. 우리가 왜 지켜야 하는지 모르는 규율이 존재하는 거죠. 손수건을 오른쪽에 달았다는 이유만으로 뺨을 맞고, 똑같이 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비난을 받았잖아요. 이런 일들을 떠올리며 부모로서나, 교사로서나 심각한 반성이 왔어요. 저 자신도 많이 유연해지려고 노력했죠.”

    고정관념을 뒤엎는 은희경의 일갈은 쾌감을 선사한다. 우리는 ‘남자다워야 한다’ ‘여성다워야 한다’ ‘어른스러워야 한다’ ‘부모다워야 한다’ 등 수많은 통념 속에서 얼마나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가.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데, 수많은 통념이 우리에게 큰 상처를 준다”는 작가의 말에 몇 번이고 무릎을 쳤다.

    은희경의 소설에 담긴 도발적 메시지는 때론 논란의 불을 지피기도 했다. 그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세상과 불화를 일으켜야 하는 ‘소설가로서의 나’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일상적인 윤리의식’ 사이의 마찰이 버겁다”고 말했다. 자신의 생각이나 욕망을 솔직히 글 속에 드러내는 것이 두렵지는 않을까. 그 내적 갈등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그러니까 제가 산문을 못 썼던 거죠. 자기를 다 드러내야 하니까요. 그런데 ‘소년을 위로해줘’를 쓰면서 저도 ‘그런 모습 보이면 어때’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이제는 산문을 쓰기도 하고 심지어 트위터도 하잖아요. 예전 같으면 생각도 못했죠. 이 소설을 쓰면서 제가 먼저 감화를 받은 거예요. ‘너인 채로 괜찮다’고 인정하니까, 어떤 것을 감추려고 긴장하는 데서 자유로워지더라고요.”

    세상을 보는 나만의 시각

    은희경은 이 시대 문청(문학청년)들의 로망이다. 그는 1995년 등단 당시 출판사에 다니며 아이 둘을 키우는 맞벌이 주부였다. 그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두 달간 ‘집중 습작’을 거친 뒤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그 결과, 첫해 응모에 당선되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그가 작가 지망생에게 주는 조언은 무엇일까.

    “사실 습작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됐어요.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글짓기를 잘했고, 책을 많이 읽었고, 중·고등학교 때는 문예반과 교지편집반 활동을 했죠. 대학은 당연히 국문과로 진학했고요. 그런 기간을 거치며 문장 감각이나 글 구성력을 갖췄겠죠. 하지만 20대에 작가가 되지 못한 것은 생각이 따라주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제가 서른다섯 살에, 첫해 응모에 당선된 것은 지금도 진심으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신춘문예 심사를 해보니, 신춘문예 당선이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만큼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등단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 할 말이 있다는 거죠. 글 솜씨도 필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보는 나만의 시각과 감수성을 갖는 거예요.”

    ▼ 지금까지 총 10권의 소설을 내셨죠? 그중 최고 작품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어떤 것이 제일이라고 뽑기는 어려워요. ‘소년을 위로해줘’는 경직돼가는 저를 많이 가볍고 유연하게 만들어줘서 지금 제게는 중요해요. 그냥 누구에게 제 책을 추천할 기회가 생긴다면 사람에 따라 다르게 말해요. 책을 잘 안 읽는 사람에게는 ‘새의 선물’을 추천해요. 쉽고 친근하니까요. 문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는 ‘비밀과 거짓말’을, 단편 습작을 하는 분들에게는 ‘타인에게 말 걸기’를 권해요. 가장 애정을 갖는 작품이 사실 늘 바뀌는데 지금은 ‘소년을 위로해줘’죠.”

    대화 말미, 은희경은 “긴 인터뷰를 하다 보면 꼭 정답을 맞히려고 열심히 대답하게 된다”고 말했다. 어쩌면, 틀을 깨뜨리려는 시도와 정답을 구하려는 모범생 기질의 상호작용은 그가 끊임없이 진화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지독한 자기성찰 속에 변화를 모색하는 그의 작품에는 늘 놀라운 통찰이 숨어 있다. 그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 그의 다음 작품이라는 ‘지독한 연애소설’의 내용이 벌써부터 궁금해졌다.



    인터뷰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