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호

향수, 우회라는 실존의 긴 여정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입력2012-08-22 15: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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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수, 우회라는 실존의 긴 여정

    ‘향수’<br>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민음사, 200쪽, 1만3000원

    2012년8월 1일 아침, 체코 프라하에서 브루노로 향한 것은 순전히 밀란 쿤데라 때문이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그의 장편소설 ‘향수’의 작가 이력은 딱 두 문장이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1975년 프랑스에 정착하였다.’ 쿤데라에 따르면 한 인간의 생(生)이란 단 세 문장(실질적으로 한 문장)이면 된다.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디어디에서 얼마간 살다가, 어디에서 죽었다.’ 한 문장이든 세 문장이든, 한 문장의 단어와 행간(주름) 사이를 펼치면, 짧게는 단편소설 또는 책 한 권, 길게는 열 몇 권짜리 대하 장편소설이 된다. 작가의 이력이란 작가가 생산한 작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한몸이어서 작가의 이력이 거느린 정황을 파악하고 읽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공감의 폭이 달라진다. ‘향수’의 첫 장이 좋은 예다.

    “아직도 여기에서 뭐 하고 있는 거니!” 그녀의 목소리는 사납지 않았지만 부드럽지도 않았다. 실비는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면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 거니?” 이레나가 대답했다. “네 나라에!” … “나는 이십 년 전부터 여기에 살고 있어. 내 삶은 여기에 있다고.” “너희 나라에서는 혁명이 일어나고 있어.” … “너의 위대한 귀환이 될 거야.”

    -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민음사, ‘향수’ 중에서

    여기는 프랑스 파리이고, 실비가 말하는 ‘네 나라’, 곧 이레나의 나라는 체코다. 이레나는 체코에서 파리로 망명해 20년 째 살고 있다. ‘이레나가 왜 망명했는가’에 대한 질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데, 이 질문과 동시에 질문을 풀어가는 방식, 곧 ‘귀환’의 여정이 망명 작가 쿤데라가 이레나를 앞세워 ‘향수’를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자 소설의 요체다.





    강제 점령기의 처음 몇 달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나라를 떠난다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으며 그들은 두려움 없이 친구들에게 작별을 할 수 있었다. … 떠나기 전날 아무 예고도 없이 여자 친구의 문을 두드렸다. … 격려의 문장이나 몸짓, 작별의 말을 기다렸으나 헛수고였다. … 떠나던 날 엄마는 그녀를 안아주지 않았다. … “우리는 감정을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잖아!” … 작별을 놓친 사람은 재회에서 별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다. - 위의 책 중에서

    이레나는 실비가 일깨워준 ‘위대한 귀향’을 위해, 친구들과의 저녁 식사에 보르도산 고급 포도주를 준비한다. 그러나 친구들은 한결같이 그들이 마셔온 체코 맥주만을 고집하고 이레나는 당혹감에 빠진다. 게다가 이레나는 갑자기 닥친 이상 고온 날씨로 인해 파리에서 입고 온 가을 옷을 모두 벗어야 했고, 과거에 머물러 있는 이곳의 칙칙한 옷을 입고 있다. 친구들은 이레나가 파리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한 마디도 묻지 않고, 그들이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되풀이해서 말할 뿐이다. 애써 준비한 포도주를 거두고 이레나는 망칠 뻔한 친구들과의 만남을 가까스로 추스르고 프라하 산책을 나간다.

    그녀가 애착을 느끼는 것은 시내 중심의 화려한 프라하가 아니라 바로 이 프라하이다. 지난 세기말경에 태어난 이 프라하, 체코의 소시민들의 프라하 … 황혼이 질 때면 근처의 숲들이 은밀하게 향기를 내뿜는 프라하. 몽상에 잠겨 그녀는 걷는다. 몇 초 동안 그녀는 파리를 언뜻 본다. 그곳은 처음으로 그녀에게 냉혹하게 느껴진다. … 그녀는 여기보다 파리에서 더 행복하다고 느꼈지만 …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이 도시를 사랑하며 여기를 떠난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가를 갑자기 깨닫는다. - 위의 책 중에서

    노작가의 고향, 모라비아

    유럽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프라하의 블타바 강(몰다우 강) 옆에 여장을 풀자마자 이른 아침 프라하를 그대로 두고 내가 브루노로 향한 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쿤데라의 작가 이력 첫 번째 문장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는 문장 속의 국가는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쿤데라가 태어날 무렵부터 프랑스 파리로 망명을 떠날 때까지의 국가체제였고, 1993년 이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된 상태. 체코 국토의 대부분은 과거의 보헤미아 지방이며, 프라하가 그 중심 도시다. 브루노는 모라비아 지방의 중심 도시. 쿤데라는 체코슬로바키아 시절의 모라비아 지방 브루노에서 태어나 그곳 야나체크 음대에서 작곡을 공부한 뒤 보헤미아 수도 프라하에서 영화감독 수업을 받았다. 쿤데라가 망명 이후 ‘향수’에 이르기까지 줄곧 체코를 보헤미아라고 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쿤데라는 ‘프라하의 봄’으로 통칭되는 1968년 개혁의 물결 중심에 섰고,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암흑기에 공직에서 해직되고 작품이 몰수되는 지경에 처하자 공산 체제의 조국을 떠나 1975년 서방 세계의 중심지 파리로 망명했다.

    그리스어로 귀환은 ‘노스토스(nostos)’이다. 그리스어로 ‘알고스(algos)’는 괴로움을 뜻한다. 노스토스와 알고스의 합성어인 ‘노스탈지’ 즉 향수란, 돌아가고자 하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다. - 위의 책 중에서

    ‘향수’는 망명 작가 쿤데라가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타진하고 확인해온 정점에 위치하며, 죽기 전에 반드시 써야 하는 통과제의 같은 작품. 그는 1989년 동서장벽이 무너진 지 10년 후, 그의 나이 70세에 처음이자 마지막 귀향담인 ‘향수’를 써서 21세기 벽두 세상에 발표했다. 서사는 두 줄기 이레나와 조제프의 이야기. 처음엔 각자의 에피소드(支流)로 출발해서, 중간 중간 서로 섞이고, 후반부에 크게 합일점(카타르시스·大河)을 이룬 뒤 다시 각자의 흐름(길)을 여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마치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처럼). 두 사람의 공유지점은 20여 년 전 공산 정권하의 고등학생 시절과 자유체제의 현재. 여자에 반했던 남자는 여자의 존재를 깡그리 잊은 상태이고, 한때 스쳤던 남자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던 여자는 우연히 귀향길에 만난 남자를 한눈에 알아본다. 쿤데라의 여느 소설처럼 여성과 남성의 사랑관에 대한 아이러니의 묘미와 함께 한 편의 악곡 형식을 느낄 수 있으며, 작가의 방대하고도 깊이 있는 지식을 경험할 수 있다.

    청춘의 기억

    서방 세계로 망명한 그를 일약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작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비롯해 ‘농담’‘불멸’‘느림에 대하여’‘웃음과 망각의 책’ 등에서 음악·언어학·인류학·철학·문학적 담론들을 소설에 자유자재로 사용해온 작가인 쿤데라는 ‘향수’에서 인류 최초의 귀향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모험가인 율리시스는 가장 위대한 향수병자이기도 했다.”

    쿤데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1980년대 말 한국 시장에 소개돼 독서계를 강타한 베스트셀러 작가. 한번 읽으면 쉽게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감염력이 강한 이들의 문장은 집단적 광장의 구호로 격동의 시절을 통과하면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있던 1980년대 말 한국 문단에 거침없이 침투했고, 속삭이듯 감미롭고, 냉소하듯 차가우며, 신랄한 듯 현란한 문장을 탱크부대처럼 앞세워 단시간에 엄청난 세력을 확장했다. 프라하 중앙역에서 열차를 타고 브루노로 향하는 3시간 동안 나는 청춘시절부터 쫓아온 이들, 동시대인의 문학적 여정을 반추했고, 쿤데라가 ‘향수’의 또 다른 주인공 조제프를 통해 끊임없이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색의 여정에 동참했다.

    망명자가 이십 년간을 외국에서 살다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아직도 백년을 더 살아야 한다면 그는 위대한 귀향의 감동을 거의 느끼지 못할 것이며, 이는 그에게 귀향이 아니라 실존의 긴 여정 위의 수많은 우회들 가운데 하나일 따름일 것이다. - 위의 책 중에서



    브루노 역에 내려 플랫폼을 빠져나가자 거미줄처럼 트램 레일이 뻗어 있었고, 노숙자들이 벤치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프라하에 비해 관광객이 눈에 띄지 않았고, 그만큼 도로 표지판의 글자들은 내가 해독할 수 없는 기호로 와글거렸다. 정류장에서 3시간짜리 자유 승차 티켓을 사서 무조건 트램에 올라탔다. 세 정거장쯤 지나자 격조 있는 건축물로 둘러싸인 넓은 광장이 나왔다. 내리고 보니, 중심지였다. 광장을 빙 둘러 브루노 대학 건물들이 퍼져 있었다. 카프카와 릴케, 스메타나와 드보르작이 프라하 출신이라면, 20세기 현대음악의 거장 야나체크와 쿤데라는 이곳 모라비아 출신. 내가 모라비아에 온 것은 현란한 문장으로 내 청춘 시절을 감염시킨 쿤데라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현장에 서보기 위해서였다. 왕복 6시간을 들여 얻고자 한 것은 파리에서 ‘향수’를 써야 했던 작가 쿤데라라는 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 곧 작가라는 족속의 삶과 운명의 현재적 표정이었다.

    프라하행 열차는 한 시간 후, 나는 브루노 중심의 자유광장가 파라솔 아래 앉아 브루노 전통맥주인 스타로브루노를 홀짝이며 ‘향수’를 쓰기까지 노년의 쿤데라가 사로잡혀 있던 조국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저녁 6시에 가까웠으나, 여름 해는 서쪽 하늘에 아직 쩡쩡했다.



    체코인들이 조국을 사랑했던 것은 … 작고 끊임없이 위험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애국심은 조국에 대한 커다란 연민이다. 덴마크인들도 이와 유사하다. 조제프가 이 작은 나라를 망명지로 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 과거는 오늘날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에 살고 있지 않았다. … 인간은 현재의 순간만을 확신할 수 있다. - 위의 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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