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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부록 | 선각자 인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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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경성방직과 창업자 김성수의 경제사적 의의’를 발표하신 이영훈 교수의 논문은 의의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외세의 식민지 시기에 이 땅에서 최초의 근대적 기업을 창업한 전북 고창 김씨가에 관해서 그동안 조기준, 김용섭, 에커트, 주익종 등으로 변천해온 기업가사(史)적 평가의 소개는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김씨가의 지주경영과 경성방직을 한국 근현대에 있어 구래(舊來) 양반 지주층이 중심이 된 반봉건적 예속적 자본주의의 길을 대변했다고 본다든지, 심지어 일본 제국주의의 ‘꼬붕(子分)’에 불과했다든지, 김성수를 ‘제국의 후예’로 본다든지 등 여러 가지 부정적 폄훼에 대해서 하나하나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씨가 형제가 전통경제에서 근대적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선구적으로 인도한 ‘대군의 척후’로 20세기 한국 문명사에서 ‘창조적 소수’의 역할을 담당했다는 발표는 매우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간디와의 교감 통해 ‘민족문화 되찾기 운동’ 적극 펼쳐

● 백완기 학술원 회원

인촌 김성수 선생의 생애를 반일(反日)과 항일(抗日)로 한정하면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제가 상정한 키워드는 독립과 공존적 상생입니다. 인촌은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하고 1919년 경성방직을 세운 뒤인 1920년대 초부터는 확고히 자주독립운동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항일과 독립은 서로 중첩되는 부분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다른 부분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독립이라고 할 때는 경성방직을 설립해 민족산업을 일으켜 세우는 노력이나 언론의 생존을 위한 광고 유치 같은 대목을 상당부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항일로 보면 인촌의 행적이나 사상 면에서 풀리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항일보다는 독립으로 인촌의 정신을 조명하겠다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인촌의 정신은 반일이나 항일보다는 근대화에 초점을 맞춰보면 많은 것이 이해되고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인촌은 독립운동을 펼치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대표적인 경우를 들면 국내에서는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났고 미국에서는 하와이의 이승만 박사를 만났는데 이들은 모두 독립을 강조하는 사람이었지, 반일이나 항일을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세계여행을 할 때 아일랜드의 독립투사를 만나게 되는데 이 인사는 무장투쟁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무력 중심의 항일투쟁은 당시 국내에서는 거의 불가능하였고, 또 인촌은 무력투쟁을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누구와 싸우고 대립하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독립운동의 대부 격인 인도의 간디에게 인촌은 직접 편지를 씁니다. 독립운동을 어떤 식으로 하면 좋을지에 대해 물은 것입니다.

간디가 보낸 답장은 ‘조선은 조선인다운 행동을 하라(Korea will come to her own)’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인다운 혼을 찾는 데 최선을 다하라는 간디의 답장을 받고 인촌은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민족유산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화사업을 추진하게 됩니다. 간디의 답장은 항일운동보다는 독립운동의 길을 걷는 데 큰 자극을 준 것입니다. 결국 교육으로 사람을 키우고 경방으로 산업을 키우고 언론으로 계몽과 문화 창달에 역점을 둔 것이 인촌의 독립사상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인촌은 독립을 위해 힘의 양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촌이 말하는 힘은 정신적, 도덕적인 힘이 아닌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유형의 힘입니다. 교육과 산업, 그리고 언론 등 형체를 가진 것으로 힘을 키우려 한 것입니다. 손병희, 안창호 선생 등과 같은 입장입니다.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계는 희망과 절망이 뒤엉킨 복잡한 부분입니다. 인촌의 인생역정을 추적해보니 인촌을 인간적으로 괴롭게 했던 사람이 4명 있었습니다. 첫째가 경성방직의 이강현입니다. 인촌은 그로 인해 고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다음이 편집국장을 하다가 떠난 춘원 이광수입니다. 해방 후에는 해공 신익희와의 관계가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 사람과의 관계는 종국에는 해피엔드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승만 박사와는 생전에 오해를 풀지 못하고 인촌이 눈을 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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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가 보내온 편지.

이 대통령 당시 1952년 5월 인촌의 부통령직 사임서 내용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평소의 인촌 성품답지 않게 과격한 글이었는데 “이 정부에 내 이름이 들어있다는 자체가 치욕이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내용을 이 박사가 몰랐을 리 만무하지만 인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대동해 문상을 와서 진정으로 슬퍼하면서 애통해했습니다. “나를 대통령으로 민 것은 나를 위해서도 아니고 인촌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을 위해서였다”고 추모했습니다. 그리고 이 박사가 직접 조사를 썼습니다. 아주 가슴 저린 애절한 내용이 이 대통령 조사에 담겨 있습니다. 대통령의 조사는 대한민국 문서의 성격을 띱니다. 거기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 시대에 인촌 같은 애국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 애국자인 척하지만 인촌이 진짜 애국자다.” 인촌도 대인이지만 이 대통령도 대인이라고 느꼈습니다.

또 한 가지 인촌이 남긴 족적 중 중요한 것은 정당정치에 남긴 유산입니다. 인촌은 1948년 정부 수립에서 국무총리가 되지 못했고 야당이 되었습니다. 인촌이 이 박사와 다른 편에 선 것은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이 박사 밑에서 국무총리를 하여 같은 여당이었다면 인촌의 행보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인촌은 1949년 2월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을 통합해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그 최고위원이 됐습니다. 당시 야당은 인기가 별로 없어 의석이 적었지만 인촌이란 거물이 있어 야당정신이 심어졌습니다. 인촌이 야당의 길을 갔기 때문에 올바른 야당의 체질, 정권교체를 할 수 있는 야당의 싹이 그때부터 튼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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