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와 열풍.
이석채(李錫采·65) 회장의 KT를 상징하는 말이 되고 있다.
“최근 숨 돌릴 틈 없이 휘몰아치는 국내외 통신시장의 변화를 상징하는 일련의 사건이 있다. 이 중심에 KT가 있다.”(문화일보 2010년 2월24일 보도)
“KT는 공룡이었다. 환경에 빠르게 변화하지 못하는 공룡. 이석채 회장은 이 이미지를 바꿨다. 6000명 희망퇴직으로 군살을 뺐다. 아이폰을 수입하며 스마트폰 열풍을 일으켰다. 통신업계의 이슈를 몰고 다녔다.”(동아일보 2010년 8월16일 보도)
저항에 꺾이지 않는 기개
정통관료에서 매출 19조원의 거대 기업 CEO로 변신한 뒤 휴대전화(아이폰), 텔레비전(올레TV), 인터넷(올레인터넷)에서 국민의 생활양식을 바꾸고 있는 이 남자의 면면을 알아봤다. 경북 성주 출신 이석채 회장은 대구의 삼촌댁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6학년 때 ‘삼국지’를 읽는다. 시험 준비 안 한다고 야단맞자 숨어서 읽었고, 나중에 열 번도 더 읽었다고 한다. 그가 삼국지에서 뽑아낸 키워드(key word)는 ‘저항에 꺾이지 않는 기개’다. 이는 향후 그의 성격과 태도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관우가 보여준 신의, 절개에 크게 감복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모습의 상당부분을 설명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KT를 경영하는 방식에서도 삼국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1990년대 초 경제기획원 예산실장 시절 파도처럼 밀려오는 저항과 반대를 무릅쓰고 수많은 개혁을 완수한 이면에는 삼국지의 전략 전술의 역할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이석채 기고문)
이 회장은 경복고,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1969년 3급을류재정직 공채에 합격하면서 공직을 시작한다. 이후 경제기획원 사무관, 대외협력계획과 과장 등을 역임한다. 학업에 대한 열의가 강해 공직 시절 미국 보스턴 대학에 유학, 1976년과 81년 각각 경제학 석사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제기획원 과장일 때 그의 능력에 대해선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평가가 있다. 이현덕 전자신문 기자는 공무원 이석채를 이렇게 말한다. “그가 기안한 서류는 중간에 한 자의 첨삭 없이 그대로 장관에게 올라갔다. 그리고 얼마 후 정책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장관급 과장’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뛰어난 기획력과 브리핑 능력으로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 의해 대통령비서실 경제비서관으로 발탁됐다. 이후 5, 6공의 경제정책 수립에 깊이 관여했다.”
1992년 이석채 회장은 국가의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경제기획원 예산실장에 올랐다. 법원·검찰 청사 수리를 위한 사법시설특별회계법을 폐지할 땐 판사와 검사가 들고 일어났고, 사회간접자본 투자 목적의 교통세를 신설할 땐 표 떨어질 것을 우려한 국회의원이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이석채 실장은 밀고나가 관철시켰다.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에선 인천국제공항 건설과 고속철도 건설에 들어가는 예산을 대도시 지하철 건설비로 돌리자는 요구가 거셌다. 그러나 이석채 실장은 “절대로 안 된다”고 버텨냈다. 지금은 인천국제공항이 세계 최고 공항, 동아시아 허브 공항으로 성장해 국가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고 있지만 1990년대 당시만 해도 투자효과에 반신반의하는 시선이 많았다. 지역안배 위주의 예산편성 관행을 사업 우선순위 위주로 바꾼 것도 그의 고집 때문이었다고 한다.
영국 방적기와 ‘1%론(論)’
공무원에게는 책임추궁이 돌아올 수 있는 일을 미리 회피하려는 경향도 있다. 절대로 무리하지 않는다. 또한 권력자와 잘 부딪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무원에겐 영혼이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지 않은, TV 드라마 ‘대물’의 하도야 검사(권상우 분) 같은 열혈 공무원은 현실에서도 화를 자초하기 쉽다.
공무원 이석채는 하도야와 닮아 보이는 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비교적 오랫동안 공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이헌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견해에 따르면 이것은 당시 권력자들이 ‘이석채의 통찰력’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고 한다.
통찰력은 현재의 상황에서 앞으로 벌어질 미래를 읽어낸다. 복권 당첨 숫자를 미리 알아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경제평론가 박경철씨는 영국 방적기 이야기를 예로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