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대통령이 군 수뇌부와 함께 3월 8일 충남 계룡대 장교 합동 임관식에 참석해 경례하고 있다.
인사와 소통 이슈는 대통령의 개인적 특성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흔히 ‘인사는 만사’라면서 인사에서 대통령의 정치적, 행정적 업무 능력이 나타난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소통이 대통령의 자질 중 으뜸이라며 소통을 잘하는 대통령을 최고의 대통령쯤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인사가 만사라던 김영삼 대통령 때 외환위기 사태가 왔다. 국민 소통의 일인자라는 노무현 대통령 땐 탄핵 사태가 있었다. 이제 인사와 소통을 다른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 정도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은 다른 보수 성향 대통령과 다르게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강조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선 저성장, 양극화, 가계부채, 실업, 비정규직, 하우스푸어, 고령화 문제가 심각하다. 전망도 밝지 않다. 경제민주화와 복지는 현재의 사회여건상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하는 과제가 되고 있다. 만일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이 두 가지 이슈를 놓쳤다면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 두 이슈와 관련해선 박 대통령이 문제를 해결할 만한 자질과 정책적 수단을 갖고 있는지 우선 살펴봐야 한다.
안보 이슈의 경우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권은 각각 햇볕정책, 균형자론, 원칙 있는 대북정책을 내세웠지만 지난 15년 동안 국가안보가 튼튼해졌다고 하긴 어렵다. 오히려 북한의 핵무기,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허용하며 훨씬 불안한 상황에 처했다. 박 대통령의 ‘신뢰 프로세스’가 새로운 해법으로 실질적 효과를 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전투적 인물’ 보강해야
박근혜 정부의 초대 내각과 청와대 수석은 평균 59.3세이고 19억4000만 원의 재산을 가졌다. 출신지는 수도권과 영남이 다소 많지만 지역 비율은 역대 정부와 비슷한 편이다. 출신 학교는 경기고, 서울고, 서울대, 성균관대, 외국 대학이 많다. 직업은 관료, 학자, 법조인이 다수다.
특기할 점은 청와대 수석의 평균 나이가 61.1세로 내각(58.2세)보다 많다는 것이다. 수석은 노무현, 이명박 정부보다 연배가 많은 사람들로 채워졌다. 내각과 수석을 합한 지역 비율에서 부산·울산·경남 출신(6명)이 대구·경북 출신(3명)보다 많다. ‘대탕평 인사’라면서 호남 출신 5명을 뽑았으나 일부에서는 ‘기대에 못 미쳤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학의 경우 성균관대 출신이 7명으로, 한 명도 없던 이전 두 정부보다 두드러졌다. 박 대통령과 인연이 있는 대구·경북 출신(3명)과 서강대 출신(1명)이 눈에 띄게 적은 것은 항간의 평판을 의식한 결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첫 인사에서는 검증되고 경험 많고 학벌 좋은 사람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인위적으로 지연, 학연을 안배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 본인이 떳떳하면 세평에 개의치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말도 많았던 대통령직인수위 윤창중 대변인을 청와대 대변인으로 내정한 것이 그런 사례다.
김종훈 씨의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발탁은 박 대통령의 핵심 인사였다. 하지만 그는 정부조직 개편 논란과 집중 검증으로 인해 결국 사퇴하고 말았다. 문제는 당선인 신분일 때 인사검증을 제대로 할 수 없게 하는 구조에 있다. 보안이 중요한 인사검증 과정에서 전 정권과 차기 정권의 미묘한 관계 탓에 제대로 된 정보 수집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현행 인사검증에 대해선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박근혜 정부 첫 인사의 방점은 ‘경륜에 의한 안정 지향’에 있는 것으로 평가되나 전반적으로 ‘예스맨’들로 배치했다는 비판적 시각도 나왔다. 또한 집권 초에 과감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 만한 정무적 감각을 가진 인사가 내각과 수석에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정권 창출에 힘쓴 공신 중 다수가 1차 내각 및 수석 인사에서 빠졌다. 한때 공기업 인사에서도 전 정권에서 임명된 인사의 임기를 존중한다는 소식이 나왔다. 이는 정권의 기반을 급격히 위축시키는 일일 수 있다. 개혁주도 세력이 뒷짐을 지면서 관료 출신들의 뒤떨어진 정무 감각이 위기를 불러왔다. 이에 박 대통령은 3월 11일 첫 국무회의를 열고 주가조작, 탈세, 4대강 의혹에 대한 조사 의지를 밝혔다.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공공기관장에 임명하겠다고도 했다. 박 대통령은 관료, 법조인, 학자 출신들 외에 정치, 사회운동 경험을 가진 ‘전투적 인사’들을 보강하거나 중용할 필요가 있다.
기득권 세력과 ‘밀회’ 거부
박 대통령은 당선 직후 인수위 시절부터 불통 논란에 휩싸였다. 윤창중 대변인 임명을 둘러싼 논란과 홍보 테크닉 부족에 기인한 바가 크다. 또 ‘박근혜 캐릭터’에 대한 언론의 선입관도 작용했다.
소통 문제와 관련해선 유교적 남존여비 문화가 남아 있는 동북아에서 여성이 최초로 국가수반에 오른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박 대통령은 지난 17년간 전통적 남성 정치 지도자처럼 술자리를 갖고 돈을 뿌리며 정치를 하진 않았다. 따라서 그는 정치자금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박근혜라는 이름 석 자가 가장 큰 자산이었다. 박 대통령은 2인자를 배제한 채 방사형으로 직접 연결되는 조직 구조를 만들었다. 이는 외부에 권위적 카리스마로 비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