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처럼 빛나는 한 줌 슬픔으로 섬을 이룰 수 없는 키 작은 어부들의 영혼이 발목 붉은 도요새 되어 뿔뿔이 허공을 떠돌고 불빛 찾아 손 흔드는 낯선 안강망 어선들 어디에도 지친 닻을 내릴 곳이 없다
눈물이 강물같이 보이던 날 성욕처럼 들끓는 물거품을 바라보며 누구는 죄를 짓고 누구는 용서하고 목쉰 파도 되어 흐느끼지만 죽어서도 산란하는 늙은 어부의 꿈 만난다 앉은뱅이 섬, 혹은
-박라연의 시 ‘무창포에서’ 전문
제목에 ‘에서’라는 조사가 붙은 것에서 보듯이, 이 시는 무창포를 얘기하기보단 무창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인물의 심상을 그리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의도적으로 언어들을 질서 없이 나열하는 탓에 구체적인 상황이며 선명한 그림들을 붙잡긴 어렵지만, 대강 무언가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는 ‘감’은 잡을 수 있다. 둘 혹은 셋, 무창포에 온 사람들이 밤늦도록 저들이 살아온 세상의 슬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 사연들은 곧 고역과 고통 끝에도 정착을 못하는 어부들의 아픔으로 대입된다. 세상에서 가졌던 죄와 용서 또한 파도처럼 밀려드는 가운데 그들의 꿈 역시 떠돌이 어부들의 그것처럼 바다의 섬 같은 정착된 삶, 안정된 삶을 누려보는 것이다.
적적함, 신산함, 호젓함…
만리포 혹은 경포대에서도 가질 수 있는 감정과 이야기를 굳이 무창포에서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짐작건대 첫째는 무창포 자체가 가지는 적적함, 신산함의 이미지 때문이며 둘째는 무창포라는 지명이 주는 어감 때문이다. 지금은 무창포 해변 또한 깔끔한 관광지로 정비돼 있지만, 이 시가 쓰인 1980년대만 하더라도 인근의 대천해수욕장에 비할 수 없으리만큼 황량한 곳이었다. 한편 본래의 한자어가 가지는 의미와 상관없이 ‘무’와 ‘창’으로 발음되는 이곳 지명의 어감은 ‘만리포’ ‘경포대’ 같은 제법 화사한 느낌을 주는 지명과는 대조적이다. 따라서 시가 가지는 쓸쓸함, 고달픔의 분위기는 이런 ‘무창포’에서 제격인 것이다.
서해안에는 이름난 해수욕장이 많지만 무창포해수욕장은 상대적으로 사람들에게 덜 알려진 곳이다. 서해안의 대표격이라 할 대천해수욕장을 지척에 둔 탓에 그 진가가 가려진 점도 없지 않다. 이름난 동백정을 거느린 서천의 춘장대해수욕장과 대천해수욕장 사이에 낀 무창포는 오히려 그 덕분에 호젓하고 맑고 특히 봄가을에 거닐기 좋은 해변이다. 백사장이 길고 수심이 얕고 주변엔 송림이 울창하다. 이런 좋은 여건들을 갖추고 있기에 대천보다 먼저 서해안 최초의 해수욕장으로 개장됐다. 하지만 교통이 썩 좋은 편이 아니어서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매월 음력 보름날과 그믐날을 전후해 하루에 두세 번 해변에서부터 바로 앞의 석대도까지 1.5km의 바닷길이 열린다. 요사이엔 이 바닷길을 걸으며 자연의 신비로운 변화를 체험하며 아울러 게, 조개 등을 채취하는 즐거움을 누리려는 가족 단위의 관광객이 늘어나고 있다.
서해안고속도로 대천나들목을 빠져나와 시내 쪽으로 방향을 틀면 이내 대천역을 만난다. 역 앞 사거리에서 북쪽 길을 택한 다음 대천천을 건너 대천여자고등학교를 향해 가다보면 학교에 못미쳐 동부아파트를 만난다. 아파트 오른쪽에는 밭뙈기 몇이 있고 그 너머에 나무들 우거진 야산이 있다. 야산 한쪽 자락에 서너 채의 슬래브 집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소설가 이문구의 생가이며 이 일대가 이른바 관촌마을이다. 행정구역상으로 생가는 보령시 대천동 387번지이고, 작가는 1941년 4월 12일 여기서 태어났다.
‘관촌수필’의 고향
이곳 관촌마을은 윗갈머리(上冠村)와 아랫갈머리(下冠村) 중 아랫갈머리로서 연작소설 관촌수필(冠村隨筆)의 무대이며 또한 저자 이문구의 출생지이다. 현 농지개량조합이 있는 곳은 왕소나무가 서 있던 자리다. 드넓은 농경지로 변한 마을 앞 철로 건너편은 조수(潮水)가 드나들던 갯벌이었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던 소나무 숲과 서쪽 언덕 위에 마을 처녀들이 그네를 뛰던 팽나무는 지금까지도 남아 있어 관촌마을의 토속적 향수를 달래주며 지나가는 이들의 발길을 머물게 하고 있다.
1995년 이 지역 문인들이 마을 어귀에 세운 관촌마을기념비에 적힌 문구다. 그 흔한 문학비 하나도 이곳엔 없다. 죽은 뒤 화장해 마을 뒷산에 뿌리고 여타 아무것도 만들지 말라는 작가의 유언에 따른 일이다. 문화 창달과 관광객 유치라는 명분으로 지방정부며 단체들이 작가들의 생전 업적과 관계없이 다투어 문학관을 짓고 시비, 문학비를 세우는가 하면, 살아 있는 이가 스스로 제 자랑의 돌을 세우고 세금까지 축내는 근래의 세태를 보노라면 죽어서까지 깔끔한 이문구의 뒷모습이 더욱 돋보인다.
고향마을을 무대로 한 소설 ‘관촌수필’은 이문구의 대표작이다. 6·25전쟁 무렵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곳 농민들이 겪는 삶의 애환을 특유의 입담과 토속어로 그려나간 이 연작소설은 곧 우리 모두가 겪은 산업화, 근대화의 한 실상을 고스란히 기록한 소설이기도 하다. 리얼리즘 문학과 사회주의 문학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때에도 이편 저편을 아우르며 통 크고 정 깊게 문단을 이끌었던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이 아직도 많은 이에게 그대로 남아 있다.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이문구는 동시집을 출간했다. 이승의 짐을 훌훌 벗고 저승으로 가는 길에는 더 이상 소설적 산문이 소용없음을 알았던 것일까.
산 너머 저쪽엔
별똥이 있겠지
밤마다 서너 개씩
떨어졌으니
산 너머 저쪽엔
바다가 있겠지
여름내 은하수가
흘러갔으니
- 이문구 동시 ‘산 너머 저쪽’ 전문
어릴 적, 사람마다 꿈꾸었던 ‘산 너머’의 세상은 각박한 생애를 마치고 이승을 하직할 무렵 다시 새롭게 다가드는 모양이다. 별똥과 은하수로 채워진 바다, 지금쯤 그도 그 바다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보령 땅은 이문구 외에도 또 한 명의 작가를 낳고 키웠다.
나는 1947년 충남 보령군 청라면 장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동구 앞 멀리 대천과 청양을 가로지르는 신작로가 보이고, 해발 6백 미터쯤 되는 오서산의 산자락이 마을을 휘감고 있는 구렛굴이라는 산촌이었습니다….
이 글은 1980년대 중반에 출간된, 당시의 인기작가 10명의 글을 모은 산문집에 실려 있는 소설가 김성동의 글 한 구절이다. 소위 잘나간다는 젊은 작가들이 ‘상처 받은 젊은 영혼들에게 들려준다’는 이 글들은 지금 보면 꽤나 치기 어린 것일 수도 있다. 이문열, 이외수, 김홍신, 박범신 같은, 요즘에도 쟁쟁한 이름의 작가들 사이에 분에 넘치게 내 이름자도 끼어 있었기에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구도(求道)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소설 ‘만다라’를 펴내 일약 유명해진 김성동과는 한때 지방도시의 한 아파트 단지 앞뒤 동에 살 정도로 친하게 지내기도 했지만, 세월이 세월인지라 어느덧 그와도 소식 끊고 산 지 스무 해가 넘었다.
하여 젊은 제자들과 함께 눈길을 뚫고 오서산을 찾아가던 때에도 이 어디쯤이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란 생각은 추호도 하질 못했다. 그런데 나중 알고 보니 오서산 자연휴양림 초입, 저수지가 있는 그 산간 마을이 바로 그의 출생지 장현리였다. 그런 줄 알았으면 차를 세우고 마을 사람들에게 수소문이라도 해볼걸….
그러고 보면 김성동은 오서산의 기운을 타고난 셈이다. 이 산은 보령시와 홍성군 경계에 있다.장항선 광천역에서 4㎞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열차를 이용한 산행을 하기에도 편리하다. 정상에 오르면 서해가 지척으로 다가와 보이는 까닭에 인근 항포구 사람들은 이 산을 ‘서해의 등대산’으로 부르기도 했단다. 산 정상을 중심으로 2㎞ 정도의 주능선은 온통 억새밭이라 특히 가을날 이 산을 찾는 사람이 많다.
어느 때는 향내 넘치는 절간에서보다 잡초 속에 주춧돌이 뒹구는 폐사의 절터에서 더 많은 생애적 상념을 가질 수 있다. 불교가 말하는 공(空)과 무(無)의 실상을 텅 빈 절터만큼 여실히 보여주는 데가 달리 있을까.
성주사 절터의 상념
보령시청에서 부여 방면으로 가다보면 머잖아 성주터널을 통과한다. 성주산의 아랫도리를 파고든 이 터널을 지나면 이내 성주면 소재지에 닿는데, 여기서 북쪽 방향의 큰길을 따라가면 쉽게 성주사 터를 만나게 된다. 성주계곡과 심연동계곡으로 가는 길이기도 한 이 길은 곱고도 평화롭다. 아름드리 고목들이 길가를 지키고 있는가 하면 성주천 맑은 냇물이 소리 없이 길을 따르기 때문이다. 멀리 보이는 성주산 봉우리도 운치가 있다.
기록에 따르면 성주사는 통일신라시대에 9산 선문의 대표적 사찰이었다. 백제 법왕이 창건한 절을 통일신라 때 당에서 귀국한 무염(無染) 화상이 크게 중창했다고 전한다. 백제 멸망 때는 붉은 말이 나타나 몇날 며칠 슬프게 울었다는 전설도 있다. 절은 임진왜란 때 전부 소실됐지만 그동안 몇 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해 가람의 구조와 형태는 대부분 밝혀졌다. 지금은 드넓은 대지에 몇 기의 석탑과 석등, 석불이 남아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낭혜화상 탑비가 있다.
국보라 해서 사람들은 한 승려의 생애를 적은 이 탑비에 유독 큰 관심을 보이지만, 나 같은 이한테는 그보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못생긴 석불 입상 하나가 더 인상적이다. 깨지고 부서진 데마다 덕지덕지 시멘트를 붙이고 있는 이 불상은 얼굴 생김새도 기이하여 우는지 웃는지 구분이 안 된다. 남루하면서도 천의무봉한 그 모습을 보노라면 이곳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미륵불로 여겨온 이치도 알 만하다.
성주사터가 과거 시간이 포개져 있는 곳이라면 다음에 찾는 오천항은 과거와 현재가 잘 어우러진 역동적인 포구다. 주교면 소재지에서 610번 도로를 타고 서해안 방향으로 달리면 이곳에 이른다. 가는 도중에는 토함 이지함의 묘소도 들러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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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는 바다가 육지로 파고든 만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 입구 쪽 바다가 곧 천수만이며 그 바다 너머의 육지가 안면도다. 천연적으로 바깥 바다의 파랑(波浪)을 막아주는 지형인지라 따로 방파제가 필요 없다. 낚시꾼들에겐 일찌감치 주꾸미며 갑오징어 낚시 기지로 잘 알려진 이곳은 조선시대만 해도 서해를 지키는 주요 군항지였다. 조선조 중종 때 이곳에 충청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된 것도 봐도 그렇다. 서울로 가는 조운선(漕運船)을 지키고 왜구들의 침탈을 방어하는 것이 이 수영(水營)의 임무였다.
당시에 쌓은 수영성은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지금도 거의 온전히 남아 있다. 포구에서 키조개를 다듬는 아낙들의 부지런한 손길을 바라보다가 성에 오르면 한순간에 수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느낌이 든다. 특히 낙조 무렵, 성벽 위의 산책로를 걸으며 바라보는 주변 풍경은 넋을 놓을 정도로 장엄하고 아름답다.