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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주사파를 말하다

“종북주사파보다 친북좌파가 더 위험하다”

주사파 지하조직 자민통 리더 구해우

  • 구해우│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종북주사파보다 친북좌파가 더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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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대학가엔 주목할 만한 두 개의 팸플릿(운동의 사상 노선 정책 등을 밝히는 문건)이 뿌려졌다. 하나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 관계자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예속과 함성’이다. 이 팸플릿은 1985년 가을학기부터 학생운동권에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예속과 함성에는 대단히 선동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국 현대사를 반미투쟁의 역사로 기술했는데, 이는 북한의 역사 서술과 똑같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이 작성한 ‘강철서신’이다. 강철서신은 주체사상의 품성론을 강조했는데, 이 팸플릿은 종북세력, 친북세력을 양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북한 노동당과 한민전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지도받는 자생적 주사파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 역시 한민전의 ‘구국의 소리’ 방송을 들으면서 투쟁 지침을 만들었다. 또한 평양방송, 중앙방송의 ‘김일성종합대 방송통신 강좌’를 녹취하면서 주체사상을 공부했다.

주사파가 ‘지도한’ 전대협

주사파 3대 그룹은 김영환이 이끈 구국학생연맹(구학련), 조혁 씨와 안희정 충남지사가 이끈 반미청년회, 필자가 리더이던 자민통이다. 구학련→반제청년동맹→민혁당 흐름 중 하나가 이석기 의원으로 상징되는 통합진보당 구 당권파로 이어졌다.

1980년대 주사파 조직은 하나같이 ‘방송팀’을 운영했다. 방송팀은 ‘구국의 소리’‘평양방송’등을 녹취해 투쟁 지침과 교육 자료를 만들었다. 보통은 3명이 한 팀으로 활동했다. 필자의 후배 한 명은 3명이 할 일을 혼자서 해냈다. 주체사상에 대한 그 후배의 믿음은 거의 종교적 수준이었다. 그러한 믿음을 헌신성, 충실성으로 발현해낸 것이다. 후배는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한 후 고민의 과정을 거쳐 대순진리회라는 민족 종교에 입문해 간부가 됐다. 또 다른 후배는 종교적 성향을 가진 단월드(옛 단학선원)에 들어가 핵심 간부가 됐다. 비슷한 사례가 주사파 출신 중 적지 않게 발견된다.

자민통은 1989년부터 1992년 상반기까지 전대협 등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특히 1990년 고려대 총학생회장이던 윤진호,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자민통에 의해 전대협 의장이 된 송갑석 등은 자민통의 영향 하에 활동하던 주요 인물이다.



자민통 이전에 학생운동의 헤게모니를 쥔 것은 주사파 지하조직 반미청년회다. 책임자는 조혁 씨다. 언론은 조 씨를 반미청년회 총책이라고 보도하곤 하는데, 주사파 조직은 총책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중심은 북한 노동당이기 때문이다. 조 씨는 1998년 북한민주화운동네트워크에 참여했다. 반미청년회의 2인자 격이던 인물이 안희정 충남도지사다. 1987년 결성된 전대협은 사실상 반미청년회가 조직한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자생적 주사파 조직은 1986년 안기부에 의해 적발된 김영환의 구학련이다. 1980년대 후반 대학별로 주사파 조직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강철서신이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구학련은 각 대학의 주사파 조직을 사상적으로 지도했다. 구학련은 반제청년동맹으로 이어진다. 통합진보당 구 당권파의 리더 격인 이석기가 반제청년동맹 중앙위원을 지냈다. 구학련→반제청년동맹→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올해 4·11 총선 전후에 불거진 종북 논란과 일부 관련이 있다.

반미청년회는 고려대 운동권 중심으로 꾸려진 주사파 조직이다. 1987년, 1988년 ‘전투적학생회론’을 앞세워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주사파가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87년 6·29 선언 이후에도 반미청년회가 지나치게 전투적으로 나가면서 현장의 주사파 활동가들이 술렁였으며 1989년부터 반미청년회의 영향력은 축소된다.

구학련, 반미청년회, 자민통 외에 새벽그룹이라고 불리는 주사파도 있었다. 자민통이 1989~1992년 학생운동권의 헤게모니를 쥔 것은 새벽그룹과 연계하면서다. YTN 사장을 지내고 현재는 내일신문 발행인인 장명국 씨가 새벽그룹의 브레인이었다. 새벽그룹은 NL이면서도 노동운동을 강조했다. 자민통과 새벽그룹은 교조적 주사파 반대, 노학연대 강화 등을 내세웠다. 새벽그룹은 ‘장명국 주사’라고 불렸다.

“종북주사파보다 친북좌파가 더 위험하다”

북한이 2009년 7월 15일 발행한 우표. 사진 왼쪽에 주체사상탑이 보인다

주사파는 크게 두 가지 상황 탓에 쇠락했다. 첫째는 소련, 동유럽의 붕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른 PD나 주체사상을 신봉한 NL은 공히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는 충격이었다. 특히 PD가 입은 타격이 컸다. 이즈음부터 PD 출신 인사의 상당수가 운동 방향을 바꿨다. 북한을 대안으로 여긴 NL은 상대적으로 입은 타격이 덜하긴 했지만 회의와 고민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PD와 똑같았다.

둘째는 김영삼 정부의 등장이다. 1980년대 대학생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군사정권의 비정통성 탓이 컸다. 국민의 선거로 선출된 김영삼 정부는 하나회를 척결하는 등 군사독재 잔재를 제거했다. 민주화 수단으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주체사상을 주장할 명분이 사라진 것이다.

1980년대의 주사파가 자생적 조직이었다면 1990년대 주사파는 북한 노동당과 직접 연결됐다는 점이 특징이다. 1992년 적발된 중부지역당이 대표적이다. 김영환 하영옥 이석기가 참여한 민혁당도 북한의 지도를 직접 받았다. 1994년 구국전위 사건, 2007년 일심회 사건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하면 된다.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북한 노동당과 연계해 강경한 노선을 고집하다보니 주사파 그룹을 따르는 이들은 극히 소수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주체사상은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 과정, 북한 사회주의 체제 수립 과정, 중소분쟁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발전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교조주의, 소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에 대한 사대주의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주체사상을 창시했다고 한다. 주체사상의 사상적 배경은 한반도가 세계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는 지정학적 조건과 연관된다. 주체사상은 외세로부터 수많은 시련과 고통을 당해온 민족사의 아픔을 간질이면서 강력한 선동성을 갖게 됐다.

1980년대 학생운동은 한국 현대사에서 공(功)이 70%, 과(過)가 30%라고 할 수 있다. 공이 70%라는 것은 한국이 민주화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을 수용한 것도 본질적으로는 군사독재를 종식하기 위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수단으로 선택한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주체사상을 수용하면서 한국 현대사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과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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