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호

100년 뒤엔 어떤 선율 들려줄까

정명화 241년 된 첼로, 정경화 67.7억짜리 바이올린

  •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12-08-22 15: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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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악기(古樂器)는 수세기에 걸친 음과 진동, 겹겹이 쌓인 소리 나이테를 기억한다. 그래서 청중의 감동은 배가된다. 16세기 안드레아 아마티를 시작으로 17세기의 니콜로 아마티, 안드레아 과르니에리,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만든 바이올린은 지금도 대가들의 사랑을 받는다. 정명화·경화 자매의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와 과르니에리 델 제수 바이올린은 두 대가의 화려한 손놀림에 깊이를 더한다.
    100년 뒤엔 어떤 선율 들려줄까

    정명화·경화 자매의 연주회 모습.

    지난 7월 첼리스트 정명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자매는 TV 토크 프로그램에 출연해 그들의 음악과 삶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정상의 연주자가 되기 위해 땀과 눈물을 흘린 지난 시간의 이야기는 시청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런데 그들의 분신과도 같은 악기를 보여주며 시연했을 때 진행자가 악기 시세를 물었다. 두 대가는 수줍은 미소로 굳이 시세를 말하지 않았다. 정명화 씨는 “지금 갖고 있는 악기는 1771년 만들어진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첼로인데, 전 세계에 30대 정도밖에 없다.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다”고 했고, 정경화 씨는 “가격은 절대 공개 불가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악기이며, 한국의 최고가 미술품보다 비싸다”라고 말해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정경화 씨가 가지고 있는 과르니에리 델 제수(Guarneri del Gesu) 바이올린은 1970년대 후반 약 2억5000만 원에 산 것이다. 현재는 600만 달러(약 67.7억 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몇 년 전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영국에서 120만 파운드(약 21억4000만 원) 상당의 1696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도난당했을 때도 고악기 가격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현악기는 400년 동안 진화하고, 400년 동안 퇴화한다’는 음악계의 속설이 사실이라면, 현재 최고가 현악기는 300년 정도 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100년간은 계속 소리가 좋아질 것이다.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은 경매에서 30억 원 정도에 거래된다. 이 명품 악기는 연간 20% 이상 수익률을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작된 지 100년이 넘은 악기는 골동품으로 인정하는 관세 규정에 따라 세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점도 있어 최근에는 중국의 투자자들이 고악기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현재 투자 가치가 있는 최고급 바이올린은 세계에 450대 정도다. 희소성 때문에 갈수록 가치는 높아진다. 미술품은 시대적인 흐름과 작가의 성향에 대한 반응으로 시세가 유동적이다. 하지만 악기는 소장 가치와 더불어 연주로 전환되는 실용적인 문화유산 가치가 있어 가격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악기의 도시 크레모나

    100년 뒤엔 어떤 선율 들려줄까

    스트라디바리우스.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인구 7만 명의 작은 도시 크레모나(Cremona). 기원전 3세기에 로마인이 세운 이 도시는 게르만, 밀라노, 베네치아, 스페인, 오스트리아 등 외세의 지배를 받은 힘없는 작은 도시였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 16세기부터 최고의 명품 악기가 등장한다. 스트라디바리, 아마티, 과르니에리 같은 제작자들은 모두 크레모나 출신 이었다.

    명품 악기 제작기법은 우리나라 도자기 제작술처럼 도제식으로 전수되어오기 때문에 이 도시에는 전통을 자랑하는 현악기 제작 학교가 많다. 현악기 제작기술을 배우기 위해 세계에서 많은 유학생이 이 도시로 몰려든다. 현재는 도료와 나무 등 재료에서부터 제작 방식까지 과학적 분석과 연구로 선조들의 제작 기법을 그대로 모방하지만 항상 ‘2%’가 부족하다는 평을 받는다. 16세기 중반 북부 이탈리아의 악기 장인들은 중세 현악기를 개량해 지금의 바이올린 형태의 악기를 만들었는데, 초창기 제작자 중에는 안드레아 아마티(1520~1577)가 으뜸이었다. 바이올린은 당시 대표적인 현악기는 아니었지만 이탈리아 피렌체 메디치가(家)의 카테리나 데 메디치(1519~1589)가 크레모나의 아마티 공방에 왕실악단 현악기를 주문하면서 크레모나 현악기가 유럽의 중심에 서게 된다.

    아마티가 제작한 바이올린은 아직도 연주되고 있다. 그의 제작 기법은 두 아들 안토니오와 지롤라모가 이어받았다. 큰아들 안토니오는 크기를 조금 줄여 음량은 작아졌지만 음색을 보다 청명하게 만들었고, 작은아들 지롤라모는 음량의 증폭에 주력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능가하는 인물이 나타났다. 지롤라모의 아들로 3대 아마티인 니콜로 아마티(1596~1684)다. 그는 아마티 가문의 바이올린 제작법을 계승하는 한편 독주악기로 작곡되는 현악곡의 폭넓은 해석을 위해 한층 깊고 심오한 소리를 원했다. 결국 좀 더 두껍고 앞판이 뭉뚝한 ‘그란데 아마티(위대한 아마티)’를 세상에 내놓으며 바이올린을 예술적인 명기(名器) 단계로 끌어올렸다. 그가 없었더라면 바이올린 제작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고악기의 아버지’ 니콜로 아마티

    당시의 제작기법은 비밀리에 전수되었기 때문에 공방에서는 아무나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식들에게만 은밀하게 전수했다. 하지만 니콜로 아마티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은 자신의 아들 지롤라모 아마티(1649~1740)뿐 아니라 안드레아 과르니에리(1626~1698),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1644~1737)라는 걸출한 제자들을 키웠다. 그래서 ‘니콜로 아마티가 남긴 최고의 작품은 바이올린이 아니라 안드레아 과르니에리와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라는 말이 나왔다. 4대 지롤라모에서 번성했던 아마티 가문의 현악기 제작은 막을 내리지만, 과르니에리와 스트라디바리우스(스트라디바리는 자신이 만든 악기에 그의 라틴어 이름인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이름을 붙였다)로 부활할 수 있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인으로 기록된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는 그의 93년 생애 동안 1100대의 악기를 제작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그가 만든 악기 중에는 바이올린이 약 600대, 비올라가 12대, 첼로가 50대, 기타와 하프 각 3대, 비올라 다모레가 1대 남아 있다. 이들은 제작 시기, 사용자, 보관 상태, 울림과 음향에 따라 각각 차이는 있지만 세계 악기시장에서 최고 대우를 받고 있다. 그가 만든 초창기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스승 아마티의 모형과 기술을 답습했지만, 1685년부터는 독자적인 방식을 추구했다. 악기 길이를 길게 하고 바이올린 몸통에 있는 f자 울림구멍의 경사와 크기를 조정했다. 인간의 음성과 흡사한 주파수와 음향을 위한 공명 공간을 재현하기 위해 악기 각 부분 기능에 적합한 나무를 선별했고, 자신만의 악기 칠 기법을 완성했다. 스트라디바리우스 특유의 광택 있고 중후한 외형과 내적 음향의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1697~1725년 사이 제작된 악기를 그의 전성기 악기로 평가한다. 1715년에 제작된 악기는 최고로 평가받는다.

    그는 두 번 결혼해 7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악기 제작기법은 대를 이어 전수되지 못했다. 1대 스트라디바리가 사망하고 공방을 물려받은 지 5년이 지났을 무렵 아들 프란체스코(1671~1743)와 오모보노(1679~1742)가 갑자기 세상을 떴다. 가족 간에 이루어지던 스트라디바리우스 공방의 도제식 전수 방식은 불행하게도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고, 찬란하게 빛나던 영광스러운 공방 제작소는 남은 악기들의 판매소로 전락하고 만다.

    주세페 과르니에리

    아마티 공방에서 니콜로 아마티의 수제자로 있다가 독립한 안드레아 과르니에리(1626~1698)는 스트라디바리보다 먼저 자신의 공방을 만들고 현악기를 제작했다. 과르니에리는 아마티 공방 악기처럼 크기는 아담하나 더 깊은 곡선을 사용해 우아한 멋을 냈다. 그의 7명의 자녀 중 두 아들이 공방을 지켰고, 작은아들 주세페(2대)와 그의 아들 3대 주세페 과르니에리(1698~1644)가 태어나는 것을 보고 눈을 감는다. 3대 주세페 과르니에리는 아버지와 이름이 같다. 하지만 그가 본 이 3대 과르니에리는 가문의 최고봉을 이룬 장인으로 성장한다. 3대 과르니에리가 제작한 악기에는 자신이 만든 표시로 ‘I.H.S’(Iesus Hominum Salvator·인류의 구원자 예수란 뜻)를 새겼다. 이로 인해 그에게는 ‘과르니에리 델 제수’라는 별칭이 생겼다. 그의 바이올린은 130여 대로 스트라디바리우스보다 적어 스트라디바리우스와 비슷하거나 더 비싸게 팔리는 유일한 악기로 남았다.

    정경화 씨 등 많은 연주자는 젊은 시절에는 정교하고 섬세하게 제작된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사용하다가 거칠게 제작되어 나무의 결이 보이는 과르니에리로 바꾸는 경우가 많다.

    같은 아마티 공방 출신이지만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과르니에리 델 제수는 전혀 다른 독특한 빛깔의 소리를 가지고 있다. 당연히 둘 다 심오하고 깊은 울림을 가지고 있지만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우아하게 귀족적으로 완성된 화려한 울림이고, 과르니에리는 다소 투박하고 거칠지만 깊은 희로애락의 울림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스트라디바리우스는 그 소리가 음악에 맞추어가고, 과르니에리는 연주자가 원하는 음악을 가지고 직접 소리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거장들은 마지막 연주를 할 때면 과르니에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따지고 보면 바이올린이 세상에 나왔을 때 반응은 냉담했다. 지나치게 경직된 음을 가진 매우 빈약한 소리여서 춤곡 반주 혹은 여러 대의 현악기와 어울려야 연주할 수 있다는 편견이 있었다. 그러나 크레모나의 바이올린 장인들과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작곡가들의 노력으로 이탈리아 음악계는 바이올린 독주를 인정했고, 바이올린 연주자들의 공연도 항상 만석이 됐다. 하지만 교회 음악 중심의 이탈리아와 독일 공연계는 오페라가 아니면 지극히 협소하고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바이올린 수요는 그리 많지 않았다. 따라서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과르니에리도 생전에 자신들이 만든 악기를 모두 판매하지는 못했다.

    당시 최고의 공연 도시였던 프랑스 파리에서는 음향이 상대적으로 작은 바이올린을 경시했다. 물론 독주 악기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곡자이자 연주가였던 이탈리아 출신의 조반니 바티스타 비오티(1754~1824)가 등장하면서 파리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 열광하게 된다. 비오티가 연주한 악기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당시 프랑스에서 연주되던 악기보다 화려하고 영롱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신동’ 볼프강 모차르트의 누나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1751~1829)의 일생을 다룬 영화 ‘나넬 모차르트’(Nannerl, Mozart′s Sister·2010)를 보면 음악교육자인 아버지 레오폴트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싶어 하는 어린 딸에게 ‘바이올린은 남자들만이 하는 악기’라고 꾸짖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음악가들은 바이올린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바이올린에 대한 ‘인식의 혁명’을 일으킨 비오티가 1782년 파리에서 첫 콘서트를 열기 전이었다.

    지금은 모두 바이올린을 어깨에 걸치고 목으로 괴어 연주를 하지만, 예전에는 우리나라 해금처럼 허벅지 위에 얹어 연주할 수 있었다. 악기를 목에 괴어 격정적으로 연주하던 비오티에게는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제격이었다. 비오티의 연주로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재발견한 파리의 악기상들은 이탈리아에 숨어 있던 스트라디바리우스에 눈을 돌렸다. 고악기를 얘기하면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를 빼놓을 수 없다. 파가니니는 스트라디바리우스 11대(바이올린 7대, 비올라 2대, 첼로 2대), 아마티 바이올린 2대, 과르니에리 바이올린 4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서 그가 가장 아낀 바이올린은 1742년에 제작된 과르니에리 델 제수였다. 호색한에 노름을 즐겼던 파가니니는 자신의 바이올린을 노름 판돈으로 걸었다가 잃기도 했다.

    비쩍 마른 몸, 어깨를 뒤덮는 찰랑찰랑한 단발머리, 날카로운 눈매, 매부리코 등 그의 인상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공연 도중에 동물소리를 재현하고, 빠른 테크닉으로 1초에 18개의 음을 구사한 그는 현대적인 연주자였고 낭만적인 작곡자였다. 다만 그의 작품은 거의 즉흥적이어서 악보로 기록해놓지 않았다. 남아 있는 악보와 당시 평론가들의 문헌으로 추측할 뿐이다. 그의 독특하고 괴팍한 성격 탓에 제자 양성도 하지 않아서 그의 연주법은 전승되지 않았다.

    “위대한 바이올린은 살아 있다”

    파가니니의 현란하고 신기에 가까운 연주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기 때문’이라는 소문을 낳을 정도였다. 그의 악기에는 악마가 살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사후에 그의 유해와 악기가 고향 제노바로 돌아오지 못한 것도 제노바의 흉흉한 민심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의 바이올린이 제노바로 들어왔지만 곧바로 시청 보관실로 보내져 100여 년간 처박혀 있었다. 1937년 파가니니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알게 된 제노바 시민은 잊어버렸던 보물을 확인하러 시청 지하 보관실로 갔다. 그러나 그의 바이올린은 이미 음색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명기는 명기였다. 악기 전문가들이 파가니니의 바이올린을 수리하고 재조립하자 한 세기 전 유럽을 매료시켰던 음색을 되찾았다. 제노바 시 당국은 1954년 신설된 파가니니 콩쿠르 우승자에게 전설적인 이 바이올린을 연주할 기회를 주었다.

    스트라디바리우스 음색의 비밀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학자들은 현악기가 수세기에 걸친 음과 진동, 겹겹이 쌓인 소리의 나이테를 전부 기억한다고 말한다. 연주자들에게 자신의 악기는 가족이다. 자신의 연주 스타일과 맞는 음색의 악기를 발견했을 때에는 첫사랑에 빠진 느낌이라고 한다. 20세기 최고 바이올리니스트인 예후디 메뉴인(1916~1999)은 “위대한 바이올린은 살아 있다. 바이올린의 모양은 제작자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나무는 소유자들의 역사나 영혼을 간직하고 있다. 나는 연주할 때마다 내 자신이 자유로운 영혼 또는 속박당하는 영혼임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물론 고악기에도 집값처럼 거품이 끼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고악기는 또 하나의 예술품으로 단순하게 지금 그 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동안 그 소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청중의 감동을 배가시킨다. 우리는 정경화 씨가 연주하는 ‘사랑의 인사’를 2012년에 들었지만, 시간을 거슬러 1912년에 누군가는 그 악기로 다른 연주자의 음악을 감상했을 것이고, 이는 2112년에도 이어질 것이다. 바이올린은 우리 모두에게 인생의 가치를 높이는 성찰의 감동을 깊이 안겨주며 예술로서 연주하는 이와 듣는 이들의 200년을 연결할 수 있다. 명기의 가치가 높아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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