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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 - 문명의 교차로에서 ⑪

“상장례(喪葬禮)는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을 세련되게 다듬은 의식”

  • 이경하│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한국고전문학 sitayana@snu.ac.kr

“상장례(喪葬禮)는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을 세련되게 다듬은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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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검의 처리 방식은 종교와 관련된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어 인도의 배화교에서는 흰 헝겊에 싼 시체를 ‘침묵의 탑’이라 불리는 곳에 옮겨놓고 새들에게 그 처리를 맡긴다. 네팔의 티베트인 마을에서는 시체를 산중턱으로 운반해 안치한 후 라마교의 의승(醫僧)이 먼저 시신을 베어 내장을 꺼내고 큰 돌을 떨어뜨려 시신의 머리를 부수는데, 이 모든 행위는 독수리나 까마귀들이 시체를 남김없이 뜯어먹게 해 사체의 뼈만 남기기 위해서라고 한다. 조장의 구체적인 방식이 이방인에게는 언뜻 잔인해 보이지만, 이것은 새에 의해 망혼이 하늘로 운반된다는 그들의 종교적 믿음에 근거를 둔 것이다.

서양 고고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한 인류의 인식이 중기 구석기시대에서 후기 구석기시대로 전환하는 시점, 즉 6만년 전부터 3만년 전 사이에 엄청나게 큰 변화를 맞게 된다고 설명한다. 한 개인의 죽음이 ‘고찰’ 대상이 되면서, 시신 앞에서 “이것이 왜 이렇게 차가운가? 이것이 끝인가? 이 순간이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가?” 하는 죽음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들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매장의 흔적이 집중적으로 확인되기 시작하는 시기가 중기 및 후기 구석기시대라고 하는데, 물론 그 시대에 매장은 매우 특별한 인물이나 상황에 한정된 의례였다.

동아시아문명권에서 무덤의 역사를 한자의 형상을 통해 추정해보면 대체로 ‘장(葬)→묘(墓)→분(墳)’의 형태로 변천해왔다고 일반화할 수 있다. ‘장(葬)’자는 ‘艸+死+·#53830;’로, 시체를 땅이나 널빤지 위에 놓고 풀로 덮어놓은 형상이다. 즉 주검을 ‘감춘다(藏)’는 뜻이다.

‘주역’에서 “옛날에는 죽은 사람을 매장하지 않고 그냥 들에다 두고 풀이나 나뭇가지로 덮고 나무나 봉분도 하지 않았다”고 한 것처럼, 상고시대에는 시신을 들이나 산에 방치하고 초목으로 덮는 정도였다. 그러다 점차 시신을 구덩이를 파고 묻는 형식으로 변화했는데, 처음에는 봉분이 없는 ‘묘’였다. 중국 은나라 때에도 매장지가 없었고, 주나라 문왕과 무왕의 무덤도 평지묘(平地墓)였다고 한다.

그런데 평지묘는 시간이 지날수록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뿐 아니라 짐승들이 시신을 파헤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시신을 짐승에게서 보호하고 무덤을 찾기 쉽도록 하기 위해 ‘분(墳)’자형 무덤을 만들게 된다. ‘土+十+十+十+貝’로 구성된 이 글자는 흙과 조개껍데기를 많이 쌓아 봉분을 갖춘 무덤을 형상화한 것이다. ‘十’자 3개는 30개, 즉 조개껍데기가 그만큼 많이 쌓였다는 뜻이다. 봉분이 있는 무덤은 춘추시대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해서 전국시대에는 보편화되었다고 한다. ‘맹자’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고시대에는 부모가 죽어도 장사 지내지 않고 시체를 들어다가 구덩이에 버렸다. 훗날 자식이 그곳을 지나다보니, 여우와 살쾡이가 시체를 뜯어먹고 파리와 모기가 엉겨서 빨아먹고 있었다. 자식은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눈길을 돌리고 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 식은땀은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흘린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 얼굴로 나타난 것이다. 자식은 곧 집으로 가서 들것과 가래를 가지고 돌아와 흙으로 시체를 덮었다.”

상고 시대라 불리는 아주 먼 옛날, 부모의 시신을 내다버리고도 아무렇지 않았던 때가 있었는데, 인간의 인지가 발달하면서 주검 처리의 방식도 점차 복잡한 체계와 논리를 갖춘 ‘의례’로 정교화 했던 것이다.

장(葬)→묘(墓)→분(墳)으로 바뀐 동아시아 무덤 변천사

한반도에서는 주검의 처리에 관한 어떤 기록들이 남아 있을까? 매장은 선사시대부터 행해졌다고 하는데, 삼국시대 이전 부여에는 이승의 삶이 저승까지 이어진다는 믿음을 반영하는 순장(殉葬)의 풍습이 있었다. 동옥저에서는 시신을 임시로 매장해 살과 가죽이 다 썩고 나면 뼈만 추려서 곽 속에 안치했는데, 가족의 유골을 하나의 곽 속에 보관했다. 이와 같이 시체가 다 썩을 때까지 지상에 방치하거나 땅에 묻었다가 뼈만 추려 다시 매장하는 방식을 이중장(二重葬) 또는 복장(複葬)이라 한다. 삼국시대에 이르면 매장은 물론 부모에 대한 삼년상을 골자로 한 유교식 상장례가 더 널리 행해지는데, 신라의 경우 문무왕 때 불교식 화장법이 시작되어 효성왕 때 일반화되었다.

불교식 상장례의 핵심인 화장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 크게 성행했다. 고려의 묘지명(墓誌銘)에 보이는 일반적인 불교식 상장례는 ‘사망→ 절 근처에서화장→ 유골 수습→ 절에 유골 안치→ 유골 매장’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화장 후에 수습한 유골을 절에 일정 기간 안치하는 것을 권안(權安) 또는 권빈(權殯)이라고 하는데, 부모의 유골을 절에 두고 여러 해가 지나도록 매장하지 않는 자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이처럼 절에 권빈하는 습속은 고려 때 특히 귀족층에서 일반적인 것이었다.

불교의 화장법은 고려 말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비판을 받기 시작한다. 고려 말 1389년 공양왕 때 처음으로 화장에 대한 비판이 공식적으로 제기되었고, 이듬해에는 상장례를 대부와 사·서인(士庶人) 모두 주자가례에 의거하도록 하는 법령을 제정하게 된다. 그러나 오랜 관습이 된 불교식 화장법이 일거에 사라질 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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