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 대통령 외교 참사로 시작된 ‘아첨 외교’
카타르 4억 달러 상당 여객기 트럼프에 헌납
나토 사무총장은 트럼프에게 ‘아빠’라 부르기까지
외교 성과 위해선 트럼프 달랠 수밖에 없는 상황
트럼프 기이한 언행, 고도로 계산된 충격요법일지도

1월 15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미 워싱턴 백악관에서 베네수엘라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가 선물한 노벨 평화상 메달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백악관 X 캡처
전 세계의 국제정치를 아첨 외교 경연장으로 바꾼 계기는 2025년 2월 28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방미 정상회담이다. 유튜브로 생중계되는 상황에서 JD 밴스 미국 부통령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정장이 아니라며 복장을 트집 잡고, “왜 트럼프 대통령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지 않느냐”고 비난하는 모습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우크라이나는 몇 주 만에 전쟁에서 졌을 것”이라며 “우리(미국)가 없으면 당신에게는 전쟁을 끝낼 아무 카드도 없다”며 면박을 줬다. 결국 이날 양국은 어떤 합의도 이루지 못했고, 회담 자체가 ‘외교 참사’로 남게 됐다.
젤렌스키 참사가 가져온 아첨 외교의 글로벌화

2025년 2월 28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미국·우크라이나 회담이 파국을 맞자 동석했던 옥사나 마르카로바 주미국 우크라이나 대사(사진 오른쪽)가 이마에 손을 대고 괴로워하고 있다. X 캡처
트럼프 대통령은 2025년 5월 11일(이하 현지 시간), 4억 달러(약 5600억 원) 상당의 보잉 747-8 여객기를 중동 산유국 카타르 왕실의 선물로 받겠다고 밝혔다. 공화당에서도 사실상 뇌물 성격의 그런 선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5월 13일 ‘월스트리트 저널(WSJ)’에 따르면 연방 상원의 공화당 1인자인 존 튠(사우스다코타) 원내대표는 “트럼프 대통령이 전용기 선물을 수락할 경우 심각한 문제 제기가 이어질 것”이라면서 “엄격한 검토가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백악관이 외국 왕실이 준 항공기를 사용하면 보안 및 안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지적도 잇따랐지만 트럼프는 요지부동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거절하기엔 너무 매력적인 선물”이라는 이유를 달며 전용기 선물을 받았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신세계를 보여준다는 비판도 나왔지만, 누구도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카타르 왕실에도 사정은 있었다. 카타르는 천연가스 수출이 부의 원천인데 공교롭게도 세계 최대 규모인 파르스 가스전을 이란과 공유한다. 이 가스전은 페르시아만(아라비아만) 해저에 위치해 이란이든 카타르든 해상이나 인공섬 등에서 파이프만 꽂으면 채취할 수 있다. 이란과의 관계가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카타르 인구의 90% 가까이가 인도·파키스탄·필리핀·미얀마 등에서 온 외국인노동자다. 국가안보가 국가와 국민, 그리고 왕실의 생명줄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든든한 뒷배인 미국이 필요한 상황이다. 카타르는 이미 지역 최대 규모의 공군기지인 우데이다 기지를 지어놓고 미군에 사용권을 주고 있다. 미군 주둔을 유치한 셈이다. 그 때문에 카타르 왕실은 트럼프의 환심을 사는 것을 핵심 외교 사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를 쓰든, 얼마나 낯 뜨겁든 상관없이 트럼프 대통령의 기분을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생존을 위한 처세술 앞에 염치는 사라졌다.
정치와 사회적 부조리와 일상생활 속의 모순적 상황을 해학적으로 비판하는 아랍의 풍자적인 농담을 ‘눅타’라고 하는데, 이 중에는 뇌물과 관련한 것이 많다. 그중에서 “나는 알라께 뇌물로 손을 더럽히지 않기로 약속했어. 그러니 내 호주머니에 직접 넣어줘”라는 농담이 있다. 뇌물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과 도덕과 돈을 바라보는 인간의 이중 심리를 비꼰 눅타다. 이런 눅타가 생활이 된 아랍 세계에서 왕실의 존속을 위해 뇌물을 활용한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국가의 존망과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미국의 지원이 절실한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아첨 외교 행렬에서 빠지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2025년 4월 22일 자국민에게만 주던 이스라엘 최고의 민간 훈장인 ‘이스라엘 상(Israel Prize)’을 최초로 외국인인 트럼프 대통령에게 수여했다.
중동이나 남미만 그런 게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이자 이성적인 국가의 대명사인 네덜란드에서 14년간 총리를 지낸 마르크 뤼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뤼터 사무총장이 트럼프 대통령을 ‘아빠(Daddy)’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뤼터 사무총장은 2025년 6월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하기 전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이란을 ‘학교 운동장에서 싸우는 아이들’에 비유하자 “아빠(daddy)는 때로는 강한 언어를 써야 할 때도 있다”고 맞장구치며 비난에 직면했다.
선물은 받아도 결정은 이성적으로
유럽의 존경받는 정치인인 뤼터 사무총장이 이렇게 구설에 오른 것은 17세기 초 명나라의 환관 위충현을 떠올리게 한다. 위충현은 권세를 얻자 ‘만세’로 불리는 황제에 버금간다는 의미로 자신을 ‘구천세’로 자처했다. 벼슬아치를 포함한 아부꾼들은 공개석상에서 그를 구천세라 부르며 아첨했다. 기고만장한 위충현은 자신을 요임금과 순임금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지금의 트럼프 대통령이 위충현이라면 뤼터 사무총장은 그에게 아첨하는 사람쯤 되는 것이다.뤼터 사무총장은 나토를 존속시키고 집단 안보 체제를 유지시키는 것이 유럽 안보를 유지하는 핵심 중의 핵심으로 여겼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트럼프 대통령을 달래야 했다. 그래야만 ‘동맹은 상호 의존하는 결사체이니 거래적 시각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설득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토 사무총장이 나토 생존을 위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아첨해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있는 셈이다.
아첨과 선물로 트럼프 대통령의 환심을 사는 것은 ‘외교적 방책’이다. 관세 등 미국의 궤멸적 압박을 피하는 것은 동맹국 지도자의 정치생명과도 직결된다. 각국 지도자들은 미국과의 외교에서 국익을 지킨다기보다 피해를 덜 보는 것이 당면 목표가 됐다. 트럼프 시대 외교적 승리의 개념이 이처럼 변하면서 ‘아첨은 외교의 형식’이라는 사고가 전 세계에 확산하고 있는 셈이다.
베네수엘라의 야권 지도자이자 202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는 1월 15일 비공개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노벨상 메달을 선물했다. 미국이 1월 3일 베네수엘라를 폭격하고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부부를 미국으로 데려간 지 거의 보름 만에 노벨상 수상자가 트럼프의 환심을 사기 위해 메달을 갖다 바친 셈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여러 차례 노벨평화상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으며, 2025년 수상자로 마차도가 결정되자 불쾌감까지 나타냈다. 그토록 갈망하던 노벨상을 마차도에게 받았음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마차도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베네수엘라의 혼란을 막기 위해 필요하다는 이유로 마두로의 부통령인 델시 로드리게스를 임시 수반으로 지지했다. 트럼프가 비록 아첨과 선물을 즐기지만, 정책 결정은 합리적으로 한다는 증거다.
즉흥적 강압 외교? 아니면 고도로 계산된 충격요법?
문제는 세계 지도자들이 트럼프 대통령을 치켜세우면서 망신을 피하거나, 성과물을 하나씩 받자 글로벌 아첨의 조공 외교가 이어져 트럼프 대통령이 더욱 기고만장한다는 사실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벌이는 일련의 행동을 보면 자신이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라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통과 역사로 가득한 백악관의 건물을 일부 헐고 다시 짓는 것은 물론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기리는 케네디 센터의 명칭을 ‘트럼프와 케네디 센터’로 바꾸면서 대대적인 개수 공사에 들어갔다. 이러다 미국 사우스다코타주 러시모어산에 있는 미국 역대 위대한 대통령 조각에 트럼프 대통령의 얼굴을 추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이러한 아첨 외교의 유행은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과장된 언행이 일차 원인이다. 터무니없는 수준의 관세 부과나 외교적 프로토콜을 무시한 과도한 비난 등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이러한 언행은 즉흥적이거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서 나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의도된 전략이나 수단일 수 있다. 국제정치학에서 말하는 ‘미치광이 전략(madman strategy)’이 그것이다. 상대에게 자신을 ‘비합리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미치광이’로 믿게 함으로써 두려움을 느껴 양보하도록 유도하는 수법이다.
냉전 시절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이 북베트남을 종전 협상에 끌어내려고 소련을 압박할 때 이를 활용한 사례가 있다. 1969년 10월 군에 핵 전면전 준비를 지시하고, 사흘 연속 수소폭탄 적재 전략폭격기를 소련 국경 인근에 보냈다. 그러자 소련은 닉슨 전 대통령을 비합리적이고, 핵전쟁도 마다하지 않을 미치광이로 믿게 됐다. 소련은 공포에 질린 나머지 북베트남을 압박해 협상에 임하게 했다. 일종의 기만 공작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무역이나 군사 문제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SNS인 트루스 소셜이나 백악관 성명에서 상대가 예측하기 어려운 발언이나 발상을 기습적으로 내놓는 일이 종종 있다. 이는 상대의 혼란과 사기 저하를 유도해 예상외의 양보를 받아내려는 미치광이 전략의 하나로 평가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즉흥적인 강압 외교의 시대를 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정교한 이념과 계획 아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돼 80년을 이어온 국제규범과 글로벌 질서를 재편하려는 충격요법을 펼치고 있는 것일까. 아첨외교의 일상화는 국제적으로는 미국 일극 체제가 강화되고 미국 국내에선 정치와 외교 분야의 트럼프 일인 체제가 굳어지면서 생긴 현상으로 평가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존속하는 동안 이런 추세가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임기를 다해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떠나도 ‘트럼피즘’은 한동안 계속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올해 11월 중간선거에서 패배해 의회에 대한 지배력을 잃을 경우 견제 장치가 작동을 재개할 수도 있다. 예산이나 법률 등으로 트럼프 대통령 독주를 통제할 수 있다. 올해 미국 중간선거를 유심히 지켜봐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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