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례에서 알 수 있는 더 중요한 사실은 어떤 사건이나 풍속 등 역사적 현상의 발생과 해석이 종종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관념과 배치된다는 점이다. 처음에 사람들이 침을 뱉지 않는 예절을 만든 이유와 현재의 우리가 침을 뱉지 않는 이유가 서로 다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다. 따라서 우리의 관념에 따라 다른 시대나 사회의 역사를 해석하면 종종 오류에 빠지게 된다.
봉건 또는 중세, 전근대
‘임꺽정이란 옛날 봉건사회에서 가장 학대받던 백정계급의 한 인물이 아니었습니까? 그가 가슴에 차 넘치는 계급적 해방의 불길을 품고 그때 사회에 반기를 든 것만 하여도 얼마나 장한 쾌거였습니까?’(홍명희, ‘임꺽정전(林巨正傳)에 대하여’, 삼천리1호, 1926. 6. ‘임꺽정’ 권 10, 사계절출판사, 2008 재수록)
‘우리는 이 글에서 우리나라에서의 봉건제도의 분해와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에 관한 문제부터 해명하려고 하였다. 이 문제를 해명하지 않고서는 우리나라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전에 관한 문제도 해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전석담·허종호·홍희유, ‘조선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 이성과 현실, 1970)
위의 두 인용문은 20세기에 조선시대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임꺽정은 조선 명종대의 도적이다. 명종 때 문정왕후가 승려 보우(普雨)를 앞세워 정치에 간여하면서 백성의 삶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는데, 그 와중에 생겨난 도적이 임꺽정이다. 사실 나는 위의 글이 정말 벽초 홍명희(1888~1968·월북 소설가·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역임)의 글인지 의심하고 있다. 벽초의 글치고는 너무 거칠고 도그마틱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벽초가 쓴 글이라고 하니 일단 인용해뒀다. 저 글에서 벽초는 조선을 봉건사회라고 했다.

동화에 나올 듯한 예쁜 성은 유럽 봉건제의 흔적이다. 봉건제 아래서 영주는 지역의 왕이었고, 농노들의 거주지역과 분리되어 있었다. 19세기에 지은 독일 노이슈반슈타인(Neuschwanstein) 성은 아름답지만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
이런 까닭에 봉건은 특수한 학술 개념이기도 하지만 담론이기도 하다. 이렇게 담론은 어떤 근본적인 성격이나 특징에 의해 형성된다기보다, 발언 또는 발화(發話)의 규범에 종속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그 발화자의 욕망이나 성격, 신념의 소산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와 무관한 경우가 많다. 이미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게끔 결정돼 있는 것이다.
애당초 ‘개념(槪念)’은 ‘얼개 지식’이다. 그러나 ‘봉건’이 획득한 탄력성과 공감은 바로 ‘봉건’이라는 용어를 특권화 했다. 그리고 이런 특권은 이미 ‘봉건’이 어떤 담론 속에 배치됐음을 의미한다. 그 담론의 공간 안에서 특정 목적과 이론을 통해서 새로운 계열의 개념을 만들고, 각각 뭔가의 실천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봉건, 장원
기실 봉건, 중세는 서유럽 역사 발전의 패러다임이었다. 봉건제에서 권력은 영주의 국왕에 대한 충성, 영주에 대한 기사의 충성에 따라 배분되며, 이를 매개로 불수불입권(不輪不入權·Immunity)을 행사할 권력을 위임받은 영주는 장원 안의 농노를 지배하는 분권사회를 구축한다. 서유럽 봉건제도는 전사(戰士)로서의 복무를 조건으로 봉토를 받고 충성을 서약하며, 봉토를 받은 영주는 자신의 봉토(封土·장원) 내의 농노 노동을 통해 경제를 유지하고, 농노를 지배한다. 8세기 프랑크(카롤링거 왕조) 왕국의 은대지제도(恩貸地制度·베네피키움)에 기원을 둔 봉건제도는 동시에 로마 관료제도의 잔재인 카롤링거 왕조의 흔적을 청산하면서 등장했다.
장원은 가족, 봉신(封臣) 집단, 도시공동체 등과 같은 사회구조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러한 구성물로 이루어진 시대를 봉건사회, 또는 봉건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물론 장원은 본질적으로 경제적 차원의 제도였지만, 그 성격을 이해하려면 이런 연관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장원의 경영은 토지생산물의 한 부분이 단 한 사람에게만 귀속되도록 조직되어 있고 그 주민은 동일한 인물의 지배를 받는 하나의 집단을 이룬다. 그 땅의 지배자이자 소유주인 이 사람이 바로 영주이고, 그 땅이 곧 장원이다. 장원은 이런 두 가지 측면의 결합, 즉 경제적 이익의 도모와 일종의 지배권이라고 부르는 것간의 결합이었다.(마르크 블로흐, 이기영 옮김, ‘서양의 봉건제’, 까치, 2002)
문명의 중요한 단위인 국가의 형태를 통해 봉건제를 정의한다면 당연히 봉건제는 분권사회다. 이에 반해 조선은 중앙집권화된 국가다. 학계에서는 고려시대의 사회 성격을 놓고 귀족제-관료제 논쟁이 있지만, 귀족제설이 꼭 분권사회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조선의 정치제도가 양반관료제였다는 부분에 대해 학계에 이견은 없다. 국가는 재화와 권력을 배분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가장 고도의 문명 양식이다. 그러므로 국가가 중앙집권적인가, 지방분권적인가 하는 것은 봉건제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문제다.
근대주의
이런 점에서 조선사회를 봉건사회(또는 봉건사회를 염두에 둔 중세)라고 하는 것은 역사 현실과 부합하지 않고 따라서 적절한 개념화도 아니다. 이는 한국 역사학의 근대주의를 반영한다. 사실과 가치, 두 측면에서 목적론적으로 도달해야 할 시대가 근대로 설정되어야 하는 것, 그것이 근대주의다.
사실의 측면이란 어느 사회나 적절한 과정을 거쳐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고, 가치의 측면이란 자유와 평화, 인권의 실현을 위해 근대는 바람직한 시대라는 말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로스토 식의 경제발전 5단계설이나, 스탈린 시대 속류 마르크시즘의 역사발전단계설 및 역사 합법칙설 모두 이런 근대주의의 변형이다. 이런 분류의 사유방식을 나는 근대주의라고 부른다. 근대주의에는 이전 시대와 위계를 설정하는 진보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진보관념은 막강한 과학의 힘과 생산력이 뒷받침한다.
물론 근대주의 역사학이라고 해서 다 같지 않다. 로스토 식 발전사관과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이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역사적 유물론, 사회경제사학의 발달은 역사를 정치사, 그중에서도 뛰어난 개인이나 국왕을 중심으로 서술하던 한계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개인에서 사회구조나 형태로 눈을 돌림으로써 인간의 역사적 조건을 이해하는 데 진전을 가져왔다.
경제사나 사회사 연구가 활발해진 것이 그 예다. 그러면서 역사발전의 동력을 주로 영웅이나 초월적 존재 또는 우연에만 맡겨버리던 타성에서 벗어나, 생산하는 사람들, 곧 농민·민중을 포착하게 됐고, 노동·여성·제3세계 등의 역사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