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호

“나는 이용당했을 뿐 …” 누가 오스왈드를 쏘았나

케네디 암살과 음모론

  • 이창무│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형사사법학 jbalanced@gmail.com

    입력2013-03-20 11: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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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살범, 수사 도중 저격당해 사망
    • 20명 넘는 관련자들, 의문의 죽음
    • 쫓기듯 사건 종결 시도한 FBI
    • 핵전쟁 공포 스멀스멀…“단독범행으로 하라”
    “Sic Semper Tyrannis!(폭군에게는 언제나 이렇게 하라)”

    에이브러햄 링컨 전 미국 대통령 암살범 존 윌크스 부스는 1865년 4월 1일 링컨을 암살한 뒤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미국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탄테러 사건의 주범 티모시 맥베이 역시 1995년 4월 19일 체포될 때 이 문구가 쓰인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줄리어스 시저의 양아들 브루투스가 시저를 죽이고 그렇게 외쳤다는 설도 있다. ‘폭군에게는 언제나 이렇게 하라!’는 문구는 아이러니하게 미국 버지니아 주의 표어이기도 하다. 독재를 경고하고 민주정치를 염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으나 이 문구는 암살범이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는 변명거리로 주로 사용한다.

    운명의 총소리

    1963년 11월 22일 선거자금을 모으고자 미국 텍사스 주 포트워스에서 조찬 연설을 마친 존 F. 케네디 당시 대통령은 서둘러 전용기 에어포스 원에 탑승했다. 다음 목적지인 댈러스에서 오찬 연설이 예정돼 있었다. 전용기는 오전 11시 25분 댈러스의 러브필드 공항에 도착했다. 오찬 장소는 댈러스 시내에 위치한 트레이드 마트. 공항에서 트레이드 마트까지 약 16㎞ 거리에서 카퍼레이드가 이어졌다. 케네디를 보려고 몰려든 20만 가까운 인파 탓에 카퍼레이드는 계속 지체됐다. 더욱이 케네디는 연도에 늘어선 사람들과 악수하느라 예정에도 없이 두 번이나 차에서 내렸다.

    케네디를 태운 차는 많은 사람이 대통령을 볼 수 있도록 지붕을 없앤 무개차였다. 케네디는 아내와 함께 뒷자리에 앉았고, 앞자리에는 존 코널리 텍사스 주지사 부부가 타고 있었다. 낮 12시 29분 대통령을 태운 차량이 딜리 광장을 지났다. 텍사스 주지사의 아내 넬리 코널리가 케네디에게 들뜬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댈러스가 대통령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시겠지요?” 케네디도 웃으면서 “잘 안다”고 대꾸했다. 몇 초 뒤 전용차가 텍사스 교과서 보관창고 앞을 지날 때 시계는 12시 30분을 가리켰다. 이윽고 총성이 울렸다. 세계를 뒤흔든 운명의 총소리였다. 역사를 바꾼 순간이었다.



    암살 순간을 포착한 이른바 ‘자프루더(Zapruder) 필름’에는 총성이 울리자마자 차에 타고 있던, 케네디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총소리가 난 오른쪽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담겨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면서 사냥을 즐겼던 코널리 주지사는 총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소총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조사 과정에서 진술했다. 코널리가 고개를 돌려 케네디를 쳐다보려 했으나 대통령을 볼 수는 없었다. 코널리는 등 위쪽에 총을 맞았다.

    암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총격 당시 케네디는 연도의 시민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첫 번째 총탄은 빗나갔으나 두 번째 총탄이 대통령의 등에 맞고 목을 관통한 뒤 앞에 있던 텍사스 주지사의 등에 맞았다. 이후 세 번째 총탄이 대통령의 머리를 향했다. 두개골이 부서지고 뇌가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치명적이었다. 전용차는 전속력으로 달려 수 분 내에 병원에 도착했지만 대통령은 이미 숨진 뒤였다.

    저격이 발생한 후 경찰은 용의자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총격 이후 몇 분 지나지 않아 교과서 보관창고 6층 창문에서 한 남자가 소총을 발사하는 것을 봤다는 목격자가 나타났다. 경찰은 무선망을 통해 용의자의 인상착의를 알렸고, 주변 지역을 봉쇄한 후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사건이 발생한 딜리 광장에서 약 5㎞ 떨어진 주택가에서 경찰관 티핏은 용의 인물과 인상착의가 비슷한 남자를 발견하고 불러 세웠다. 티핏이 경찰차에서 내리자 이 남자는 바로 총을 꺼내 티핏을 사살했다. 이 광경을 주변 신발가게 매니저가 목격하고 용의자가 극장으로 몰래 들어간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극장을 포위하고 극렬히 저항하는 용의자를 검거했다. 오후 1시 40분, 케네디 대통령이 총에 맞은 지 70분 뒤였다.

    카스트로 추앙한 암살범

    용의자의 이름은 리 하비 오스왈드였다. 그는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고 어머니는 재혼한 뒤 다시 이혼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무려 22번 이사를 했고 학교도 12번이나 옮겨야 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오스왈드는 해병대에 입대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진 그는 제대 후인 1959년 소련으로 망명했다. 당시 미 해병 출신이 소련으로 망명한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소련에서 결혼하고 딸도 낳았지만, 소련의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오스왈드는 1962년 아내, 딸과 함께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오스왈드는 자본주의를 증오했다. 그래서 새롭게 사회주의 혁명의 산실로 떠오른 쿠바로 가고 싶어 했다. 또한 카스트로를 맹렬히 추앙했다. 미국에는 쿠바 영사관이 없었기에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찾아가 쿠바 영사관을 방문했다. 열렬한 쿠바 혁명 지지자로 자신을 소개했지만 미국인을 불신하던 영사관 직원의 거부로 비자를 받지 못한 채 미국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그럼에도 오스왈드는 뉴올리언스에서 미국의 쿠바 사태 개입 반대를 외치면서 반미 시위 대열에 적극 참가하는 등 쿠바에 대한 동경과 애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카퍼레이드에 참석하려는 시민의 편의를 돕고자 케네디의 카퍼레이드 일정 및 경로는 도착 며칠 전부터 댈러스 언론을 통해 여러 차례 보도됐다. 케네디 도착 사흘 전인 11월 19일 댈러스 지역신문 ‘타임스헤럴드’는 카퍼레이드의 이동 경로와 각 지점 통과 시각을 자세하게 보도했다.

    소련으로 망명할 때 영웅 대접을 받기 원했으나 그러지 못했던 오스왈드에게 그가 추앙해 마지않는 카스트로의 적인 미국 정부의 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은 최고의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였다. 오스왈드는 케네디를 저격하기 수개월 전 극우 성향의 예비역 장군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적이 있다. 11월 22일 아침 오스왈드는 이탈리아제 카르카노 소총을 갈색 종이에 둘둘 말아 품에 넣은 뒤 그가 한 달 전부터 일해온 교과서 보관창고 6층으로 올라갔다.

    꼬리 물고 이어진 죽음

    그가 일하던 교과서 보관창고 바로 옆을 대통령이 탄 차가 지나갔다는 사실은 우연치고는 뭔가 수상하다. 음모론이 꿈틀거릴 여지가 있다. 더욱이 오스왈드가 댈러스 경찰본부에서 구치소로 이송되는 도중 잭 루비가 그를 사살하자 의문은 더 증폭됐다. 댈러스의 나이트클럽 주인이던 루비는 케네디 암살에 너무 상심했고 영부인인 재클린 케네디가 오스왈드의 재판과정에서 또다시 슬픔에 빠지는 것을 막으려고 오스왈드를 죽였다고 진술했지만, 오스왈드가 진실을 털어놓는 것을 막기 위해 죽였다는 음모론적 주장이 더 그럴싸하게 들린다.

    그러나 얼 워런 연방 대법원장이 위원장을 맡아 암살 사건 진상조사를 벌인 ‘워런 위원회’는 10개월에 걸친 조사를 마무리한 뒤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이라고 결론지었다. 사건 자체가 너무나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탓인지 사실 확인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여러 주장이 혼재했다. 현장에 있던 다수의 사람이 총소리를 세 번 들었다고 증언했지만 한 발이 더 발사됐다는 주장도 강력하게 제기됐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 이후 직간접적으로 암살사건과 관련된 사람 가운데 의문스럽게 죽은 이가 20명이 넘는 것도 궁금증을 더한다. 1966년 2월 루이지애나에서 사체로 발견된 알버트 가이는 암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오스왈드가 자신의 상점에 들어와 “이제 곧 큰돈이 들어온다”고 말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같은 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리 보우어 역시 딜리 광장 부근에서 두 남자와 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았다고 증언했다.

    1969년 뉴올리언스 지방검사 짐 개리슨이 “전직 CIA(중앙정보국) 요원과 마피아 등에 의한 암살 음모를 밝혀 빠른 시일 내 용의자들을 체포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용의 선상에 있던 데이비드 페리가 자택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또 다른 용의자인 마피아 보스 잔커너, 로젤리까지 차례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사건 당시 댈러스에 거주했던 소련 출신 지질학자 로렌시루츠가 1977년 하원 진상조사위원회 증인 소환 당일 자살한 것도 의문의 사건이다. 로렌시루츠는 소련에서 돌아온 오스왈드를 포섭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1961년 43세의 젊은 나이로 대통령에 취임한 케네디는 개혁 프로그램을 야심차게 밀고 나갔다. 외교정책도 강경했다. 카스트로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1961년 4월 쿠바 피그스만 침공 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1962년 핵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던 쿠바 미사일 위기를 계기로 케네디의 태도는 크게 달라졌다. 훗날 흐루시초프가 회고록에서 밝힌 것처럼 케네디는 소련 측에 “미국은 쿠바를 결코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망명 쿠바인과 극우보수 세력이 깊은 적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케네디는 임기 시작과 함께 베트남전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1963년 하반기 이후 정책 변화를 시사했다. 1963년 10월, 고문단 형태로 베트남에 있던 1000명의 미군을 그해 말까지 1단계로 베트남에서 철수하고 1965년 말까지 완전 철수한다는 계획을 마련하고 실제로 국가안전보장행동(NSAM) 263호 각서에 서명했다. 한 달 뒤인 11월 1일 하와이에서 백악관 고위층과 베트남 주재 미국대사, 국방부 고위 간부들이 참석한 합동회의에서 ‘263호 각서’ 내용을 재확인했다. 그러고는 채 한 달도 안 돼 암살됐다.

    미국의 전면 개입을 주장하는 보수 강경파에게 베트남에서 발을 빼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베트남을 빼앗기면 동남아 전체가 공산화할 수 있다는 이른바 ‘도미노’ 우려가 컸다. 그래서 강경파는 베트남과 관련한 각종 통계자료를 조작하기도 했다. 남베트남군의 숫자를 줄여 보고하고 북베트남군의 무기와 전력 등에 대해서도 조작된 수치를 보고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을 통해 커질 대로 커진 군산복합체의 거대한 기제가 베트남전과 같은 호재를 놓칠 수 없다는 위기감 또한 케네디 암살의 계기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음모론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실제로 케네디 암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64년 1월 미군 합참은 ‘전쟁수행계획’을 완성했다. 1964년 8월 미군 구축함이 베트남 통킹만에서 어뢰공격을 받는 이른바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정부가 국민을 속이고 있다!”

    결국 케네디 암살 사건의 진상을 재조사하기 위한 하원 진상조사위원회가 1976년 구성됐다. 조사위원회는 1978년 조사 결과 발표를 통해 저격 당시 총이 모두 4차례 발사됐으며 2명이 총을 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우연찮게 카퍼레이드를 호위하던 경찰관의 무전기가 꺼지지 않아 저격 당시 상황이 녹음돼 있었다. 녹음 내용이 새로운 증거로 채택됐다. 하원 조사위원회는 또 케네디가 음모에 의해 암살됐을 소지가 크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소련이나 CIA, 마피아와 같은 곳이 조직적으로 관여하진 않았다고 결론 내렸지만, 미국 내 쿠바 망명세력이나 마피아 조직에서 개별적으로 몇 명이 관여했을 소지는 있다고 여운을 남겼다.

    케네디 암살 석 달 뒤인 1964년 2월 오클라호마 주 호미니에 사는 셜리 마틴이라는 여성이 네 자녀를 자동차에 태우고 7시간 동안 차를 달려 댈러스에 도착했다. 겨드랑이에 녹음기를 몰래 감춘 채 아이들을 앞장세우고 케네디 암살의 진실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찾아 나섰다. 마틴은 케네디 암살과 관련한 정보를 갖고 있는 사람 50여 명과 인터뷰를 했다. 그중에는 케네디의 시신이 도착한 병원에서 마지막 미사를 집전한 신부, 암살범 오스왈드와 같은 아파트에서 살던 여자, 암살 현장 바로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가구 판매원도 있었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그는 케네디 죽음의 진실을 밝히라는 신의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캘리포니아 주 베벌리힐스에 사는 매기 필드도 암살의 진실을 캐는 일에 나섰다. 그는 자신의 넓은 집을 온통 케네디 대통령 암살과 관련된 자료 스크랩, 파일박스로 채웠다. 목격자와 주요 정보원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차트만 75개나 됐다.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회계사 릴리언 카스텔라노는 댈러스의 하수구 지도를 열심히 살펴봤다. 혹시 다른 암살범이 빗물 배수관에 숨어 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뉴욕의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분석요원으로 일하는 한 여성은 정부가 6개월 동안 발표한 암살 관련 내용에 대한 문제점을 하나하나 꼬집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정부가 국민을 속이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 일원인 레이먼드 마커스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이 정부의 거짓 발표를 믿고 있으며 정부의 거짓말은 결국 우리 모두를 죽일 것이다.”

    고위 관료도 음모론에 기울어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을 파헤치려 나선 사람들은 정부와 권력기관이 공모해 거짓을 발표하고 은폐하려 하지만 이런 음모를 그들 스스로 밝혀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일반 국민이 국가 안보에 관한 비밀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이들은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 서로가 가진 정보를 교환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진실을 원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면서 하루에도 몇 시간씩 전화기를 붙들고 서로를 독려하며 숨은 정보를 캐내려고 애썼다.

    음모론적 시각을 가진 것은 일부 시민만이 아니었다. 정부 최고위직 인사들도 이러한 주장에 솔깃해 귀를 기울였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 이후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린든 존슨 대통령은 훗날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순간 떠오른 생각은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언제 미사일이 날아올까?’였다. 나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 생각을 했다.” 대통령 암살에 소련이 개입됐다고 여긴 것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은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데다 핵전쟁의 공포가 극에 달하던 때인 만큼 이런 음모론적 생각은 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케네디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당시 법무장관은 결이 다른 음모론적 생각을 떠올렸다. 내부 소행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쿠바의 카스트로를 축출하려는 CIA와 미국 내 망명 쿠바인이 손잡고 케네디를 암살했으리라 생각했다. 케네디가 피그만 침공을 비롯해 카스트로 축출에 미온적이었던 데 대한 원한과 복수심에서 암살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로버트 케네디는 당시 CIA 국장 존 매콘에게 CIA가 암살 사건에 개입했는지 추궁했다. 물론 매콘 국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며 강력하게 부인했다.

    부통령이나 장관 등 정부 고위급 인사들은 케네디 행정부가 해외에서 암살공작을 꾸민 기밀사항을 잘 알기에 음모론적 추측을 했을 법도 하다. 케네디 암살과 해외 암살 사건 공작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가진 것이다. 아이젠하워 행정부, 케네디 행정부에서 CIA는 최소 8번 이상 카스트로 암살 공작을 주도한 바 있다. 카스트로를 반대하는 쿠바인을 이용하거나 마피아 청부살인 업자를 고용해 목숨을 노렸다. 케네디가 총에 맞던 바로 그 순간에도 프랑스 파리에서는 CIA 요원이 카스트로 암살에 쓰일 독침 만년필을 쿠바 반체제 인사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미국 정부 고위 관료 처지에서 케네디 암살에 쿠바인이 연루됐으리라는 심증을 갖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케네디가 암살되자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J. 에드거 후버 국장은 직속상관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에게 암살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조금 뒤 오스왈드를 붙잡았다고 보고했다. 오스왈드에 대해서는 쿠바의 카스트로를 추앙하는 공산주의 신봉자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후버 국장은 사건을 보고받은 후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으로 결론짓는 것이 국가와 FBI, 그리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다. 만약 암살 배후가 존재한다면 언론과 국민은 바로 FBI에 수사 착수를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후버가 가장 염려했던 것은 만약 수사 결과 암살 배후로 소련이 드러난다면 국민 여론이 소련에 대한 보복을 요구할 테고 이는 곧 핵전쟁을 의미한다는 점이었다. 음모론이 불거지면 결국 소련과의 관계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후버가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게 있었다. 무능한 댈러스 경찰이었다. 오스왈드를 체포한 댈러스 경찰은 언론인은 물론 일반 시민도 경찰서 건물을 마음대로 출입하게 허용했다. 과거 경찰 정보원이었고 나이트클럽 주인이었던 잭 루비 역시 오스왈드가 구치소로 이감되는 통로 앞에 서 있었다. 미국 전역에 생방송으로 TV 중계가 이뤄지는 가운데 오스왈드는 “나는 단지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외쳤다. 그때 잭 루비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와 오스왈드 바로 1m 앞에서 권총으로 그를 사살했다. 수백만 명이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어 잭 루비가 마피아와 관련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음모론은 날개를 달았다. 사건의 배후가 오스왈드의 입을 막고자 잭 루비를 시켜 살해했다는 추측이 난무했다.

    암살의 치명적 매력

    워싱턴에서도 사건 처리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자세한 진상조사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에 힘을 실었다. 존슨 대통령은 ‘음모’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는 순간 ‘핵전쟁’의 유령이 엄습할 것이라는 걱정이 앞섰다. 그는 퇴임 이후 “개인적으로 카스트로가 암살을 명령했을 소지가 크다고 봤다”면서 “오스왈드 단독범행으로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철저한 진상조사는 3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될 공산이 컸다. 수백만 명의 인명을 앗아간 제1차 세계대전도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데서 촉발됐다. 배후를 투명하게 밝히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고, 각종 음모론을 가라앉히는 일이 필요했다. 상심에 빠진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을 대신해 업무를 총괄한 카젠바흐 법무차관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존슨 대통령에게 국민으로 하여금 오스왈드 단독범행을 믿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 존슨 대통령은 공정성을 인정받을 만한 독립적인 진상위원회 구성을 추진했으며 위원장에 얼 워런 연방 대법원장을 앉히려 했다. 진보세력의 구심점인 워런 대법원장이 암살사건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야 국민이 조사 결과를 믿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워런 대법원장은 맡지 않겠다고 버텼다. 하지만 존슨 대통령은 ‘핵전쟁의 공포’를 무기로 삼아 설득했다.

    “일각에서 소련의 흐루시초프가 케네디 대통령 암살을 지시했다는 얘기가 떠돌고 있습니다. 쿠바의 카스트로가 암살을 명령했다는 얘기도 많습니다. 미국 국민과 세계는 누가 케네디 대통령을 죽였고, 왜 그랬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미국과 소련은 핵전쟁에 돌입하게 되고, 불과 한 시간 안에 3900만 명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워런 대법원장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FBI는 누가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명백한 증거도 있습니다.”

    진상조사위원회의 임무는 이미 밝혀진 결과를 국민이 믿을 수 있도록 인증만 해주면 된다는 얘기였다. 워런 대법원장은 마지못해 위원장직을 수락했다.

    진상조사위원회는 음모론 확산을 막는 것과 함께 또 다른 중요한 임무를 갖고 있었다. 미국이 벌여온 해외공작 정보와 국가 기밀이 밖으로 새나가는 것을 막아야 했다. 진상조사 과정에서 이러저러한 정보가 누출된다면 국가 안보에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FBI의 수사 및 정보수집 능력, 정보원, 대통령의 사생활, 카스트로 암살 공작 등이 드러날 수 있었다. 미국이 정의와 세계 평화의 수호자라는 믿음을 굳게 갖고 있는 국민의 기대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결과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미국 정보당국의 첩보 수집 능력은 대단했다. 스파이와 감청 등을 통해 소련은 물론 쿠바 지도부의 내막을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미 정보당국이 당시 소련과 쿠바 고위 지도층을 감청한 기록에 따르면 소련과 쿠바 고위층은 케네디 대통령 암살 소식에 미국 국민 못지않게 깜짝 놀랐다. 특히 카스트로는 혹시 미국이 자신을 암살 배후로 지목하고 쿠바 침공의 구실로 삼을까봐 무척 걱정했다고 한다.

    정치적, 이념적, 종교적 이유 등 동기야 어찌됐든 암살은 명백한 범죄다. 그럼에도 암살은 지난 수천 년 동안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다. 치명적 매력을 가진 범죄이기 때문이다. 우선 비용대비 효과가 다른 어떤 범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내는 효율적 범죄라고 할 수 있다. 대상이 주로 정책 결정권을 가진 지도자란 점에서 암살은 적지 않은 정책 변화를 가져오고 크게는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범죄란 비용보다 편익이 클 때 발생한다고 주장하는 범죄학의 합리적 선택이론이 그대로 적용되는 셈이다. 로마 공화정 말기의 카이사르 암살,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1979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 암살 등은 역사의 전환으로 이어졌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 이후 미국은 베트남전 개입을 본격화했다. 1968년 초 미국의 베트남전 군사개입이 한창일 때 베트남에 투입된 미군 병력은 55만 명이 넘었다. 5만8000명 이상이 전사했다.

    문명과 역사의 강줄기를 바꾸는 큰 변화는 법과 제도나 선거를 통한 합법적 수단보다는 오히려 암살, 테러, 폭동, 전쟁과 같은 비합법적 범죄에 의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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