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호

‘풍운아’ 이석채의 스마트 경영

스티브 잡스의 위대함 알아본 통찰력 KT 구름 위로 날게 하다

  • 허만섭│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11-01-20 14: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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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도야 검사 닮은 열혈 공무원
    • 세월 낚던 야인에서 인생 재반전
    • 국민의 삶 바꾸는 통신혁명 주도
    ‘풍운아’ 이석채의 스마트 경영


    변화와 열풍.

    이석채(李錫采·65) 회장의 KT를 상징하는 말이 되고 있다.

    “최근 숨 돌릴 틈 없이 휘몰아치는 국내외 통신시장의 변화를 상징하는 일련의 사건이 있다. 이 중심에 KT가 있다.”(문화일보 2010년 2월24일 보도)

    “KT는 공룡이었다. 환경에 빠르게 변화하지 못하는 공룡. 이석채 회장은 이 이미지를 바꿨다. 6000명 희망퇴직으로 군살을 뺐다. 아이폰을 수입하며 스마트폰 열풍을 일으켰다. 통신업계의 이슈를 몰고 다녔다.”(동아일보 2010년 8월16일 보도)



    저항에 꺾이지 않는 기개

    정통관료에서 매출 19조원의 거대 기업 CEO로 변신한 뒤 휴대전화(아이폰), 텔레비전(올레TV), 인터넷(올레인터넷)에서 국민의 생활양식을 바꾸고 있는 이 남자의 면면을 알아봤다. 경북 성주 출신 이석채 회장은 대구의 삼촌댁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6학년 때 ‘삼국지’를 읽는다. 시험 준비 안 한다고 야단맞자 숨어서 읽었고, 나중에 열 번도 더 읽었다고 한다. 그가 삼국지에서 뽑아낸 키워드(key word)는 ‘저항에 꺾이지 않는 기개’다. 이는 향후 그의 성격과 태도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관우가 보여준 신의, 절개에 크게 감복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모습의 상당부분을 설명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KT를 경영하는 방식에서도 삼국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1990년대 초 경제기획원 예산실장 시절 파도처럼 밀려오는 저항과 반대를 무릅쓰고 수많은 개혁을 완수한 이면에는 삼국지의 전략 전술의 역할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이석채 기고문)

    이 회장은 경복고,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1969년 3급을류재정직 공채에 합격하면서 공직을 시작한다. 이후 경제기획원 사무관, 대외협력계획과 과장 등을 역임한다. 학업에 대한 열의가 강해 공직 시절 미국 보스턴 대학에 유학, 1976년과 81년 각각 경제학 석사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제기획원 과장일 때 그의 능력에 대해선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평가가 있다. 이현덕 전자신문 기자는 공무원 이석채를 이렇게 말한다. “그가 기안한 서류는 중간에 한 자의 첨삭 없이 그대로 장관에게 올라갔다. 그리고 얼마 후 정책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장관급 과장’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뛰어난 기획력과 브리핑 능력으로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 의해 대통령비서실 경제비서관으로 발탁됐다. 이후 5, 6공의 경제정책 수립에 깊이 관여했다.”

    1992년 이석채 회장은 국가의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경제기획원 예산실장에 올랐다. 법원·검찰 청사 수리를 위한 사법시설특별회계법을 폐지할 땐 판사와 검사가 들고 일어났고, 사회간접자본 투자 목적의 교통세를 신설할 땐 표 떨어질 것을 우려한 국회의원이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이석채 실장은 밀고나가 관철시켰다.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에선 인천국제공항 건설과 고속철도 건설에 들어가는 예산을 대도시 지하철 건설비로 돌리자는 요구가 거셌다. 그러나 이석채 실장은 “절대로 안 된다”고 버텨냈다. 지금은 인천국제공항이 세계 최고 공항, 동아시아 허브 공항으로 성장해 국가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고 있지만 1990년대 당시만 해도 투자효과에 반신반의하는 시선이 많았다. 지역안배 위주의 예산편성 관행을 사업 우선순위 위주로 바꾼 것도 그의 고집 때문이었다고 한다.

    영국 방적기와 ‘1%론(論)’

    공무원에게는 책임추궁이 돌아올 수 있는 일을 미리 회피하려는 경향도 있다. 절대로 무리하지 않는다. 또한 권력자와 잘 부딪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무원에겐 영혼이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지 않은, TV 드라마 ‘대물’의 하도야 검사(권상우 분) 같은 열혈 공무원은 현실에서도 화를 자초하기 쉽다.

    공무원 이석채는 하도야와 닮아 보이는 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비교적 오랫동안 공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이헌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견해에 따르면 이것은 당시 권력자들이 ‘이석채의 통찰력’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고 한다.

    통찰력은 현재의 상황에서 앞으로 벌어질 미래를 읽어낸다. 복권 당첨 숫자를 미리 알아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경제평론가 박경철씨는 영국 방적기 이야기를 예로 든다.

    ‘풍운아’ 이석채의 스마트 경영

    미국 애플사의 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

    산업혁명기 영국에선 세계 최초로 방적기가 발명됐다. 이로 인해 귀족만 입을 수 있었던 값비싼 모직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가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소수의 감자밭 지주들은 통찰력을 발휘했다. 당시 영국인의 주식 중 하나는 감자였다. 이들은 ‘모직을 대량으로 찍어내려면 그 원료인 양털이 더 필요할 것이다. 양털 값이 오를 것이다. 지금의 감자밭을 목장으로 바꿔 양을 키워야 한다’고 봤다.

    이 예상이 적중했다. 영국의 모직은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로 팔려나갔다. 지주들은 수백 년간 자신의 후손들에게 이어질 정도의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정작 방적기를 발명한 사람보다 더 큰 경제적 성공을 거둔 것이다. 뒤늦게 너도나도 감자밭을 갈아엎고 목장을 만든다. 그러자 감자 품귀로 수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는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양들이 사람을 죽였네, 양들이 사람을 죽였네”라고 노래하는 건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박경철씨는 ‘1%론(論)’을 이렇게 설명한다. “혁신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0.1%의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혁신적인 것이 몰고 올 변화를 통찰해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0.9%의 사람이 있다. 이들 1%의 사람이 세상을 바꾸고 부를 만들어낸다.”

    김영삼 정부는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했다. 1995년 12월 이석채 회장은 정보통신부 장관이 됐다. 그는 국부를 창출하는 몇 가지 통찰력 있는 결정을 내린다. 예컨대 1996년 업무계획으로 발표한 초고속정보통신사업은 ‘IT강국 코리아’의 맹아가 됐다. 이외 정보통신(IT)을 국가기간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한 여러 기술적, 정책적 지원 사업을 내놓았다. 이것은 한국이 2000년대 전세계에 불어닥친 디지털·인터넷 혁명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기틀이 됐다. 해외에선 무명에 가까웠던 삼성, LG 같은 기업이 지금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가 청와대 일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독대하면서 밀어붙인 ‘세계 최초 CDMA 상용화’는 대성공으로 판명 났다. 이동통신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평이다.

    “달리 할 일도 없다”

    ‘풍운아’ 이석채의 스마트 경영

    2010년 9월10일 아이폰4가 출시되자 구매예약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정보통신부 장관 경력은 그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기도 한다. 정보통신부는 1996년 PCS라고 불리는 신규통신 사업자를 추첨이 아닌 서류심사로 선정했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인 2001년 4월 그는 PCS 사업자 선정과정에서 청문심사 배점방식을 특정회사에 유리하게 변경하도록 지시하는 등 관련 업체들이 공정한 심사를 받을 권리를 방해한 혐의(형법 123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로 검찰에 구속 기소됐다. 공직자로서 살아온 삶이 송두리째 부정될 수 있는 위기였다.

    그러나 2006년 2월9일 대법원은 “특정업체가 불공정한 대우를 받게 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면서 이 회장에 대한 무죄 선고를 확정했다. 이를 두고 일부 언론에선 ‘이석채가 김영삼 정부의 경제기획원 예산실장 시절 지역구 예산 관련 민원 거절로 야당 의원들에게 크게 찍혀 있었던 것이 야당으로의 정권교체 후 어느 정도 작용한 것 아니냐’는 해설보도를 내놓기도 했다.

    사실 1997년 2월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 이석채 회장은 세월을 낚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그는 미국 미시간대학교에 초빙교수로 가 있었다. 이 시기에 대해 그는 “달리 할 일도 없었다. 친구가 불러주는 바람에 미국 대학에 적을 뒀다. 그나마 연구실을 배정받아 책 볼 공간이 있는 게 다행이었다”고 말한다.(매일경제 2010년 2월10일 보도) 이후 명지대 석좌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코오롱유화 사외이사, SK C·C 사외이사를 역임한다. 그 5년여간 형사재판을 받는 처지였으므로 그가 받은 심적 부담이 적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가 출범했다. 당시 KT는 남중수 사장 체제였다. 자회사 KTF는 조영주 사장이 맡고 있었다. 남중수 체제는 적어도 수년간 지속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런 예상을 뒤엎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 사장이 납품업체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더니 남 사장도 2008년 11월5일 차명계좌로 납품업체의 돈을 받은 혐의(배임수재)로 구속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사건이 KT에 준 충격은 실로 컸다. 이날 ‘연합뉴스’ 등 언론은 “KT, 창사 이후 최대 위기”로 표현했다.

    그도 그럴 것이 1, 2인자가 모두 구속됨으로써 경영 리더십, 국민기업 이미지가 땅에 떨어졌다. 2008년 3분기 실적발표에서 최대 수익원인 유선전화 매출이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기순이익도 37.3%나 감소한 것으로 나왔다. 성장 동력인 IPTV와 KTF의 3세대 휴대전화에 대해서도 불투명한 전망이 이어졌다. 증권사들은 KT의 목표주가를 5만6000원에서 4만5000원으로 대폭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숙원사업이던 KT와 KTF의 합병은 기약이 없는 듯 보였다.

    이석채 역발상의 하이라이트

    2009년 1월14일 주주총회에서 이석채 회장은 공석이던 KT 사장에 선임됐다. 이 회장 개인으로선 인생의 재반전이다. KT로선 바닥을 치고 도약하느냐 주저앉느냐가 결정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취임 6일 만인 1월20일 그는 이사회를 통해 KTF와의 합병을 전격적으로 결의한다. 그리고 3월18일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승인을 얻어 6월1일 합병을 완료한다. KT는 사무실·집에서 쓰는 유선전화 서비스를 제공해온 공기업 한국통신이 모태다. 2002년 민영화 이후에도 결정이 늦고 관료적인 ‘공룡’ 이미지를 벗지 못한 게 사실. 전광석화 같은 합병 추진은 KT의 극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 회장은 직원 5992명을 희망퇴직으로 내보내 군살을 뺐다. 본사직원 영업일선 배치, 상무보급 대규모 권고사직이 이어졌다. KT 내부에서 ‘혁신 피로’가 나온다는 지적에 대해 그는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으면서 병사들이 피곤하다 했다고 쉬었다 갔느냐”고 했다.(동아일보 2010년 2월24일 보도) KT 노조는 2009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에서 탈퇴했다. KT 관계자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엔 노조도 공감해왔다. 이 회장 취임 이후 비교적 협조적인 노사관계가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이 회장은 통합 KT의 회장이 된 이후 ‘올레(Olleh) 경영’을 발표한다. 올레는 영어 ‘헬로(Hello)’를 거꾸로 쓴 표현. ‘현실에 안주하지 말자, 역발상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자’는 의미라고 한다. 그 역발상 요체가 바로 ‘융합’이다.

    KT 측에 따르면 이는 유선망통신인 KT와 무선망통신인 KTF의 합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이어 휴대전화와 무선인터넷을 하나의 단말기로 이용하는 유무선통합서비스 ‘쿡앤쇼(QOOK · SHOW)’의 출시로 나타났다고 한다. 사용자는 평소엔 이동통신망으로 통화하다 집이나 와이파이(Wi-Fi) 무선 랜이 설치된 곳에선 인터넷전화로 바꿔 쓰고 넷스팟 영역에선 무료로 이용한다.

    이석채식 역발상과 융합의 하이라이트는 스마트폰의 대중화에 있다. 스마트폰은 미국 애플사의 아이폰이 그 효시다. 기존의 피처폰이 통화·문자 등 간단한 기능만 구현한다면 스마트폰은 PC·초고속인터넷과 마찬가지의 훨씬 다양한 콘텐츠와 기능을 제공한다. 스마트폰은 애플리케이션 내려받기로 서비스를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다. 애플사 최고 경영자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을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융합’으로 표현한다.

    심영섭 대구 사이버대 교수(영화평론가)는 아이폰이 인간의 감성까지 기계에 융합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이폰에서는 모든 기능이 표면 위에 배열되어 있다. 터치만 하면 된다는 인식이 든다. 아이폰에 어떤 철학이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스티브 잡스가 주는 메시지를 느낀다. 터치라는 감수성이 기계문명과 융합할 때의 놀라움, 부가기능과 주기능이라는 이분법 경계를 없애는 평등성, 세상과 네트워킹하여 집단지성을 만들어내지 않고는 생존불가능하다는 협업 가능성 같은 것들이다.”(심영섭 기고문)

    “영영 타이밍 놓칠 뻔”

    ‘풍운아’ 이석채의 스마트 경영

    아이폰은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을 제공한다.

    KT 관계자에 따르면 국내에서 소비자가 아이폰을 거의 모르고 통신업계도 아이폰에 대해 반신반의할 때 이석채 회장은 스티브 잡스의 위대함을 알아봤다고 한다. 대세는 스마트폰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2009년 11월 KT는 애플의 아이폰 3G(세대)를 독자적으로 국내에 출시했다. 그로 인해 삼성전자와 껄끄러워졌다. 당시 삼성전자 등 국내 휴대전화 단말기 제조회사들은 피처폰 모델만 내놓고 있었다. 스마트폰 개발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래도 경쟁력이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석채 회장은 삼성과의 갈등을 비껴가지 않고 아이폰을 밀어붙였다.

    아이폰에 대한 국내 소비자의 관심은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아이폰 붐이 국내외에서 본격화되는 2010년 초부터 애플에 선수를 빼앗긴 삼성전자의 휴대전화 단말기 사업부문은 위기국면에 접어든다. 이는 신종균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사장이 2011년 1월7일 “삼성 무선사업부가 지난해 상반기의 위기를 딛고 성장할 수 있었으며 2010년은 삼성 휴대전화에 정말 뜻 깊은 한 해”라고 회상하는 부분에서도 잘 읽힌다.

    삼성전자는 아이폰에 필적하는 스마트폰인 갤럭시S의 개발에 총력을 다한다. 갤럭시S는 한동안 국내에선 SK텔레콤에만 공급된다. 당시 KT와 삼성전자의 소원한 관계를 상징한다. 그러나 지금은 KT에도 갤럭시K라는 상품명으로 제공되고 있다. 이석채 회장은 삼성의 반응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모 언론에 “삼성과 티격태격할 때도 있다”고 했다.

    ‘풍운아’ 이석채의 스마트 경영

    KT의 통신방송위성 ‘올레1호’가 이륙하고 있다.

    KT 내부에선 ‘KT의 아이폰 도입이 삼성전자에 동기부여가 되어 스마트폰 개발을 촉진했다’는 시각도 있다. KT 관계자는 “만약 이석채 회장의 이른 결단이 없었다면 국내 휴대전화 단말기 제조사와 통신업계는 기존 단말기 체제에 조금 더 안주하다 애플이 주도하는 세계적 변화를 따라잡을 타이밍을 영영 놓칠 뻔했다”고 말한다. 삼성전자는 2011년 세계 스마트폰의 선두주자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다. 신종균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사장은 “스마트폰 6000만대를 팔겠다”고 했다. KT 측은 ‘신동아’에 보낸 자료에서 KT의 아이폰 도입이 국민 생활에 미친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국내 굴지의 단말기 제조사들은 스마트폰이 아닌 피처폰 위주의 전략을 가져가고 있었다. 소비자들은 무선인터넷요금이 청구될까봐 인터넷에 연결되면 황급히 종료버튼을 누르기 급급했다. 애플리케이션, 안드로이드라는 용어도 낯설었다. 그러나 KT가 아이폰을 출시한 후 큰 변화가 찾아왔다. 스마트폰 이용자는 730만명을 넘어섰다. 무선인터넷 이용은 일상생활이 됐다.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 사업자가 대거 등장하고 있다. 단말기 제조사들도 경쟁력 있는 스마트폰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한국이 스마트폰의 생산과 이용에 있어 세계의 중심으로 진입하게 됐다. 이러한 변화는 스마트폰의 잠재성을 알아보고 이를 선제적으로 도입한 이석채 회장에 의해 촉발된 것이다.”

    이어 KT 측은 “아이폰에 들어가는 소프트웨어·콘텐츠산업의 활성화를 돕겠다. 이를 통해 중소기업과의 동반성장을 꾀하겠다”고 했다. 이석채 회장 취임 이후인 2010년 한 해 동안 KT는 매출 20조여 원, 영업이익 2조여 원의 실적을 올렸다.

    KT는 최근 직원이 집에서 가까운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스마트워킹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이를 위해 2010년 9월부터 경기도 성남시 분당 사옥 등지에 스마트워킹센터를 개관해 운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분당에서 서울 광화문 사옥으로 출퇴근해온 직원은 분당 스마트워킹센터에서 광화문의 자기 사무실과 거의 마찬가지의 작업환경으로 근무할 수 있는 것이다. 유무선정보통신기술(ICT)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어 업무에 지장이 없다고 한다. KT 관계자는 “출퇴근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여주고 일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육아·저출산 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준다”고 했다. KT는 자사의 스마트워킹 제도를 상품화해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직장문화로 확산시켜볼 계획이다. 2015년 스마트워킹을 도입 할 수 있는 규모가 직원 수로는 250만~30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저 떠다니는 구름처럼”

    클라우드 컴퓨팅(Cloud Comput-ing). 세계 정보통신업계가 요즘 주목하는 화두다. 이것은 문서·동영상 등의 정보를 개인의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 저장하지 않고 클라우드 컴퓨팅 전문 업체의 서버 컴퓨터에 저장해둔 뒤 인터넷으로 연결해 언제 어디서든 꺼내 업무를 처리한다는 개념이다. 기업은 일정액만 내고 서버를 빌려 쓰면 된다. 업무 처리에 도움을 주는 소프트웨어와 플랫폼도 지원될 수 있다. 구름을 뜻하는 클라우드는 서버 컴퓨터를 의미한다.

    KT는 최근 클라우드 컴퓨팅 사업에 뛰어들었다. 충남 천안시 목천에 전용 센터를 만들고 있다. 이석채 회장은 임대 가격을 싸게 하라고 지시했다. 동아일보(2011년 1월4일)에 따르면 미국‘뉴욕타임스’가 자사 컴퓨터로 130년치 신문 1100만장을 PDF파일로 만드는 데엔 14년이 걸리지만 아마존의 클라우드 서비스로는 수시간 만에 끝난다. ‘구름’에 접속하기만 하면 적은 비용으로 업무처리가 가능하다. 여러 기업, 기관에서 반색이다. 세계적으로 시장 성장속도가 빠를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

    경기 성남시 수정구 단대동 ‘KT꿈품센터’. KT가 어린이들에게 음악, 연극, 수영을 즐길 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해 전국 7곳에 지은 꿈품센터 중 하나다. 인근지역의 아동센터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2010년 11월10일 이석채 회장은 이곳을 찾아 어린이들이 부르는 ‘넬라 판타지아’라는 노래를 들었다. 최근 TV에 소개되어 유명해진 곡이다.

    “나는 저 떠다니는 구름처럼 항상 자유로운 영혼을 꿈꿉니다. 깊은 곳까지 박애로 충만한 영혼을. 나는 저 떠다니는 구름처럼 항상 자유로운 영혼을 꿈꿉니다.”

    이 회장은 이 노래를 들으며 어떠한 생각을 가졌을까. 그도 ‘구름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는 사람일까. 스마트폰, 스마트워킹, 클라우드 컴퓨팅은 어쩌면 구름이라는 이미지와 잘 맞는 듯하다. 그는 삼국지에서 배운 기개와 스티브 잡스의 가치를 알아낸 통찰력으로 이 사업들을 무선의 허공 위로 띄워 올리려 하고 있다. 그는 지금 KT를 구름 위로 날게 하고 있다. 이는 누구도 선행하지 않은 영역의 일이다. 앞으로 직면할 도전이 만만치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이미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2009년 1월 그가 오기 전까지 KT는 하늘의 구름과는 무관한 유선통신망 회사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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